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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Dooyory Jan 17. 2023

신호

신이 보내는,


아무것도 하기 싫고, 누구도 만나고 싶지 않을 때

무작정 집에서 나와 평소엔 가지 않던 길을 따라 걷는다.

어떤 날엔, 두 번째 골목으로. 또 어떤 날엔 그 다음 골목으로.

그렇게 걷다가 우연히 마주치는 장면들은 기억하려 애쓰지 않아도

오래 기억에 남는다.


처음 서울에 왔을 때, 합정에 터를 잡게 되었는데

그 이유는 갑작스레 파주출판단지로 출근을 하게 되어서였다.

현실적으로 파주와 가장 가까운 서울이기도 했고

합정역에서 출판단지로 곧장 향하는 셔틀버스가 있기도 했으니까.

다른 선택지가 없었다기 보다는, 최선의 선택지를 골랐던 거다.


학창시절의 대부분을 경기도민으로 살던 내가, 마포구 합정에서 살게 되다니.

무엇보다 빨리 걸으면, 5분 안에 한강을 볼 수 있다는 사실이 더욱 설렜다.


한강, 한강.

이유는 알 수 없지만, 소리내어 부르기만 해도 마음이 잔잔해지던 때가 있었다.


일을 마치고 해를 등지며 퇴근을 할 때마다 배에서는 꼬르륵 소리가 꾸준히 났다.

먹어도 먹어도 배고픈 시절이 누구에게나 있으니까.

나도 그때는, 그 시절을 보내고 있었다.


한 달을 꼬박 일하고 받는 월급이라는 것은,

말 그대로 먹고 또 살기에 적당하지는... 않았다.

보증금에, 월세. 전기세, 수도세, 가스비, 관리비.

무슨 돈 나갈 곳이 이렇게나 많은지.


부모님과 함께 살 때는, 정말 아무것도 몰랐다는 사실이 부끄러워지면서

또 한편으로는 나를, 나라는 인간을 먹고 입히고 키우고 했다는 사실이 존경스럽게 느껴졌다.

그럴 때마다, 더 열심히 살아야겠다고, 꼭 성공하고 말겠다고 두 주먹을 꽉 쥐었던 것 같다.


다시, 아무것도 하기 싫고 어느 누구도 만나고 싶지 않을 땐

무작정 집에서 나와 내 앞에 놓인 길을 걷는다.

그렇게 아무런 기대없이 걷다보면 내 앞에는

오늘이 아니면 다시는 볼 수 없을 것만 같은 순간들이 펼쳐지고

나는 그 순간들을 놓치지 않고 목격하는데,

그 순간이 내겐 지난 가을 한강에서였다.


붉게 타오르는 하늘, 머리칼을 흩날리며 내 곁을 스치는 바람.

꼬리를 살랑이는 강아지와 그 강아지를 보며 웃는 사람들.

유모차에 앉아 해맑게 웃는 아이들과, 그 아이를 보며 웃는 엄마들.


문득 그리워지는, 우리 엄마.


그리고 눈앞에 펼쳐지는 완벽한 하늘.
이런 하늘은 꼭 신이 보내는 메시지 같다.


엄마에게, 전화를 걸어야겠다.


2022, 잠원한강공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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