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의 이야기는 반짝일 거야』
“엄마는 꿈이 뭐야?”
거실 바닥에 배를 깔고 그림을 그리던 딸이 던진 질문이다.
하던 일을 멈췄다. ‘꿈이라고?’
어린 시절 이후 처음 들어본 질문이었다. 당시 나는 적성에 맞지 않은 ‘엄마’라는 직업을 탈출하고 싶었다. 탈출할 길은 당연히 없었다. 엄마의 손길 없이 아이가 독립적으로 살아가려면 얼마나 걸릴까. 8년? 15년? 23년? 선택지가 없는 장기복역수 같은 심정이었다. 귀여운 아이를 두고 감옥에 갇힌 기분이 든다니! 스스로도 용납이 되지 않는 말이었다. 입 밖으로 꺼낼 수 없지만 가슴 가득 채운, 그 음울한 정서는 나를 따라다녔다.
아이는 기대하는 표정으로 대답을 기다렸다. 꿈이라고? 40대에도 꿈을 꿀 수 있을까. “엄마는 책을 좋아하니까 책방을 하면 좋겠어. 책방지기가 꿈이야.” 마저 하던 집안일을 마무리하기 위해 진심과 무심함을 반반 섞어 답했다.
초등학교 때 명절마다 끈질기게 꿈을 묻는 친척이 있었다. 가난한 집안에서 유일하게 자수성가한 분이었다. 그분의 특기는 사람들을 괴롭히는 말주변. 설교를 하기 위해 성공한 건가 싶을 정도였다. 명절 점심을 먹은 뒤 한 시간이고 두 시간이고, 어른이고 아이고 가리지 않고 둥그렇게 앉힌 채 설교를 늘어놓았다. 들을수록 기분 나빠지는 잔소리 섞인 연설 앞에서 도망치지 못하는 것도 괴로웠고, 아무도 나처럼 괴로워하지 않는 걸 보는 것도 힘들었다.
마지막에는 어린이들에게 차례로 꿈을 물어보았다. 어른이 된 지금처럼 그때는 진심을 담지 않는 말을 못 했다. 매년 달라지는 내 꿈을 들을 때마다 친척 어른은 매섭게 꾸짖었다. 너는 왜 맨날 꿈이 바뀌냐고. 꿈과 야단맞기가 한 쌍이 되어 뺨을 맞는 억울한 기분으로 명절을 맞아야 했다.
중학교 어느 시간이었을까. 선생님이 아이들에게 꿈을 물어보았다. 모든 아이들이 차례대로 대답을 했다. 그때도 진심이 아닌 말을 골라내어 말하는 법을 몰랐다. “유치원 교사요.” 반 전체에 고소한 웃음소리가 퍼져나갔다. 어안이 벙벙했다. 내 꿈이 왜 유머일까. 태권도 도장을 다니는 숏컷의 선머슴아가 솜사탕같이 부드러운 유치원 교사가 된다는 설정이 ㄴㅎㄴ센스였을까. 내 꿈은 초라한 추억만 쌓여갔다.
대학 졸업을 앞둔 2월 초의 어느 날. 드디어 선택의 시간이 왔다. 내 꿈을 정해서 직업을 가져야 하는 시기가. 3년 전에 졸업한 오빠는 피터팬이 되어 대학원으로 도망갔다. 아빠의 사업이 무너져 원룸에서 오빠와 같이 살던 때였다. 아침 일찍 늦지 않으려고 동동거릴 때 오빠는 늦잠을 자고 있었다. 긴장과 피로감을 등에 업고 퇴근해서 오면 오빠는 게임을 하고 있었다. 후크 선장이 왜 갈고리로 피터팬을 때리고 싶은지 알 것 같았다.
그때의 내 꿈은 ‘책방 주인’이었다. 사람이 코너에 몰리니까 하고 싶은 일이 이미지로 떠오르더라. 한가하고 무심하게 살면 행복할 것 같았다. 그러나 나는 후크 선장처럼 현실을 아는 욕망주의자였다. 2000년대 초반 서점 사업은 내리막이었고 이제 막 졸업한 나는 사업자금이 없었다. 별 수 없이 책방 주인과 비스무레한 출판사 편집자로 방향을 돌렸다.
돌고 돌아 마흔 살이 되어 책방 주인이 되었다. 꿈은 이루어진다. 출근을 하려고 서둘러 머리를 감았다. 어깨 위로 물이 뚝뚝 떨어진다. 닦을 새가 없다. 화장을 하고 아이의 등굣길 수발을 들고 내가 먹을 아침을 챙겨야 한다. 머릿속으로 할 일을 계산하느라 정신없는데 딸이 묻는다.
“엄마, 엄마는 꿈을 이뤘어?”
“응. 엄마는 이뤘어.”
“엄마는 좋겠다.”
“응. 좋아.”
이 대화는 우리 사이에 종종 벌어진다. 질문도 똑같고 대답도 같다. 아이는 엄마처럼 편하게 할 수 있는 책방지기를 하고 싶단다. 책방을 운영하면 돈을 많이 못 번다고 아이의 수준에서 이해할 수 있는 언어로 설명해줘도 막무가내다. 대신 책이 다 내 것이니까 괜찮단다. 자기는 세상에서 책이 제일 좋단다. 어떻게 보면 9살 딸의 생각과 비슷한 심정으로 나도 책방을 하려고 했던 것 같다.아이의 질문은 내 속에 들어와 꼬리에 꼬리를 물고 번져나가고 있다. 아이가 더 컸더라면 솔직한 뒷말을 보탰을 것이다. 꿈을 이루면 자동적으로 행복해질 줄 알았는데. 꿈을 몇 번이나 이뤘는데도 공허감은 왜 사라지지 않을까.
꿈을 생각하면 어느새 퀘퀘한 냄새가 나는 늘어진 티셔츠가 떠오르는 나에게 위로가 되는 그림책을 만났다. <우리의 이야기는 반짝일 거야>. 꼭 한 번 가고 싶었던 동네, 리스본에서 살고 있는 작가 마달레나 모니스. 주인공은 파란 옷의 주앙과 붉은 옷의 팀. 주앙은 조심성이 많고 팀은 겁이 없다. 앞서거니 뒤서거니 하며 둘이 떠나는 모험 이야기다. 반전은 맨 마지막 페이지에 나온다.
수채화풍의 패턴 같은 귀여운 그림체가 주는 위로가 크다. 무엇보다 주앙과 팀이 서로에게 주는 믿음이 제일 크게 다가왔다. 누구나 내면의 갈등을 하며 살아간다. 무서울 땐 겁쟁이라고 윽박지르고, 게으를 땐 게으름뱅이라고 경멸하고, 욕망을 부릴 땐 욕심쟁이라고 놀려댄다. 무서울 땐 ‘괜찮아, 나아질거야.’라고. 게으를 땐 ‘힘든 일 있어?’라고. 욕망이 들끓을 땐 “한번 해봐.”라고 말해주지 못했다. 주앙과 팀은 서로를 절대 비난하지 않는다. 다만 감탄하고, 기다려주고, 손을 잡아준다.
꿈의 허망함을 알아버렸는데 이제 어찌해야 하나.
주앙과 팀은 말한다. “이야기는 끝없이 이어집니다.” 멈추지 말라고 속삭여주는 것 같다.
이제 거창한 꿈을 꾸지 않는다. 꿈이 있어도 좋고 없어도 괜찮을 것 같다. 대신 어떤 방향성을 둘지에 대해서는 나에게 자주 묻는다. 이쪽 길이 맞아? 다른 사람한테 칭찬받고 싶어서 가는 건 아니지? 빛나 보여서 끌리는 건가? 마음이 편안해? 마음은 간사하기 때문에 그때그때 질문을 잘 던져야 한다. 마음은 주장한다. 이게 내가 바로 원하는 일이다. 내 꿈은 바로 이거였어. 이 꿈을 이루면 더 행복해질거야. 귀를 간질거린다. 속아 넘어가지 않으려면 스스로에게 집중해야 한다. 폭신폭신한 꿈의 촉감을 기대하며 기운을 쥐어짜고 전투태세로 돌입하지 않으려고 일단 멈춤 버튼을 누른다.
그리고 다시 다독인다. 지금 여기에서 행복할 수 없으면 멀리서도 똑같아. 오늘의 날씨, 점심 반찬의 맛, 아이의 짜증, 할 일 리스트 속에서 만족하는 법을 배워야 한다고. 아무리 노력해도 크게 나아지기는커녕 순식간에 뒤로 쳐지는 날도 온다. 좌절 금지. 운동선수처럼 매일 스스로를 단련해야 한다고. 요가와 명상으로 얻은 마음의 여유를 여비 삼는다. 그래야 모험을 떠나고 싶은 나와 안전하게 머물고 싶은 내가 사이좋게 지낼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