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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sooway Apr 23. 2016

비포 시리즈를 좋아하세요?

비포 선라이즈 (1995, 미국)



1.

 언젠가 친구와 얘기하다가 "비포 선라이즈를 좋아하는 남자라면 사랑하지 않을 수 없을 것 같다"고 했다. 그랬더니 친구는 "비포 선라이즈를 볼 수 있는 것도 모자라 좋아할 정도의 감성을 가진 남자라면 내가 감당할 수 없을 것 같다" 고 했다. 그리고 우리는 서로 '니 말도 맞다'면서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내게 <비포 선라이즈>란, 뭐 그런 느낌의 영화다.



2.

드물게 <비포 선라이즈>부터 <비포 선셋>, 그리고 <비포 미드나잇>까지 18년에 걸친 Before 3부작을 모두 보았다는 사람을 만나면, 나는 반가움에 소스라치게 호들갑을 떨면서 "그 3편 중에 뭘 제일 좋아하세요?"라고 묻는다. 내겐 일종의 심리테스트나 혈액형 묻기 같은 건데, 마치 "오 A형이라 소심하시겠군요!" 하듯이 "오 <비포 미드나잇>을 좋아하신다니 사랑은 은은한 모닥불 같은 것이라고 생각하시나 봐요!" 하는 거다(물론 정확도는 혈액형 묻기 수준이겠지만).


내게 비포 시리즈는, 뭐 그런 의미의 영화들이다.





3.

<비포 선라이즈>의 배경은 오스트리아의 비엔나지만, 영화는 유럽 도시의 매력에 크게 기댄 많은 영화들- 예를 들면 '미드나잇 인 파리'나 '냉정과 열정사이'- 만큼 도시의 매력을 미친 듯이 뿜어내려고 노력하지는 않는다. 대신 카메라는 시종일관 이제 막 사랑에 빠진 어린 연인들을 담느라 정신이 없다. 깜빡일 시간조차 아까워 서로를 뚫어져라 바라보는 눈동자들과, 환희에 취해 쉴 새 없이 재잘대는 붉은 입술들을 바싹 붙어 담느라 정신이 없다. 그 어색하고 떨리고 숨막히고 황홀하고 안타까운 공기만 호흡하기에도 영화는 짧다. 아아 열정이여, 낭만이여, 후회할 걸 알면서도 손 놓고 빠져드는 대책없음이여.


비엔나는 분명 멋진 도시지만, 그 배경이 호치민이나 충북 제천이었다 해도 <비포 선라이즈>는 똑같이 아름다웠을 것이다.





4.

이 영화가 재미난 진짜 이유는, '내 생엔 절대 일어나지 않을 것 같은 비현실성'과 '사랑에 빠지면 누구나 겪는 보편성'을 동시에 지니고 있기 때문이다.


이를테면 외국 어느 도시를 기차로 여행하던 중(비행기면 도중에 뛰어내릴 수가 없으니까), 내 앞좌석에 에단 호크나 줄리 델피처럼 매력적인 이성이 앉았는데, 마침 나와 완벽하게 소통하는 언어를 구사할 수 있고, '이 낯선 곳에서 오늘 하루를 나랑 함께 보내자'는 과감한 제안을 하거나 응할 만큼의 대범성까지 갖췄는데, 하룻밤 같이 다니다 보니 그가 사이코패스나 꽃뱀이나 내 지갑을 노린 절도범이 아니라 내가 사랑해도 될 만한 좋은 사람이라서, 다시 만나자는 약속과 함께 기차 플랫폼에서 안타까운 키스를 나누고 아름답게 헤어질 확률. 누구나 상상하지만 아마 이번 생엔 없을(..) 확률의 꿈을, 영화가 대신 꿔 준다.


대신, 판타지라고만 하기엔, 현실의 내가 사랑에 빠질 때의 모습이 스크린 안에 그대로 있다. 왠지 내가 하는 모든 말들을 그가 찰떡같이 알아듣는 것 같고, 그가 하는 모든 말들이 내 뼛속까지 와 닿는 것 같으며, 이 사람이야말로 내 영혼의 반쪽이 아닐까 하는 즐거운 의심이 시작된다. 수줍고, 설레며, 웃음이 나다가, 언젠가 사그라들 이 행복이 두렵고 서글퍼서 짐짓 퉁명스레 굴다가, 맘을 참지 못해서 남들은 상상도 못 할 유치한 말들을 꺼내놓곤 화들짝 놀라다가, 그가 속삭이는 사랑의 밀어들에 몽롱해져서 배시시 웃는 것. 때로는 논쟁하고, 내 예상과 다른 모습에 '어쩌면 완벽한 사람이 아닐지도 몰라' 섣불리 실망했다가, 조잘대는 그 모습에 다시 피식 웃고 마는 것. 그건 다름 아닌 지금 혹은 과거 어느날 당신의 모습이다. 아닌가?





5.

기차 안의 낯선 여인 셀린느를 꼬실 때 제시가 말한다. "시간 여행을 하고 있다고 생각해봐요. 수십 년 후  따분한 결혼생활 중 당신을 스쳐 지나간 남자들을 떠올리는 거예요. '그때 기차에서 만난 미국인과 비엔나를 하룻밤 여행했었지' 하면서 오늘을 추억하겠죠. 그럼 당신은 안도하며 기쁘게 결혼생활로 돌아갈 수 있겠죠." 아아, 셀린느 정도의 똑똑하고 아름다운 여인을 꼬시려면 저 정도 강력한 멘트 정도는 칠 줄 알아야 하는 것이다.


어쩌면 <비포 선라이즈>란 두 사람이 사랑에 빠지는 찰나를 고속촬영하듯 아주 느리고 섬세하게 포착한 영화이면서, 더불어 우리 곁을 스쳐 지나갔던 수많은 사랑의 '가능성' 들에 대한 영화일 수도 있겠다. 어쩌면 오래도록 내게 머무를 수도 있었으나 발화하지 못하고 스쳐 날아간 사랑의 홀씨들. 그것들이 지금 어디쯤의 공기에서 유영하고 있을지 알 수 없어도, 비록 그것의 싹틔움과 꽃피움과 시듦을 내 눈으로 다 보지 못했더라도, 괜찮다. 아니 어쩌면 그래서 다행일지도 몰라. 지나간 것은 지나간 대로 그런 의미가 있지.


영화를 보는 누군가는, 그렇게 중얼거렸을 것이다.






6.

그리하여 당신에게 묻고 싶다.


비포 시리즈를 좋아하세요?

몇 편이나 보셨어요?

그중에 최고는 뭐라고 생각하세요?


이 질문에 당신이 답을 하는 순간, 우리는 아주 긴 대화를 시작하게 될지도 모를 일이다.


제시와 셀린느가 그랬듯이.




-2016. 4. 22. 8:35PM 롯데시네마 부산본점 10관







+) 영화 <캐롤> 때에도 느낀 문젠데, 한글로 번역된 영미권 영화를 볼 때 최고의 애로사항은 반말과 존댓말의 무시할 수 없는 뉘앙스 차이일 거다. 이번 재개봉 버전에서는 한글자막이 처음부터 끝까지 존댓말로 쓰여서 몰입이 좀 덜 됐다. "당신은 마치 보티첼리의 천사 같아요"라고 말하는 제시라니(흑). 비록 몇 시간 전에 만난 사이였더라도 그 순간만큼은 그들의 심리적 거리는 세상 누구보다 가까웠을 텐데, 시간의 흐름에 따라 자연스럽게 말을 놓는 것처럼 했으면 어땠을까 싶었다. 말의 뉘앙스가 아주아주 중요한 영화란 말이오. 엉엉.


++) 내가 한 질문에 답을 하자면, 저는 <비포 선셋>을 가장 좋아한답니다. 조만간 재개봉했으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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