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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서민경 Oct 28. 2020

책방의 고수가 건네준 ‘노’

『노를 든 신부』, 『싸울 때마다 투명해진다』

가끔 책방 손님 중에서 고수를 만난다. 책방지기들보다 읽어온 책의 폭이 넓고 새 책을 살펴보는 속도가 빠르다. 고수들의 특징은 자신을 선명하게 드러내지 않는다는 것. 책방에 슥 들어와 말없이 책장의 책들을 꼼꼼하게 다 훑는다. 손님이 오면 1단계 질문을 한다. “찾는 책이 있으세요?” 그림책을 막 알게 되거나 추천받고 싶은 손님들은 책방지기의 질문에 바로 반응을 한다. 고수들은 말끝을 흐리며 책에 집중한다. 먹이를 노리는 사냥꾼처럼. 고수들에게는 고요한 시간과 공간을 드린다. 나도 말없이 계산대 안쪽의 컴퓨터 자리로 가서 편안히 일을 본다.

노른자에서 인연을 맺은 그림책 고수들 중 한 분이 있다. 어른을 위한 그림책과 심리에 관심이 많은 고수다. 이분이 노른자 블로그에 그림책 소개 글을 올려준 적이 있는데, 『노를 든 신부』는 그렇게 만난 책이었다.     


 『노를 든 신부』는 정직한 제목을 가진 그림책이다. ‘노’를 든 ‘신부’가 주인공이고, 신부가 노를 갖고 모험을 떠나는 이야기이다. 부케가 아니라 ‘노’이다. 맞다. 나룻배를 탈 때 배의 방향키를 잡아주는 나무로 만든 노. 순백색의 웨딩드레스와 갈색의 노의 조합이라니. 보통의 웨딩드레스처럼 하얗고 치렁치렁하지만 다른 점이 있다면 어깨에 근육이 붙은 것처럼 봉긋 솟아 있다. 그 어깨뽕이 신부를 전사처럼 보이게도 한다.     

어느 날, 부모는 소녀에게 말한다. “네가 자랑스럽다.” 드레스와 노 하나를 건네며 “이제 소녀가 아니라 신부구나”라고 말한다. 심심하게 지내던 소녀는 드레스로 갈아입고 노를 든 채 씩씩하게 바닷가로 나간다.

신부는 노가 하나뿐이 없다며 사람들에게 거부당하기도 하고, 신부를 여럿 거느린 사람을 거부하기도 하며 여행을 계속 한다. 지쳤을 무렵 우연히 늪에 빠진 사냥꾼을 구해준다. 사냥꾼을 살리기 위해 밧줄을 찾는 신부에게 사냥꾼은 말한다. “당신에겐 기다란 노가 있잖소!”

길 위에서 지혜를 얻은 신부는 이제 노를 갖고 즐거운 시간을 보낸다. 과일도 따고, 요리도 하고, 곰과 격투도 벌인다. 마을로 내려가 노를 배트 삼아 사람들과 야구를 하게 된다. 드디어 자기의 재능을 발견한 것이다. 야구팀 감독들이 앞다투어 데려가고 싶을 정도로 신부는 강타자였다. 하얀 눈이 보고 싶다며 신부는 추운 나라로 떠나는 것으로 이야기는 끝난다.      


책을 덮자 무의식 아래 잠자던 기억 하나로 낚싯대에 걸린 것처럼 끌어 올라왔다. 대학 졸업식이 있던 2월 중순의 어느 날, 취업을 못해서 전전긍긍했던 대학생의 나. 서른을 앞두고 웬지 결혼을 꼭 해야 할 것 같은 마음에 남자친구에게 프로포즈를 먼저 한 20대의 나. 결혼하고 아이가 없어 시가에 죄를 진 것 같은 마음이 들고, 그 마음 때문에 힘들어했던 30대의 나. 아이를 잘 키우는 것이 엄마의 성취라고 여겨지는 40대의 나.

생애 주기별로 소소하고 끈덕진 압박을 받아 온 것 같다. 한국사회 특유의 가부장적인 시선도 있었고, 내가 부여한, 남들과 다르고 싶지 않다는 소박함으로 가장한 소시민적 강박도 있었다. 누구나 ‘노’ 하나쯤은 갖고 태어난다. 어떤 이는 노가 2개일 수도 있고, 부러진 노를 받을 수도 있다. 그 다음은 세상으로 나아가는 나의 의지로 달라질 있을 텐데. 나는 주어진 노로 만족하며 살았던가. 20대 초반까지는 형편없는 노를 받았다고 원망하고 화내는 데 시간을 쓸려보냈다. 어느 정도 받아들였을 때는 나의 노로 할 수 있는 폭이 좁다고 한탄했던 것 같다. 40대가 넘어서야 겨우 나의 노를 감사히 받아들일 수 있었다. 내가 가진 노는 작지만 빠르다는 장점도 발견했다. 아주 멀리는 가지 못해도 가까운 거리라면 얼마든지 갈 수 있다. 노를 저을 수 있는 체력이 부족한 거지, 노 자체에는 잘못이 없었다.

야구선수가 된 신부를 보면서 나의 노를 다시 바라본다. 그래, 이 노로 꼭 배를 저으란 법은 없지. 나무를 깎아서 노를 하나 더 만들 수도 있고, 노를 모아서 집을 만들 수도 있을 거야.       


두번째 책으로 글쓰기 에세이 『글쓰기 최전선』을 내고 유명해진 은유 작가. 그 다음에 출간된 것이  『싸울 때마다 투명해진다』. 이 책의 프로필에는 작가의 전공이나 졸업한 학교 정보가 없다. 책 속에 이런 에피소드가 나온다. 집필 노동자로 일하는 자신에게 무수히 많은 사람들이 학번을 물어본다고. 학번을 물어보는 이 질문이 얼마나 무례하고 폭력적일 수 있는지를 이야기한다. 상대가 대학을 졸업하지 않을 수 있다는 가능성을 생각해보지 않은 질문. 작가는 대학을 가지 않았다.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증권회사 직원으로 일하다 글을 쓰게 된 저자의 이력에서 충격에 가까운 감동을 받았다. 보수적이고 권위적인 한국의 출판계에서 은유 작가가 '글' 하나만으로 성취해내기까지의 과정을 상상하면 말이다.

졸업장으로 나의 능력을 증명하는 길과 내가 쓴 글 자체로 승부하는 길. 무엇이 더 어려울까. 나의 노를 받아들이고 그 노 하나로 꿋꿋이 자기 일을 해나가는 은유 작가는 그때부터 나의 롤모델이 되었다.     

그림책은 신비롭다. 분명 같은 책인데도 불현듯 다른 무게, 다른 질감으로 다가올 때가 있다. 그림책의 세계는 작고 깊다. 20장이 채 되지 않은 세상에서 수많은 이야기를 담는다. 글과 그림이 각각, 또는 함께 힘을 합해서 독자들만이 캐낼 수 있는 보물을 여기 저기 숨겨 놓는다. 지루할 새가 없다. 어른 책처럼 책상에 앉혀 공부시키는 방식이 아니라 ‘너의 상상력으로 찾아봐’ 말을 걸듯이 술래잡기놀이처럼. 그래서 자꾸 반복해서 읽게 된다.      


화장대의 선반에 그때그때 마음에 드는 책을 표지가 보이게 올려놓는다. 『노를 든 신부』는 이번 여름 한 달 내내 선반에서 내려오지 않았다. 엄마의 책을 호시탐탐 노리는 딸이 이 책의 표지를 자주 보더니 잠자리에서 읽어달라고 했다. 아이를 재우고 나니 이 책의 첫 장면이 다시 보였다. 보라색벽지에 그림 하나가 걸려 있다. 나무 하나가 망망대해 같은 들판 가운데 덩그라니 서 있고, 그림 앞 의자에 앉은 소녀는 식물처럼 외롭고 슬퍼 보인다. 소녀의 한 손에는 읽다만 작은 책이 걸려 있다. 아파 보인다. 얕은 병이 아닌 것 같다. 몸이 아니라 마음이 아픈 사람.

다시 뒤쪽으로 책장을 빠르게 넘긴다. 양면 펼침으로 신부가 노(배트)로 야구공을 타-악 쳐서 홈런을 치는 장면. 속이 시원하게 뚫린다. 


바로 마지막 장으로 간다. 제일 좋아하는 장면이다. “왜냐하면, 하얀 눈을 보고 싶으니까요!”라는 신부의 대사. 이 장면이 좋아서 대사를 따라하며 나의 그림책 읽기를 마무리한다. 왜냐하면, 신부는 자기가 뭘 좋아하는지, 자기가 어떤 사람인지 알았으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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