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구에게나 급격히 기분을 끌어올리기 위한 '필살기' 하나쯤은 있는 것 같습니다. 한없이 기분이 가라앉고 명치 안이 갑갑할 때 스스로에게 내리는 응급처방 말이에요. 내가 아는 누군가는 눈물이 쏙 빠지게 매운 음식을 먹는다고 했고, 다른 이는 일단 잠을 청한다고 했습니다. 이 글을 읽는 당신 역시 빵집으로, 코인 노래방으로, 고기 앞으로, 헬스장으로, 편의점의 4캔만원 맥주 코너로, 최애 아이돌의 직캠 영상으로, 게임 속으로 숨어들지 모르죠.
저의 경우엔, 영화관이었습니다. 유난히 평일 저녁에 극장을 자주 찾았던 건 우연이 아니었다고 생각해요. 09시부터 18시까지의 삶이 유난히 회색빛인 날, 돈을 벌었으나 영혼의 일부를 잃었다는 기분이 드는 날, 이대로 집으로 돌아간다면 완벽하게 별로인 하루가 저물 거라는 예감에 사로잡힌 날- 나는 자주 지친 야생동물이 굴에 숨듯이 어두운 상영관에 숨어들곤 했습니다. 나는 그 안에서 자주 현실의 고까움을 잊었고, 2시간 동안 숨을 돌리다 보면 구겨졌던 마음은 어느새 좀 펴져 있었습니다.
2.
여행 좋아하시나요? 영화를 본다는 건 제겐 어쩐지 여행을 다녀오는 것과 비슷한 행위로 느껴지기도 합니다. 영화 상영 직전, "앞좌석을 발로 차지 마시고..." 하는 안내멘트를 들으며 핸드폰을 끌 때의 기분, 마치 비행기가 이륙할 때처럼 일상으로부터 완벽히 분리되는 그 기분을 당신도 알겠죠. 나의 현실과는 완벽히 다른 삶에 푹 빠져 웃거나 울거나 놀라거나 안도하는 동안, 나의 시간은 원래의 속도감을 잊은 채 쏜살같이 흐릅니다. 그리고 영화가 끝난 후 저는 영화를 보기 전과는 미세하게 다른 사람이 되어 극장을 나섭니다. 여행이 끝난 후의 내가, 더 이상 여행 전의 나와 같은 사람이 아니듯이.
3.
이 모든 것들을 누리는 데 필요한 것이 고작 두어 시간과 만 원 한 장이라니. 내가 지불하는 것에 비해 영화가 내게 주는 것이 너무 많다고, 자주 생각했습니다. 영화가 사람이라면 두 손을 꼬옥 잡고 "고맙네 고마워" 하고 싶은 날들이 참 많았습니다.
이곳의 글은 모두 그런 날 쓰인 것들입니다. 나의 피난처이자 여행이었던 극장에서 돌아오는 길, 집으로 돌아오는 버스 안에서 토독토독 엄지로 써 내려간 감상들, 이어폰을 꽂고 걸으며 했던 생각들, 자기 전 노트북에 끄적였던 것들입니다. 영화를 보고 온 날의 시점과 감정을 최대한 보존하려 한 점, 이해해 주신다면 더욱 좋겠습니다.
사는 동안 제가 영화에 빚질 날은 계속 늘어날 테고, 이렇게 쓸 글도 계속 많아지겠죠. 그 일부를 당신과 나눌 수 있음에 기쁨을 느낍니다.
자, 그럼 앞좌석을 발로 차지 마시고 핸드폰은 진동이 아니라도 상관없으며, 부디 즐거운 시간 되시기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