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니어 마케터의 고민
요즘 일을 하면서 자주 하는 생각이 있다. 나는 주니어도 시니어도 아닌, 그 사이의 애매한 경계에 있다는 것. 흔히들 주니어에서 시니어로 넘어가는 그 과정에 있는 단계를 중니어라고 말한다.
보통 5년~10년 차 사이의 경력을 중니어로 분류하는데 올해로 6년 차 마케터인 나는 딱 이 경계에 속한다.
애매한 포지션과 혼란스러운 정체성에서 오는 답답함과 고민이 있다. 예를 들면 이런 상황이다.
누가 시키지 않아도 내 할 일을 찾아서 한다. 누가 피드백을 주기 전에 먼저 셀프 검열하면서 결과물의 퀄리티를 높이려고 노력한다.
하지만 중장기적인 마케팅 목표를 수립하고 이를 달성하기 위한 전략을 짜는 데는 아직 막막함을 느낀다. 일을 하다 보면 여러 가지 변수들이 생기며 수립했던 목표와 방향성을 점검해야 할 순간이 찾아오기 마련인데, 그때마다 어떻게 나아가야 할지 막막하게 느껴진다. 누가 대신 목표와 전략을 세워주면 그걸 실행하는 건 잘할 자신이 있는데 말이다.
수요와 공급 곡선이 만나는 곳에서 시장 가격이 형성되는 것처럼 목표라는 건 우리가 그리는 이상적인 모습과 어느 정도의 현실가능성이 만나는 지점에서 결정된다. 목표가 what이라면, 전략을 그걸 달성하기 위한 How에 가깝다.
당장 내일 무슨 일이 일어날지도 모르는데 몇 달 뒤, 일 년 뒤 미래의 일을 어떻게 안다는 것인가. '목표를 세웠다가 시장의 니즈와 너무 괴리가 심하면 어떡하지?' 목표를 세운다는 건 곧 그 결과물에 대한 책임을 진다는 것과 같은 말이기에 마음이 결코 가볍지 않은 것이다.
어찌 생각해 보면 당연한 것이기도 하다. 자신감과 확신은 축적된 경험에서 오는 것이고, 그러기에 아직 나는 더 많이 경험을 쌓아야 하니까.
시간이 흐르면 자연스럽게 시니어가 되는 건가?
아니면 시니어가 되기 위한 경험이 필요한 걸까?
그래도 일에 대한 욕심이 있고, 인정받고 싶은 욕구가 있는 편이라 멋진 시니어로 성장하고 싶은 마음이 크다. 미래의 모습이 정해졌으니 그에 맞춰 내 모습을 바꿔야 하는 거겠지.
2024년 현재의 나는 어떤 태도를 가지고, 어떤 경험을 적극적으로 쌓아야 하는 걸까?
링크드인에서 어떤 팀장이 쓴 글을 봤는데 S급 팀원과 A급 팀원을 가르는 분수령은 주어진 업무로도 버거운 상황에도 불구하고 회사에서 미처 생각하지 못한 시각에서 아이디어를 제안할 수 있는 능력이라고 했다. 그런 시도와 성공, 실패 경험이 자산처럼 쌓여 시니어가 되어가나 보다.
"손님이 부탁하면 심부름, 내가 먼저 하면 서비스"
오래전 어떤 갈빗집에 갔을 때 벽에 엄청 큼지막하게 붙여져 있던 문구였다. 고기가 타고 있어서 불판을 갈아달라고 직원에게 요청하면 이건 심부름이고, 직원이 미리 캐치하고 고기가 타기 전에 불판을 갈아주면 서비스인 것이다.
"결국 똑같은 일을 하더라도 주체가 누구이냐에 따라 일에 대한 평가가 달라지는구나" 너무 인상적이었다.
누구를 닮았는지 모르겠지만 반골 기질, 청개구리 심보를 가지고 있는데, 내 의지가 아닌 타인의 의지로 어떤 일을 할 때 본능적으로 저항감이 올라오는 피곤한 성격을 가지고 있다.
그래서 나는 다른 누가 나에게 부탁을 하거나 요청을 하기 전에 내가 먼저 선수 치는 것을 좋아한다. 그러면 나는 한 두수 앞서서 미리 생각하고 행동하는 일 잘하는 사람처럼 비치는 것이 아닌가.
애매한 경계에 있는 일이 나한테 폭탄처럼 떨어진다던가, 한꺼번에 너무 많은 양의 일이 주어져서 힘들 때 주문처럼 되새기는 말이 있다.
회사가 아닌, 나를 위해 일하자
이 모든 것은 결국 팀장을 위해, 회사를 위해 일하는 것이 아니라 나를 위해 일하는 것이다. 내가 하는 모든 경험이 결국엔 피가 되고 살이 될 테니까.
20대 때는 30대가 되면 사회적으로 많은 걸 이루고, 돈도 많이 번 멋진 모습일 줄 알았다. 하지만 막상 30대가 되어보니 모은 돈은 별로 없고 여전히 서투르기만 하다.
‘시니어’라는 것도 마찬가지가 아닐까 싶다. 지금 생각하면 10년 차 마케터가 되면 그래도 뭘 좀 아는 능력자가 될 수 있을 것만 같다. 하지만 시간이 흘러 10년 차가 되어도 나의 고민의 결은 여전히 비슷할지도 모른다. 미래 완료시제가 아니라 미래 진행형인 것이다.
시니어는 10년 차가 된다고 해서 훈장처럼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나의 성장을 위해 일하자는 마음으로 임하며 부딪히고, 배우고 그렇게 앞으로 나아가며 그 자격을 얻어야 하는 것이 아닐까 싶다.
Photo by Ryan Stone on Unsplash