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렇게 어렸으면서 어린 줄 몰랐던 저녁, 땅을 보면서 했던 말.
중학생이 된 후에는 일찍 잠든 적이 없었다. 12시? 11시 반? 어쨌든 그즈음이었다. 숙제를 하다가 책을 읽거나 라디오를 듣거나. 고요한 밤, 시간을 좋게 보내는 방법은 그때도 너무 많이 알았다. 좋아하는 디제이한테 팩스로 사연을 보내 놓고 두근두근 기다리는 밤이 있었다. 친구한테 빌린 소설책을 읽고 어제 산 시디를 들었다. 비밀스럽고 개인적인 시간이었다.
학원에선 외고나 과학고 같은 특수목적고에 들어갈만한 아이들을 각각 문과와 이과로 나눠 자습실을 내줬다. 우리는 밤늦게까지 자습실에 같이 있었다. 인간은 어떤 상황에서든 공부할 수 있고 어떤 상황에서든 놀 수 있다는 걸 그때 알았다. 자습실은 거의 유일하게 우리끼리 독립된 공간이었다. 우리는 틈틈이 놀 수 있었다.
출출한 밤에는 가까운 시장 분식점에서 떡볶이랑 어묵을 사 먹고 음료를 마시면서 동네를 걸었다. 누가 새 카세트테이프를 갖고 오면 강의실에 틀어 놓기도 했다. 주말엔 학원 근처에 있는 중학교 운동장에서 농구를 했다. 그날도 그런 날이었다. 2시에 만나 같이 가기로 했는데 나는 30분쯤 늦은 토요일. 학원 강의실에 들어갔더니 같은 반 여자애만 한 명 남아있었다.
“응? 혼자 있어? 다 어디 갔어?”
“농구하러 갔지.”
“넌 왜 안 갔어?”
“너 오면 같이 가려고. 애들 먼저 가라고 했어. 가자, 얼른. 애들 기다려.”
밝고 따뜻한 날이었다. 봄의 끝자락에서 공기가 점점 따뜻해지고 있었다. 사진처럼 선명하게 남은 골목. 한 손에 농구공을 들고 같이 걸을 때 살짝만 스치던 서로의 팔. 바닥에 공을 튀기면서 좀 빨리 걸었을 때 저 뒤에서 “천천히 가, 같이 가자” 말하던 소리가 그 공기 속에 머물렀다 금세 흩어졌다. 월요일부터는 시험이었다. 아무래도 상관없진 않았지만, ‘세상엔 시험보다 중요한 게 있는 것 같아’ 농구공을 들고 혼자 생각했던 골목이었다. 바로 그날부터 우리가 가까워졌다는 건 몇 년이나 지난 후에 알았다.
시험공부가 늦게까지 이어질 땐 자정 즈음까지 학원 자습실에 있었다. 학원에서 집까지는 걸어서 20분 정도 걸렸다. 우리는 10분 정도 떨어진 거리에 살았다. 같이 걷는 날이 많았고, 은연중에 서로를 챙기기 시작했다. 그 애가 나를 보면서 기척을 느낄 때까지 기다리거나 내가 일어나면서 “넌 안 가?” 묻는 식이었다. 그렇게 서로의 문제집이 덮이는 걸 잠자코 기다리던 예쁜 시간. 길이 갈라지는 골목 어귀에선 늘 같은 말을 했다. “같이 가, 바래다줄게”와 “정말? 너 졸리지 않아?” 같은 말. 헤어질 땐 몇 번인가 쪽지를 주고받기도 했다.
시험은 싱겁게 끝났고 자습실은 한산해졌다. 우리는 둘이서 저녁을 먹었다. 공부는 하지 않았다. 자습실에서 각자의 책을 읽다 평소보다 일찍 일어났다. 늘 꺼져 있던 간판들이 아직 밝은 시간, 오른쪽으로 꺾어지는 골목 어귀에서 내가 말했다.
“이대로 아무것도 변하지 않았으면 좋겠어.”
이때 눈에 들어온 그 애의 옆모습을 사진처럼 기억하고 있다. 안경 너머, 안 그래도 동그란 눈이 얼굴의 절반이 된 채 그 애가 물었다.
“뭐가?”
“그냥 우리. 친구들이랑, 이렇게 같이 있는 거.”
나는 땅을 보면서 얼버무렸다. 그때 내 얼굴은 무슨 색이었을까? 사실 친구들은 상관없었다. 중요한 건 우리였다. 적어도 그날 그 골목에선 그랬다. 좋은 시간은 그대로 변하지 않았으면 좋겠다는 어린 바람이었다. 세상엔 변하는 것과 변하지 않는 것이 명확히 정해져 있다는 건 꿈에도 모르는 채, 그렇게 우린 몇 날 밤을 같이 걸었을까?
무라카미 하루키의 <노르웨이의 숲>에선 하쓰미와 선배와 와타나베가 나눈 이런 대화가 있었다.
“그러니까 나도 하쓰미 씨가 행복해지면 좋겠어요. 그렇지만 참 이상하죠. 하쓰미 씨 같은 사람이라면 누구 하고도 행복해질 것 같은데 어쩌다 나가사와 선배 같은 사람을 만나버린 걸까요?”
(중략)
“그렇지만 사람은 바뀌어.”
“사회에 나가 세상의 거친 바람을 맞고 좌절하고 어른이 되고…… 그런 거요?”
나가사와는 “개츠비를 세 번 읽은 사람과는 친구가 될 수 있다” 같은 말을 할 줄은 알았지만 애인을 아낄 줄은 모르는 반푼이었다. 하쓰미는 그런 나가사와가 언젠가 변할 거라고 믿었지만, 나쁜 관계는 나빠지기만 하는 법이었다. 관계는 변했지만 사람은 그대로였다. 변하지 않은 채 멀어지기만 했다. 그게 세상의 규칙이었다. 하쓰미는 곧 자살했다.
지금 좋은 것들이 변하지 않기를 바라는 마음과 나쁜 것들이 언젠가는 변할 거라고 믿는 마음은 늘 이렇게 좌절하는 걸까? 시간은 누구의 편일까? 버텨낸 사람? 실은 용감하게 외면해버린 사람을 더 편애하는 게 아닐까? 어른의 문턱에서 영원히 멀어진 사람과 가까워진 사람, 죽은 사람과 산 사람 여럿이 <노르웨이의 숲> 안에 갇혀 있었다. 누구도 서로에게서 자유로울 순 없다는 걸 깨닫는 데 필요한 건 오로지 각자의 슬픔이었다.
1년 후, 나는 입시에 실패했다. 그 애는 외고에 진학했다. 우리는 학원에서 가끔 마주쳤지만 서로 다른 세계에 사는 사람이었다. 같이 집까지 걷는 일도 없어졌다. 떡볶이를 먹는 저녁, 농구공을 들고 인근 중학교로 놀러 가는 주말도 원래 없었던 것처럼 사라졌다.
떠올리기에도 너무 오래된 장면들. 아무도 죽지 않았길 바라면서 이미 죽은 것처럼 사는 일에는 차근차근 익숙해졌다. 이젠 서로를 알아볼 수도 없을 것이다. 이대로 아무것도 변하지 않았으면, 땅을 보면서 수줍던 아이는 이제 어른이 되었을까.
글, 사진 / 정우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