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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우성 Feb 04. 2023

연주회에 가는 이유

이번엔 막스 리히터 feat. 한수진

막스 리히터의 팬이라고는 할 수 없겠지만, 비발디의 사계를 재편성한 몇몇 작품에 대한 좋은 인상이 있다. 아스트로 피아졸라가 작곡한 부에노스 아이레스의 사계와 비발디의 사계를 나란히 놓은 기돈 크레머의 앨범을 좋아한다. 막스 리히터가 다시 작곡한 사계도 그런 앨범 중 하나였다. 2월 2일 롯데 콘서트홀 연주에서는 오케스트라 디 오리지널과 바이올리니스트 한수진이 이 곡을 연주했다. 1부에는 막스 리히터와 루드비코 에이나우디의 곡을 들었다. 

연주회마다 독특한 분위기가 있다. 오케스트라 협연을 앞둔 예술의 전당 로비와 <호두까기 인형> 연말 공연을 기다리는 세종문화회관 로비의 분위기는 아주 다르다. 막스 리히터 같은 미니멀리즘 현대 음악가의 공연을 앞둔 롯데 콘서트홀의 분위기도 아주 달랐다. 조금 더 차분하고 차가운 느낌. 멀리 떨어져 있는 모르는 사람들끼리도 서로 조심하는 느낌이었을까. 


오케스트라 공연을 앞둔 로비에는 잔잔한 흥분이 있다. 고요하게 지속되는 어떤 울림도 있다. 시끄럽지 않지만 분명히 웅성거린다. 보고 싶고 듣고 싶었던 연주자를 실제로 접할 수 있다는 기대가 공간을 가득 채우고 있다. <호두까기 인형>의 로비에는 아이들을 위해 길을 나선 어른들의 따뜻함이 있었다. 하지만 어른들도 즐거워. 발레 공연의 아름다움과 꿈 같은 이야기를 앞둔 사람이 마냥 평온할 수도 없다. 그렇게 아이와 어른이 비슷한 주파수로 공명하는 공간이 바로 연말의 세종문화회관이었다. 


어떤 느낌의 설렘이든, 연주회는 로비부터 두근거린다. 전혀 모르고 아주 다른 사람들이지만 어떤 결은 분명히 비슷할 거라는 공감대가 있다. 그로부터 느낄 수 있는 편안함과 소속감이 있다. 다른 어느 곳에서도 느낄 수 없는 느슨한 긴장. 이런 느낌의 커뮤니티를 만들 수 있을까, 더파크의 미래를 조심스럽게 설계해 보기도 한다. 


R석이 9만원이었으니까 그렇게 큰 부담도 아니었다. 너무 좋은 자리에 앉아서 2부 첫 악장이 시작하는 순간부터 어마어마했다. 음악가란 대단하구나. 악기를 다루는 재능이라는 것은 사람의 마음을 이렇게 순식간에 사로잡는구나. 한수진의 연주를 눈 앞에서 본 것은 처음이었다. 막스 리히터가 해체해서 다시 조립한 사계를 독특한 편성의 오케스트라와 정통 클래식 주자가 연주하는 것을 들은 것도 처음이었다. 처음은 늘 좋다. 다음을 상상할 수 있다는 점에서 뭐라 표현할 수 없는 여유가 생겨. 


공연장에선 음악들이 안도하고 있다는 느낌도 좋다. 음악의 입장에서, 드디어 BGM의 지위를 벗어날 수 있는 것이다. 듣는 사람의 집중을 온전히 받고 느끼면서 그 공간을 가득 채울 수 있다는 의지와 자유를 동시에 느낀다. 연주자와 음표들이 제 실력과 가치를 보여줄 수 있는 공간이라는 뜻이다. 듣는 일 말고 다른 건 할 수 없는 차단. 나와 음악이 마침내 서로를 오래 볼 수 있다. 

앵콜은 비발디의 사계 중 여름 3악장. 몇 번의 커튼콜 후 한수진 씨가 지휘자 아드리엘 김에게 입모양으로 "할까요?" 물었다. 전무후무한 히트곡. 사계 중에서도 특히 사랑받는 악장. 시작할 때는 곳곳에서 작은 탄성이 들렸고 끝났을 땐 박수 소리가 길었다. 길지 않은 공연이었는데 여운도 길었다.


예매는 약 한 달 전이었다. 이 공연을 기다리는 동안 어딘가 꽉 막힌 것 같은 느낌이 들 때마다 이날 저녁을 상상했다. 종일 일하고 서둘러 공연장에 가서 저녁을 먹어야지. 조금 노곤한 채 로비에 들어가 그 공기를 만끽해야지. 연주가 시작되면 나는 다른 세계로 갈 수 있을 거야. 조금은 졸기도 하겠지만 어떤 곡에서는 완벽한 몰입과 집중을 만날 수도 있을 것이다. 좋은 연주회에는 이런 기대가, 도무지 대안을 떠올릴 수 없는 감각이 있다. 


p.s. 한수진과 서울 이무지치 챔버 오케스트라의 비발디 사계 중 '여름', 3악장은 8분 21초부터.

https://www.youtube.com/watch?v=OzwJX1Ehkg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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