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시대의 멜랑콜리
이루고 싶은 모든 일이 쉽게 이루어지지 않았다. 세상에 쉬운 일이 하나 없었다. 작은 것 하나도 내 마음대로 되는 것이 없었고, 마음먹고 시작된 다양한 결심들은 대부분 파도 앞에 순식간에 사라지는 모래성이었다. 꿈을 향해 끊임없이 달려가지만, 언제나 달려가는 만큼 멀리 가있었다. 회사 내에서의 승진이나, 인생의 성공은 접어두고 서라도, 꼭 한번 부모님께 사드리고 싶은 좋은 구두나, 좋은 옷. 한 번쯤 꼭 도전해보고 싶은 스카이 다이빙. 그동안 미루어 두었던 가족끼리의 화려한 식사나 여행. 너무 가지고 싶은 차. 꿈의 바구니에 담아 만 둔 이룰 수 없는 꿈들이 조금씩 채워지고 있었다.
많은 것을 희망하고 바라고 있지만, 잘 이루어지지 않았다. 하나같이 쉽지 않았다.
그동안 미루고 미루어 두었던 친구들과의 여행이 드디어 결정되었다. 어릴 적엔 툭하면 소풍과 운동회, 그리고 수학여행까지 같이 할 시간이 많아서 이야기할 추억거리가 차곡차곡 쌓였었는데, 나이가 들면서 그놈의 여행을 한번 가기가 참 어려웠다. 그렇게 겨우 잡은 여행은 나를 포함한 친구들 모두를 설레게 만들었다. 반은 취업을 하고, 반은 취업을 못한 상황. 우리의 여행경비가 그렇게 넉넉하지 못한 반면, 하고 싶은 것은 많았다. 무엇보다도 이번의 우리의 목적은 바로 ‘회’ 그것도 바다가 광활하게 펼쳐진 부산에서 바다를 바라보며 지나간 시간을 회상하는 것이 목표였다. 하지만 이번에도 쉬운 것은 없었다. 회는 생각보다 ‘시가’를 따져야 하는 만큼 비쌌고, 바다가 광활하게 보이는 장소도 비쌌다. 또 가는 거리는 왜 그렇게 멀고 기차표 값은 또 왜 그렇게 비싼지. 결국 렌트를 해서, 교대해가며 운전을 해서 부산으로 가기로 마음먹었다. 참기로 했다. 부산만 가면 그동안의 모든 스트레스가 사라지고, 그토록 원하던 회를 배부르게 먹으리라! 이거 하나만 가슴속에 새기며 1박 2일의 긴 여정을 시작했다.
서울에서 부산은 체감적으로 멀어도 너무 멀었다. 친구들 중 한 둘은 이미 차멀미를 시작했고, 회를 먹는다는 생각보다, 가는 길이 너무 멀어서 지치기 시작했다. 한 명은 '이럴 거면 그냥 노량진 수산시장을 가는 편이 나았을 거 같다’는 의견 표명을 했고 그로 인해 짜증이 나기 시작했다. 괜한 짓을 벌여서 몸도 마음도 게다가 돈도 버리게 생겼다는 생각이 들었다. 슬슬 배도 고파왔다. 맛있는 회를 먹기 위해 경비 절감을 실행했고, 그래서 휴게소에 들러 간식을 양껏 사 먹는 것도 부담스러웠다. 아끼고 아껴 딱 맞춰온 경비 덕분에 그럴 여유가 거의 없었다. 하지만, 핫바 딱 하나만 먹자는 친구의 말에 정말 딱 하나만 산 핫바에서 모든 것이 시작되었다.
2500원을 주고 사온 핫바는 먹음직스러웠다. 모락모락 피어오르는 모습에 일동 침을 꿀떡 삼켰다. 하필 점심시간이 지나고 있는 찰나에 모두가 허기져 있었다. 애초에 의도는 한입씩 맛있게 먹자이었지만, 한입씩으로는 도저희 맛있다고 느낄 수가 없는 상황이었다. 결국 모든 것을 핫바를 건 가위바위보로 결정하기로 했다. 가위바위보를 해서 이기는 사람부터 먹기로 한 피 튀는 현장감. 서로의 눈치를 살피며 무엇을 낼지 수싸움이 시작됐다. 한 친구의 눈빛에서는 주먹이 보이고, 한 친구의 눈빛에서는 보자기가 보였다. 나는 이쪽 친구로 편승할 것이냐, 아니면 저쪽 친구로 편승할 것이냐를 두고 순간 고민하다가, 남자는 주먹 이지란 생각과 함께 주먹을 내지만, 결국 보자기를 낸 친구의 승리. 숨 막히는 한판이 진행되고 승자는 느긋하고 세상을 다 가진 눈빛으로 핫바를 한입 베어 물었다. 입이 큰 그 친구는 뒷사람을 생각하지 않고, 목젖이 닿도록 핫바를 입으로 밀어 넣고, 무려 반을 먹어버렸다. 친구들의 야유가 쏟아졌고, 인간의 본질적 양심과, 친구로서의 의리, 성격, 기질, 모든 걸 탓하고 비난했지만 승자의 눈빛은 여유로웠고, 그다음으로 이긴 친구에게 나머지 핫바가 넘어갔다. 3번째 4번째 그리고 다섯 번째인 나는 숨죽여 핫바를 쳐다보았고, 그 핫바는 2번째 친구의 입속에서 그 의무와 책임을 다한 채, 상스러운 나무 작대기만을 남기며 우리를 비웃고 있었다. ‘아이씨’를 연발했지만 달라질 건 없었고, 우리는 차에 오르며, 신경질 적인 말을 내뱉었다.
"야 빨리타! 다음 휴게소로 가자"
다음 휴게소에서 산 두 번째 간식은 맥반석 오징어. 맥반석 오징어는 일단 기본적으로 말랑말랑하고 막 구어 내온 따뜻함이 그대로 유지된다. 종이봉투에 오징어와 함께 넣어주는 작은 태양초 고추장은 감칠맛을 더하고, 몸통은 몸통대로 부드럽고 다리는 다리대로 쫄깃하다. 이번의 룰은 간단하다. 동전 던지기 게임을 통해, 원하는 만큼 찢어가는 것이었다. 기준선을 정해놓고, 백 원짜리를 던져서, 그 기준선에 가장 가까운 사람부터 일등을 정하는 방식이었다. 우리는 모두 백 원짜리 동전을 던지는 것에 온 신경을 집중했다. 손가락으로 어떻게 동전을 쥘 것인가. 던질 것인가, 굴릴 것인가. 힘의 세기를 어느 정도로 줄 것인가. 모든 것이 예측 불허였고, 그저 믿을 수 있는 건 하나님과 내 손가락과 손목 스냅뿐이었다. 내기는 시작되었다. 그런데 아까 이긴 놈이 또 일등을 했다. 우리는 양심을 거론했지만, 그 자식이 몸통의 2분에 1을 찢어 한 번에 태양초 고추장을 반 정도를 찍어서 입 속에 넣어버렸다. 우리는 무기력 해짐과 동시에, 침묵의 인디언 밥을 시작했다. 아무리 게임이라지만, 너무 괘씸했다. 등짝이 시뻘개 지도록 얻어맞은 1등 한 친구는 아픈데도 실실 웃었다. 결국 나머지 친구들은 등수를 따지지 않고 조금씩 나눠먹는 의리를 택했다.
과자 한 봉지를 이기는 사람이 한 주먹씩, 뜨거운 호두과자를 두 손가락으로만 먹기 등등. 우리는 지나는 휴게소에 대부분 다 멈춰서 한 개의 간식을 사놓고 치열한 공방전을 벌였다. 치열했던 만큼 배꼽 빠지는 상황이 연출되었고, 머리속에 '회'는 사라지고 당장 다음 휴게소에서 무엇으로 무엇을 먹을것인가를 고민했다. 물론 부산을 도착해 기다리고 기다리던 회를 먹었다. 꿀맛이었다. 하지만, 여행이 끝나고 난 후 우리 머릿속에 남아 있는 것은 회가 아니라, 간식들이었다. 언제나 먹을 수 있는 것들이었고, 비싸지 않았고 뛰어난 풍경도 제공하지 않았지만, 그렇게 비교적 쉽게 우리 손에 질 수 있었던 그 음식들이 우리를 더 즐겁게 했다. 그저 회만 바라보고 부산으로 갔다면, 그 멀고 먼 길이 고역이었을 것이다.
우리의 긴 여정에 조금 만만한 꿈들이 필요하다. 세상에는 쉬운 일도 있다.
세세한 계획과 어떤 희생과 노력으로 인해 이루어지는 것들 말고 말이다. 조금 편하고 쉬운 만만한 꿈들이 우리 주변에 많고 그것을 이루다 보면 세상이 조금 더 즐거워진다. 어느 순간 작은 여행에서부터 인생의 여정까지 우리는 너무 큰 꿈만 바라보며 살아가고 있다. 이루지 않으면 세상의 루져가 되는 것처럼 여긴다. 지금의 많은 시간을 그것을 위한 희생으로, 또 꼭 필요한 의미로 해석하면서 흘려보낸다. 하지만 지금 당장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쉽고 만만한 꿈이다. 그래야 살아갈만한 세상이 된다. 어렵고 힘든 과정을 거쳐 이룬 것만이 가치가 있는 것은 아니다. 세상에는 쉬운 일도 많고, 쉬운 일이 오히려 더 많은 즐거움을 준다.
세상은 생각보다 쉬울 수 있다.
글_사진 이인석 (Myste.le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