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디 앨런. 굳이 설명하기도 입 아픈 거장 영화감독이자, 지구상에서 가장 내 취향에 가까운 영화를 만들어내는사람. 그의 영화에는 특유의 위트, 낭만, 재치, 풍자, 탐미, 장난스러움이 있다. 어떤 감독으로도 대체가 불가능할, 우디 앨런의 영화만이 가진 분위기를 나는 오랫동안 사랑해왔다.
그러나 나는 더 이상 좋아하는 영화감독을 말할 때 그를 언급하지 않는다. 그의 영화를 찾아보지도 않는다. 신작 '레이니 데이 인 뉴욕'은 심지어 얼굴천재 티모시 샬라메까지 출연했기에 내가 딱 환장할 만한 영화였지만 눈 딱 감고 (힘겹게) 외면했다. 이유는 간단하다. 우디 앨런이 양녀 성폭력 혐의를 받고 있기 때문이다.
솔직히 말하면, 아직도 '미드나잇 인 파리'처럼 꿈꾸듯 아름다운 영화를 미워할 자신은 없다. 티비를 돌리다 그의 영화가 나온다면 채널을 단호히 넘길 자신도 없다. 하지만 적어도, 더 이상 우디앨런이라는 개인을 공개적으로 지지하거나 존경하지 않으려 한다. 세상에는 나의 취향, 혹은 그가 이룬 예술적 성취보다 중요한 것이 있다고 믿기 때문이다. 그것이 세상 어딘가에 존재할 피해자에 대한 일말의 염치라 생각하기 때문이다.
지난 몇달, 그리고 며칠 동안 뉴스에 오르내리는 한국의 선출직 공무원들의 이름들을 보면서, 나는 뜬금없게도 우디 앨런을 떠올렸다. 같이 작업했던 동료들조차 '그와의 작업을 후회한다'며 외면받는 미국의 거장 영화감독. 그리고 성범죄로 복역 중인 전 정치인의 경조사에 국가의 이름으로 보내지는 화환과, 성범죄 혐의를 피하려 택한 죽음에헌정되는 5일간의 긴 추모와, 이를 비판하는 목소리를 '피도 눈물도 없다'며 틀어막는 호통들, 그런 것들을 번갈아 떠올렸다. 황당하고 서글픈 마음이 빗물처럼 흐르는 며칠이었다. 아니,저들은영화감독도 동네 아저씨도아닌 공직자인데. 시민을 보호해야 할, 그 자체로 도덕적이어야 할 의무가 있는 사람들인데.
영화감독 우디앨런을 좋아했듯이, 사회의 어른으로서 그들을 지지할 때가 있었다. 우디앨런의 영화들이 여전히 아름답듯이, 그들이 사회에 남긴 성취들도 여전히 유의미할 것이다. 그러나 본인들이 주장했던 가치-정의와 인권 같은 것들-를 정면으로 부정한 행보 앞에서예전과 같은 수준의 리스펙을바라는 건 다른 문제다. 범죄혐의가 있고, 이 '깍듯하고 오피셜한' 추모와 옹호앞에 절망을 느낄 피해자들이 있다. 좀 염치없지 않나, 이런 거.
한 때 그들을 지지했기 때문에, 내겐 마음껏 실망할 자격이 있다. 그러니까, 아름다운 것들을 빚어낸 손의 영혼이 추악하다면, 나는 그 주인까지 아름답다 칭송할 마음이 없다. 그게 미국의 영화감독이든 한국의 지자체장이든. 적어도 나는 그렇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