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정우성 Jun 17. 2019

술 취한 돼지들이 부르는 노래

정치는 나와 관계없이, 그저 뉴스 정도라고 생각하고 싶었지만.

눈에는 보이지 않는, 기체로 된 거인이 내 목을 천천히 조르고 있는 것 같았다. 그 집요한 손을 뿌리칠 수가 없었다. 회사 생활을 막 시작했을 즈음이었다. 내 손으로 돈을 벌고, 그 돈으로 어떻게든 살아남을 계획을 세워야 하는 때이기도 했다. 버는 돈은 생각보다 적었다. 필요한 돈은 상상 이상으로 많았다. 나는 어떻게 살아야 하지? 부모님은 어떻게 살아오셨던 거지? 취직하자마자 독립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던 나는 내내 어린이 같았다. 갑자기 어른이 돼야 했다. 점점 답답해졌다.


월급을 받는다고 다 내 돈이 아니었다. 쓸 수 있는 돈에는 확실한 상한선이 있었다. 연봉이 오른다고 생활이 드라마틱하게 나아지는 것도 아니었다. 연봉의 숫자는 자존감을 현혹하기 위한, 자본주의가 고안해 낸 좀 이상한 신분제 같았다. 어쩌면 함정 같았다. 뒤에 ‘0’이 하나 더 붙는 연봉을 받는 사람의 세계가 마냥 행복한 것도 아니었다. 얻기 위해 희생해야 하는 게 너무 많았다. 그러니 월급이 많거나 적거나 모이면 푸념이었다. 어떻게 하면 일을 그만두고도 살 수 있을지, 일하지 않고 살 수 있는 방법은 없는지, 어쩌다 지난주에 산 복권은 맞춰보는 것도 잊어버렸는지에 대한 얘길 울지도 않고 했던 나날들. 



그렇게 몇 년을 살아남았을 때였다. 연봉 앞자리가 바뀌는 것보다 통장 앞자리가 바뀌는 데 재미를 느끼던 즈음이기도 했다. 앞으로도 이렇게 어찌어찌 살면 되겠다 싶은 마음이 들 때 즈음 다른 사람들의 죽음이 눈에 들어오기 시작했다. 어떤 사람들은 살려고 애를 쓰다 그렇게 됐다. 그 사람들한텐 거기가 배수의 진이었다. 몇 년이 더 지났을 땐 어쩔 도리도 없이 너무 많은 아이들을 잃었다. TV를 보다가 쩍, 하고 마음이 갈라진 아침이었다. 영영 다시 붙지 않을 것 같은 균열이었다. 내 목을 쥐고 있던 거인의 손아귀가 정확히 느껴졌다. 그는 더 이상 기체가 아니었다. 열심히 살았던 모든 날이 죄 같았다. 가까스로 슬픔을 추스를 무렵에는 두려움이 몰려왔다. 이미 죄인 같은데, 앞으로도 죄인으로 살아남아야 할 것 같아서.


서울에는 죄책감과 눈물 없이 지날 수 없는 장소가 하나씩 늘고 있었다. 마음이 갈라진 틈에 그 눈물들이 모여서 연못이 되었다. 어떤 상처는 사라지지 않는 법이니까, 시간이 지나면 강이 될 연못이었다. 그렇게 깊어지는 마음이 있었다. 상처는 들여다볼 때마다 아팠다. 하지만 내가 아픈 건 아픈 것도 아니라는 미안함 때문에 아프다는 얘기를 꺼낼 도리도 없었다. 혼자, 상처가 거기 있다는 느낌을 선명하게 자각하면서, 어떻게든 알아서 살아남아야 하는 법이었다. 내가 친 배수의 진이었다. 


물러날 길이 없다고 생각하니까 눈에 들어오는 것들이 있었다. TV에선 믿을 수 없는 말을 반복하는 사람들이 저 위에서 떠드는 소리를 실시간으로 들을 수 있었다. 제대로 생각하는 사람이라면 못할 소리들을 큰소리로 외치는 사람들이 너무 많았다. 그런 사람들 앞에서 부끄러움을 논하는 건 그대로 지치는 일. 가르친다고 배울 수 있는 것도 아니었다. 그들은 나를 살게 하려는 사람들이 아니었다. 목적이 달랐다. 그들이 살기 위해서 다른 사람의 죽음은 어쩔 수 없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었다. 



죽었으니까 잊으라고 말하는 사람들이 저 높은 데서 뽀얗고 피둥피둥한 얼굴로 말하고 있었다. 미디어는 알아서 확성기가 되어주었다. 하찮은 말일수록 멀리 퍼졌다. 분노도 관심이었다. 그게 권력이었다. 내 삶을 쥐락펴락할 수 있는 사람들, 내가 버는 돈의 일부를 쌈짓돈으로 쓰는 사람들, 누군가의 슬픔을 자신의 정략으로 삼는 사람들이 거기 있었다. 내 목을 조르던 거인의 정체가 거기서 드러나는 것 같았다. 그렇게 모진 말, 제정신으로는 못할 말을 하는 사람들도 지지층이라는 게 있었다. 그게 정치의 본질이자 더러움이었다. 모두가 각자의 목적으로 정치하는 사람들. 모두가 각자의 목적으로 지지하는 사람들이었다.  


조지 오웰이 쓴 <동물농장>에선 돼지들이 선봉에 있었다. 몇 마리의 돼지가 그대로 선명한 은유였다. 끝난 권력, 살아있는 권력, 권력 주변의 권력과 모두를 속이는 권력이 모조리 돼지였다. 권력 밖에도 다양한 동물이 있었다. 의심은 있지만 무기력한 클로버, 우직하게 일하다 결국 죽는 복서, 각설탕을 좋아해서 결국 다른 농장으로 넘어가는 몰리는 모두 말이었다. 당나귀와 염소, 닭과 개, 까마귀와 고양이들이 그대로 사회였다. 누가 마르크스고 누가 스탈린이었는지에 대한 분석을 넘어, 그저 정치와 사회의 본질에 명백히 닿아있는 직유였다. 조지 오웰은 에세이 “나는 왜 쓰는가”에 이렇게 썼다. 


“<동물농장>은 내가 정치적 목적과 예술적 목적을 하나로 융합해 보고자 한, 그래서 내가 뭘 하고 있는지 충분히 의식하면서 쓴 첫 소설이었다.”



끝에, 돼지들은 인간이 살던 집 안에서 두 발로 걸었다. 쫓아냈던 인간과 다시 결탁하면서 파티를 열고 도박을 했다. 술을 마시고 침대에서 잤다. 여전히 동물이면서 동물이 아닌 삶. 권력이 가능케 하는 일이었다. 여전히 인간이면서 인간이 아닌 삶 역시 권력이 가능케 하는 일일 것이다. <동물농장>은 이렇게 끝났다.


“열두 개의 화난 목소리들이 서로 맞고함질을 치고 있었고, 그 목소리들은 서로 똑같았다. 그래, 맞아, 돼지들의 얼굴에 무슨 변화가 일어났는지 이제 알 수 있었다. 창밖의 동물들은 돼지에게서 인간으로, 인간에게서 돼지로, 다시 돼지에게서 인간으로 번갈아 시선을 옮겼다. 그러나 누가 돼지고 누가 인간인지, 어느 것이 어느 것인지 이미 분간할 수 없었다.”


우리는 권력이 없어서 끝내 슬픈 얼굴들을 이미 너무 많이 안다. 명백한 애도의 순간에도 끝내 무표정했던 얼굴 역시 너무 많이 알고 있다. 그 모질고 뻔뻔한 말들은 이제 영원히 못 잊는다. 그래서, “모든 국가는 그에 걸맞은 정부를 가진다”는 조제프 드 메스트르의 말은 들을 때마다 섬뜩했다. 시대가 변한다고 달라지거나 체제를 가리는 말이 아니라서. 정부가 바뀐다고 나쁜 정치인이 사라지는 것도 아니니까. 지난 주말 광화문에서도 누군가는 확성기를 들고 있었다. 원하는 바가 분명해서 소리 지르는 인간 주변에 또 다른 인간들이 여럿 모여 있었다. 


글/ 정우성

그림/ 이크종

매거진의 이전글 우리는 사자꿈을 꾸고 있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