퇴사 결정에 도움을 주는 16가지 질문
회사에도 가끔 유행이 돈다. 바로 퇴사 유행.
신기하게도 다들 나 빼고 약속이라고 한 듯이 퇴사가 우르르 몰리는 시즌이 있다. 평소에 협업할 기회가 없어 교류가 뜸했던 동료는 어느 순간 조용히 사라져 있다. 남아 있는 사람들 사이에서는 어수선함이 감돌면서 묘한 불안감이 조성된다.
현재 다니는 IT 스타트업에서의 첫 번째 고비는 입사 6개월 차에 찾아왔다. 계기는 든든한 보호막 같던 팀장님의 퇴사. 비슷한 시기에 재무팀 및 백오피스 직원들의 퇴사도 겹쳤다. 다른 사람은 몰라도, 재무팀 직원들이 퇴사하면 그건 진짜 위기 징조라고 하는데… 불안해졌다.
점심시간마다 식사 자리에서는 한탄이 이어졌다. 성장세가 더디고, 바뀌지 않는 경영진에 대한 신뢰는 바닥을 치고, 비즈니스의 앞날은 암울해 보이기만 했다. 이렇게 모일 때마다 좋지 않은 이야기를 늘어놓으니 회사에 잔류하는 것이 뭔가 손해인 것처럼 느껴지고, 부정적인 기운에 잠식당하는 것 같았다.
Exit Plan을 미리 세워야 할 것 같아 채용 공고를 부랴부랴 찾아봤다. 하지만 몇 년 전부터 이어진 저성장 기조로 채용 시장이 상황이 좋지 않았다. 업그레이드를 위한 기회는 거의 없었고, 무엇보다 현 직장에서 일한 지 6개월 밖에 안 되었던지라 섣부르게 움직일 수 없는 상황이었다. 결론적으로 나에게는 잔류하는 카드만 존재했다.
우리는 로봇이 아닌, 사람인지라 함께 일하면서 정들었던 동료들이 퇴사하면 그 분위기에 동조당하기 쉽다. 그러나 세상에는 모든 것이 완벽한 신의 직장은 없다. 퇴사하는 동료들은 뭔가 실망스러워서 이곳을 떠나 새로운 곳으로 가지만 과연 새로운 회사에서는 행복할까?
유행처럼 번지는 퇴사 바람에 휩쓸리지 않기 위해 현재의 직장에 머물러야 할 이유에 대해 생각했다. 감정을 배제하고, 일 적으로만 생각하니 남을 이유들이 하나둘씩 보이기 시작했다.
특히 6개월 뒤 미래의 내 이력서를 그렸던 것이 도움이 되었다. 이력서에 내가 어필하고 싶은 주요 역량과 달성해야 할 KPI의 목표를 세웠다. 그렇게 하니까 버텨야 하는 시간이 더 이상 시간 낭비처럼 보이지 않았다. 오히려 돈을 벌면서 내가 그리는 미래의 모습에 가까워질 수 있는 소중한 기회로 보였다.
퇴사 기운이 어둡게 드리운 사람들끼리는 불만을 늘어놓으며 마치 회사가 곧 망할 것처럼 이야기한다. 하지만 회사는 그리 쉽게 망하지 않는다. 나간 사람 자리에 새로운 사람이 들어오고, 새로운 에너지로 채워지며 어찌어찌 앞으로 나아가기 마련이다.
우리 팀을 둘러싼 상황도 나아졌다. 사업 조직이 개편되면서 새로운 도약을 위한 모멘텀이 생겼다. 팀장님이 떠나면서 나와 동료 마케터는 낙동강 오리알 신세가 되었지만, 글로벌 사업 CEO가 임시로 우리의 매니저 역할을 하게 되었다. 그는 인도인이기에 영어로 소통해야 한다는 부담은 생겼지만 이로써 글로벌한 환경에서 일하고 싶다는 나의 갈증이 채워졌다. 또한 그와 함께 일하며 C-level의 눈높이에 맞는 소통법과 목표 설정과 프레임워크를 배울 수 있게 되었다.
입사 1주년이 가까워올 때쯤 두 번째 퇴사의 고비가 찾아왔다. 팀장님이 퇴사한 뒤 2명의 소수 정예 팀으로 남아 서로 긴밀하게 의지하던 팀 동료마저 사표를 낸 것이다. 동료 이상의 단짝 같은 친밀함을 느끼는 사이였기에 더욱 충격과 상실감이 컸다.
이번에도 유행처럼 퇴사자가 매주 발생했는데, 특히 2-3년 이상 오랫동안 재직했던(스타트업에서 2년 이상이면 오래 다닌 편이라고 여긴다) 동료들이 그 주인공이라 타격감이 컸다.
'진짜 이 회사 위기인 건가...?'
또 한 번 이직과 잔류의 기로에 섰다. 신규 채용이 되기 전까지는 동료의 업무가 넘어와 일도 많아지겠지만, 팀이 공중분해되어 혼자만 남게 되었다는 사실이 너무 막막했다.
감정적으로 결정을 내릴 수도 있었겠지만, 주관적인 감정은 배제하고 객관적으로 이 상황을 정리할 필요가 있었다. 복잡한 생각을 정리하기 위해 ‘To leave or stay 의사결정 기준표’를 만들었다.
비즈니스, 직무, 상사, 동료, 보상, 위치 및 근무환경, 문화/조직 분위기, 미래 기회 이렇게 8개의 카테고리를 나눠서 점수를 매기고, 남아야 할 이유(+)와 이직을 고려해야 할 이유(-)에 대해 적어 내려갔다.
1. 비즈니스
- 산업 전망이 밝고, 회사가 지속적으로 수익을 창출하고 있는가?
- 안정적으로 고용이 유지될 가능성이 높은가?
2. 직무
- 내가 맡고 있는 일이 내가 잘할 수 있는 일인가?
- 성장 가능성(스킬 확장, 커리어 성장)이 있는가?
3. 상사
- 상사와의 커뮤니케이션이 원활한가?
- 나의 역량과 성과를 제대로 인정해 주는가?
4. 동료
- 함께 일하는 동료와의 관계가 협력적이고 건강한가?
- 정서적 지지나 팀워크를 느낄 수 있는가?
5. 보상
- 내 기여에 비해 충분하고 정당한 보상을 받고 있는가?
- 연봉 외의 복지나 보너스 제도가 만족스러운가?
6. 위치 및 근무환경
- 출퇴근 또는 재택근무 등 근무 환경이 삶의 질을 해치지 않는가?
- 워라밸을 유지할 수 있는가?
7. 문화/조직 분위기
- 회사 문화가 나의 가치관과 맞는가?
- 의사결정 구조, 피드백 문화가 수용적인가?
8. 미래 기회
- 이곳에 계속 있으면 1~2년 후 커리어에 도움이 될까?
- 외부에서 더 좋은 기회를 찾는 것이 지금 더 나은 선택일까?
항목별로 5점 만점 기준으로 나름의 점수를 부여했는데 대부분의 항목이 고루고루 높은 점수를 받았고, 그 어떤 항목도 3점 밑으로 내려가지 않았다. 전반적으로 나는 현재의 업무와 동료와의 관계 속에서 꽤나 만족하고 있고, 앞으로의 비즈니스적 상황도 나쁘지 않다는 것을 깨달았다.
이렇게 체계화하여 정리하니 불확실의 안개가 걷히면서 상황이 명료해짐을 느꼈다. 섣부르게 움직이기보다는, 지금은 머무를 때라는 확신이 들었다. 그리고 동료의 부재로 맞은 위기를 오히려 성장을 위한 기회로 만들어보자는 긍정적인 에너지가 차올랐다. 동료의 업무를 커버하는 과정 속에서 나의 능력치는 확장할 것이고, 특정 기능만 수행하다가는 대체되기 쉬운 AI 시대에 대체 불가능한 존재로 발돋움하는 데 있어 도움이 될 것이다.
우르르 번지는 퇴사 유행 속에서 흔들리고 있다면, 남들이 떠나지만 오히려 남아야 할 이유에 대해 생각하는 사람이 되어보자. 어수선한 분위기 속에 괜히 마음이 떠서 휩쓸리지 않고, 내 삶의 주인공으로서 주체적으로 상황을 직시하고, 전환점을 맞이할 수 있는 소중한 기회일테니.
표지 사진 = Chat GP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