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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서민경 Oct 29. 2020

책방 여행자

『작은 책방, 우리 책 쫌 팝니다』

나는 책방 여행자였다. 동네책방이 막 생길 즈음부터 레이다망을 가동해 틈나는 대로 돌아다녔다. 사라져가는 스러져가는 서점들이 작은 책방으로 되살아나는 소식은 여행지에 만난 맑은 날씨 같은 선물이었다. 여행을 가서 근처에 있는 책방을 들르는 게 아니라, 책방을 먼저 고르고 근처를 관광하는 식이었다. 괴산, 강화도, 속초, 부여, 김포, 일산……. 책방 덕분에 나의 여행지의 경계는 넓어졌다. 책방이 없었다면 그 지역에 갈 일이 없었을 것이다.


첫 책방 나들이는 괴산의 숲속작은책방. 2015년에 괴산의 전원주택에서 거실을 책방으로 만들어 운영하는 부부의 책이 출간되었다. 『작은 책방, 우리 책 쫌 팝니다』를 출간 직후 바로 읽었다. 이렇게 작은 규모로도 서점을 할 수 있다니. 집에서도 책방을 열 수 있다니. 게다가 책도 잘 팔리다니. 이름에 ‘숲’과 ‘작은’이 들어가다니. 가슴속에서 북이 둥둥둥둥 울렸다.


겨울의 끄트머리에 괴산에 갔다. 공기가 맑았다. 서울에서 오래 살고 있는 탓인지, 공기가 맑으며 달기까지 하다. 전원주택이 모여 있는 마을의 초입에 차를 주차하고 책방을 찾아 오르막길을 걸었다. 박공지붕, 유럽풍 발코니, 소담한 정원…. 아파트처럼 동일한 설계가 아니라 땅의 크기는 비슷하되 집 모양은 다 달랐다. 집 구경하며 올라가느라 힘든 줄 몰랐다.

지도 없이 책방을 찾을 수 있을까 궁금할 즈음 나무로 만든 ‘숲속작은책방’ 팻말을 발견했다. 울타리도 나무, 문도 나무, 책장도 나무, 소파도 나무……. 책 다음으로 좋아하는 게 나무인데 마치 나를 위해 준비한 책방 같았다. 거실은 꽤 넓고 층고가 높아서 시원했다. 현관으로 들어가 오른쪽으로 꺾으면 거실의 한 벽이 바닥부터 천장까지 책장이다. 독서탐험가를 위한 준비된 미니 사다리까지 있다. 거실을 둘러싼 벽에 촘촘하게 긴 책장, 중간 책장, 작은 책장이 자리 잡아서 자연스레 주제별 큐레이션되어 있었다. 정사각형 통창 옆에 놓인 나무로 만든 흔들의자와 퀼트풍 쿠션. 정원의 오두막 안에는 그림책과 해먹. 책과 정원을 좋아하는 사람이라면 상상했을 법한 꿈의 공간.

함께 놀러간 친정엄마는 흔들의자에 앉아 가드닝 책을 읽고, 5살 딸은 밖으로 나가 아빠랑 오두막으로 돌진해서 해먹에 누웠다. 코끝이 시린 날씨와 상관없이 온 가족이 책방에서 한가로운 시간을 보냈다. 나는 이 작고 큰 책방의 구석구석을 탐험했다.

5년 전 일인데도 이날의 처음과 끝이 다 생생하게 기억한다. 이때 나는 구체적으로 책방을 열 결심을 하지는 않았다. 책방이라는 공간에 폭 빠져서 정신을 차리지 못했을 뿐.      



잊고 있었던 꿈이 꿈틀거렸다. 고등학생 때 나는 책방 주인이 되는 것이 꿈이었다. 어릴 적 살던 곳에는 가까이에 도서관이 없었다. 대신 집에서 걸어서 5분, 뛰어서 3분이면 닿을 수 있는 작은 서점이 있었다. 서점 이름은 ‘글사랑방’. 3층짜리 건물의 1층에 자리 잡은 나의 첫 서점. 

덩치가 크고 얼굴이 하얗고 똥그랗던 40대의 서점 사장님의 얼굴을 자세히 기억한다. 밤마다 술에 취해 새벽에 들어오던 우리 아빠 얼굴보다 더 자주 봤다고 할 수 있으니. 아빠가 집에 들어오면 집안은 시끄러워졌다. 견딜 수 없는 기분을 누르고 서점으로 피신한다. 요즘의 책방처럼 손님을 위한 테이블이나 의자 따위는 없다. 책장과 참고서가 빽빽한 매대와 먼지뿐. 

처음에는 서서 읽는다. 양심상. 삼십 분도 안 되어 다리가 슬슬 아파온다. 눈치를 살살 보면서 쭈그려 앉는다. 카운터에 있는 사장님을 흘낏 살펴보면 대부분 말없이 신문을 보시거나 꾸벅꾸벅 졸고 있다. 무심한 사장님의 자세가 고마웠다. 울고 싶을 때 무슨 일이냐고 물어보지 않고 적당히 무관심한 채로 옆에 있는 주는 거리. 카운터와 가장 멀리 떨어져 있는 구석의 책장 쪽으로 간다. 작은 책장으로 내 몸을 가리고 한 시간이고 두 시간이고 읽었다.


다행히 나는 이 조용한 서점의 어린 단골이었다. 책을 사는 것을 공부와 같은 값으로 쳐준 엄마 덕분이었다. 무뚝뚝한 서점 사장님이 가끔 100원이라도 깎아줄라치면 나는 눈을 크게 뜨고 물었다. “책값도 깎아주나요?” 사장님은 말없이 책을 비닐에 담아주었다. 단골 인증을 받은 것 같이 얼마나 뿌듯했는지 모른다. 호시절이었다. 그때는 순도 높은 도서정가제가 살아 있던 시절이었다. 책 뒤표지에 적힌 금액 그대로 판매되었다. 무료배송이 되는 온라인서점이 태어나기 전이라 공룡 같은 경쟁 서점도 없었다.     


당시 혼자 쓰기에 큰 작업실을 갖고 있어서 친구들과 한쪽에 동네도서관을 만들려고 하던 중이었다. 이 책방지기 부부도 책방을 열기 전에 일산에서 오랫동안 작은 도서관을 운영하셨다고 했다. 책 좋아하는 사람들의 행로는 닮아 있구나. 두 분은 책방을 열고 싶은 바람을 비친 나에게, 분명 힘든 일이지만 책 좋아하는 사람들에게는 괜찮다고 말해주셨다. ‘힘들다’는 앞말은 바람결에 흘리고, ‘괜찮다’는 뒷말만 가슴에 남겼다.


그해 초 책방여행자였던 나는 연말에 친구 둘과 함께 책방 노른자를 오픈했다. 책이 안 팔릴 거라는 주변의 손사래라는 허들은 가뿐히 뛰어넘었다. 책 안 팔린다는 얘기는 출판사 신입사원이었던 15년 전에도 유통되었던 말이니까. 그보다 내가 만났던 책방지기들의 말간 얼굴을 기억했다. 좋아하는 일을 하세요. 힘들지 않다고는 말 못 해요. 그래도 괜찮을 거예요. 때로는 말보다 표정이 전해주는 힘이 더 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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