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정우성 May 13. 2019

우리는 사자꿈을 꾸고 있었다

재가 될 것 같은 날도 있었지만, 나한텐 늘 못다한 최선이 남아있었다.

마음속으로 미리 계산을 해뒀다. A4 한 장을 쓸 때, 2페이지짜리 기사를 쓸 때, 4페이지짜리 기사를 쓸 때 걸리는 시간의 통계를 나 혼자 갖고 있었다. 그래야 하루에 채울 수 있는 원고의 총량을 계산할 수 있었다. 마감 땐 그렇게 하루에 200자 원고지 60매, 1만 자 이상의 원고를 쏟아냈다. 그러면서 욕심을 접지도 못했다. 더, 더 잘 쓰고 싶었다. 


한 달에 한 번, 마감은 그런 시간이었다. 기자 직함을 달고 쏟아내듯 쓰던 때였다. 실력, 욕심, 효율이 제각각 충돌하면서 어쨌든 최선의 결과물을 만들어야 하는 기간. 다른 어떤 기준보다 스스로가 만족해야만 마침표를 찍을 수 있었던 고집. 지치는 줄도 모르고 그저 쓸 수 있다는 사실 자체에 잔잔한 자부심과 흥분을 느끼던 때이기도 했다. 하지만 금세 공포에 질리는 날도 있었다. 그럴 땐 언어가 돈 같았다. 두서없는 소비에 바닥나는 잔고처럼, 이렇게 쏟아내다 모조리 사라질 것 같았다. 


어떤 날 꿈엔 누가 말을 걸어도 대꾸를 못했다. 하고 싶은 말을 발성도 못 했다. 쪽지를 건네고 싶어도 그럴 수 없었다. 언어가 다 사라졌으니까, 말도 못 하고 글도 못 썼던 것이었다. 이렇게 영원히 침묵해야 한다면 나는 어떻게 살아야 하지? 아직 사랑하다는 말도 못 했는데? 더 이상 기자로 살 수도 없겠구나. 내일 사표를 내야 하나? 아, 사표도 못 쓰겠네. 하지만 그런 이유로 영원히 은둔할 수 있다면, 그건 그대로 썩 좋은 삶일 거라고 생각하기도 했다. 때로, 우리한테 필요한 건 결심이 아니라 명분이니까. 



비슷한 공포를 대학 도서관에서 느낀 적도 있었다. 시험이 끝난 평일 오후였다. 다음 강의까지는 세 시간 정도가 비어있었다. 점심을 먹고도 여유가 있는 날이었다. 같이 식사를 마친 친구들은 제각각 다음 강의실로 흩어졌다. 나는 시간을 보내려고 도서관으로 갔다. 2층 열람실로 올라가던 계단에서 고개를 들었을 때 서가가 눈에 들어왔다. 사람이 없고 책이 빽빽한 장면이 마냥 한적할 거라고 생각했는데, 나는 이유도 없이 아찔해졌다. 번쩍하는 감각이 아니었다. 온몸이 저렸다. 아연해서 질려버렸다. 이후의 기억은 흐릿하다.


그때 나를 잡아먹을 듯이 눈에 들어온 것들. 문학이었는지 인문이었는지, 나는 갑자기 바다 위에 혼자 선 것 같았다. 한계 없이 막막한 공간에서 갑자기 느껴지는 공포. 바라보면 거대한 덩어리 같아서 심지어 액체라는 감각마저 사라진 공간으로서의 바다. 거대한 생명체처럼, 뛰어들면 그대로 먹혀버리고 마는 객체로서의 바다가 거기 있는 것 같았다. 


숫자만 봐서는 알 수 없는 도서 분류 코드, 줄줄이 이어져 있는 나무 책장들의 무게가 거대한 파도 같았다. 그게 나를 덮치는 것 같았다. 책장에 놓여있는 책들이 내 몸 위로 겹겹이 쌓였다. 그 엄청난 책의 저자와 작가, 그들의 말과 글, 언어와 생각이 나를 묶어버린 것 같았다. 실제로 호흡이 곤란해졌다. 하얗고 불투명한 빛이 시야를 가리기 시작했다. 어지러워서 계단 위에 멈춰 섰다. 그렇게 웅크리고 보냈던 시간은 몇 초였지? 몇 분? 열람실에는 못 들어갔다. 그대로 옥상까지 올라가 찬바람을 쐐야 했다.


기자, 에디터, 작가라는 직함은 들을 때마다 멋쩍었는데, 지금의 나는 그때 그토록 무서웠던 말과 글의 바다 위에 작은 배를 한 척 띄운 셈이었다. 무슨 말과 어떤 글을 낚아 엮을 수 있을지는 모르는 채, 매일 나서야 하는 항해니까 거를 수 없는 그 영원한 시간 위에 나도 있었다. 내가 선택한 공포였다. 헤밍웨이는 <노인과 바다>에 이렇게 썼다. 



”노인은 낚싯줄을 놓고 한쪽 발로 그것을 딛고 서서 작살을 힘껏 높이 치켜들었다가 마지막 힘을 다해, 아니, 그 이상으로, 자신의 가슴 높이까지 솟아오른 고기의 가슴지느러미 바로 뒤쪽 옆구리에 콱 꽂았다. 작살의 날이 고기의 살 속을 뚫고 들어가는 것이 느껴졌고, 그는 작살에 기대어 그것을 더 깊숙이 박고 나서 자신의 온 무게를 실어서 밀어 넣었다. 죽음을 맞은 고기는 갑자기 생기를 되찾은 듯이 수면 위에 길쭉하고 널찍한 몸뚱이와 함께 그 위력과 아름다움을 아낌없이 드러냈다.”


산티아고 할아버지는 배 위에 있는 모든 도구로 싸웠다. 노, 몽둥이, 키를 다 잃었다. 청새치의 가치와 아름다움은 상어 떼에게 모조리 빼앗겼다. 삶과 죽음의 경계 위에 있었던 며칠이었다. 일생의 성취와 좌절의 경계이기도 했다. 그 광막한 바다 위에서 혼자 생각했다. 


“인간은 패배하도록 창조된 게 아니야. 인간은 파멸당할 수는 있을지 몰라도 패배할 수는 없어.”


요즘도 매일 바다 한가운데 혼자 선 것 같은 심정으로 매일 책상에 앉는다. 이러다 거대하고 아름다운 청새치를 만나는 날도 올까? 어쩌면 삶과 죽음, 성취와 좌절의 경계 위에서 모든 것을 다 소진하고는 지쳐 쓰러지겠지. 하지만 좌표도 없이 너무 멀리 떠나온 바다 위, 살기 위해선 멈출 수도 없는 싸움이라는 걸 지금은 안다. 혹시 이게 일상의 정체일까? 각자의 바다에서 이런 공포에 맞서 싸우는 하루하루가? 버틸 수 있다면 돌아갈 수도 있을 것이다. 그때 내 옆에 있는 사람에게, “사랑해요" 말할 수 있는 언어가 남아있었으면. 


가까스로 판잣집으로 돌아와 누운 산티아고 할아버지는 곧 깊은 잠에 빠져 들었다. 성취는 없었지만 좌절하지도 않았던 일상 위에서였다. 배울 것이 많은 소년이 산티아고 할아버지 곁에서 따뜻한 커피를 권할 때, 서울에는 비가 내리고 있었다. 여전히 쓸 때마다 막막하고, 너무 많은 책과 위대한 작가와 아름다운 글 사이에서 자주 흐릿하다. 하지만 더 못 써서 아쉬운 밤은 있어도 언어가 사라질까 겁내진 않는다. 봄비 같은 오후. 비가 그쳐도 하루는 끝나지 않을 것이다. 자연스럽지만 당연하지는 않은 일. 우리는 사자 꿈을 꾸고 있었다.


글/ 정우성

그림/ 이크종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