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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sooway Dec 12. 2016

사탕가루처럼 달고 반짝이는

라라랜드(2016, 미국)

*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영화 <위플래쉬>를 통해 "음악이 인생이고 인생이 음악이야, X들아!!!!" 를 외치는 것만 같았던 감독의 새 영화가 '로맨틱 뮤지컬'이라고 했을 때, 사실 나는 좀 반신반의했었어. 내가 아는 그 피 튀기는 음악영화 <위플래쉬>의 감독이, 꿀같은 멜로디가 흐르는 사랑영화를 만들었다구여?


하 위플래쉬... 지금 생각해도 넘나 오금 저리는 것...


그러니까 나는 <위플래쉬>와 <라라랜드>가 아예 다른 영화일 거라 예상했던 건데, 영화를 보고 나니 그 예상은 틀렸다는 생각이 들었어. <라라랜드>는 춤과 음악, 원색과 달콤한 멜로디로 시종일관 반짝거리는 영화지만, "사랑밖엔 난 몰라"류의 로맨스는 아니었거든. 한 쌍의 아름다운 남녀 커플이 등장하고, 그들의 만남과 교감이 그려지지만, 그것만을 위한 영화는 아니라는 생각. 적어도 사랑영화를 사랑하는 내가 봤을 땐 그랬어.



말하자면 감독은, 이번에도 꿈을 향해 달려가는 청춘들의 열정과 갈망을 원료로, 한 잔의 술을 빚듯 기가 막힌 영화를 만들었구나. 차이가 있다면 <위플래쉬>는 톡 쏘는 50도짜리 증류주, <라라랜드>는 새콤달콤 알록달록한 칵테일이라고 하면 적당하겠다. 둘 다 흠뻑 취하기엔 부족함이 없지만!





영화를 보고 나올 때, 뭔가 한 편의 좋은 라이브 공연을 보고 나온듯한 기분이 들더라고. 정교하게 잘 짜였고, 지극히 영화적이면서 미술적이지만, 신기하게도 생생한 날 것의 느낌이 났거든. 아름다운 음악과 리드미컬한 화면, 경쾌한 춤사위들. 앉아있는 곳이 영화관임을 망각한 채 까딱까딱 박자 타느라 바빴네. 나의 분주한 정수리가 거슬렸을 뒷좌석 관객에게 미안하군. 껄껄.


특히나 오프닝 시퀀스는, 오, 이거 도대체 얼마나 연습해서 얼마나 찍은 걸까? 이 장면을 완성하고 제작진은 얼마나 흥분했을까?

이 오프닝 때문에라도 <라라랜드>는 극장에서 봐야 한다고 생각함.


그 도로는 참 이상한 곳이었어...



영화가 되게 클래식하잖아. 어찌 보면 찬란한 시절의 헐리우드에 대한 헌사 같기도 하고. 첫만남엔 아웅다웅했던 두 남녀가 티격태격하다가 사랑에 빠진다는 전개도 그렇고, 화면 구도나 음악, 의상이나 자동차나 건물도 지극히 복고적이지. 그래서 난 영화 초반엔 당연히 수십 년 전이 배경인 줄 알았는데, 보다 보니 아이폰이나 유튜브가 불쑥 등장해서 "아, 배경이 현대였어?" 하게 된단 말이지. 이런 묘한 이질감이 '라라랜드'를 말뜻 그대로 '현실과 동떨어진 세계'로 만드는 건지 몰라.






재즈 아티스트를 꿈꾸는 남자와 배우를 꿈꾸는 여자. 그들이 서로를 발견하고, 사랑에 빠지고, 함께함에  익숙해지고, 각자가 추구하는 분야에서 달리고 부딪히고 또 비틀거리고. 그 과정에서 두 사람은 영향을 주고받으며 변화 혹은 성장하지. 남자가 "너만의 대본을 써 봐"라고 말하지 않았다면, 여자는 그 후로도 한동안 남의 오디션만 따라다니며 고배를 마셨겠지. 여자와의 안정된 보금자리를 꿈꾸지 않았다면, 정통 재즈를 추구하던 남자가 퓨전 밴드에서 키보드를 칠 일은 없었을 거야.


말하자면 서로를 만나 사랑하게 된 일이 어떤 식으로든 두사람의 '꿈의 추구'에 영향을 끼친 건데, 중요한 건 그 다음이지. 이 영화는 흔히 '한 쌍의 남녀가 등장하는 영화'에서 기대될 법한, "꿈도 명예도 다 필요없소, 난 너만 있으면 돼"라는 식의 전형적인 사랑을 그리지 않아. 내가 <라라랜드>가 여느 사랑영화와는 좀 다르다고 말한 이유가 바로 그 지점이지. 영화속 셉과 미아의 사랑은, 에로스보단 일종의 파트너십에 가깝다는 느낌.





그러니까 영화는 사랑하는 두 사람이 모든 것을 포기한 채 서로의 품에 뛰어드는 대신(난 그런 류의 결말도 좋아하지만), 각자의 꿈을 좇으며 서서히 멀어져 가는 모습을 자연스레 보여주지. 그 이유는 서로를 더이상 사랑하지 않아서가 아니라, 그들 자체가 꿈 없이는 완성되지 않는 사람들이기 때문이야.


배우의 꿈에 한 발짝 다가선 여자, 촬영을 위해 파리로 떠나야 할 여자를 남자는 붙잡지 않지. 그렇다고 눈물 쏙 빼는 대사로 절절한 이별을 고하지도 않고.

그저 "흘러가는 대로 지켜보자"라고 말할 뿐이지.


아아, 이런 풍경, 꿈과 사랑을 동시에 갈망할 수밖에 없는 청춘들에게 이 얼마나 익숙한 장면일까.





말하자면 <라라랜드>는, 동화 같은 춤과 노래와 화면을 통해서, 삶이란 꿈을 좇는 여정 그 자체라는 말을 하고 싶었나봐. 영화 속 노래 구절처럼 '가슴이 무너지고 바보가 되어도' 포기할 수 없는 것, 걸어야만 하는 길.


그리고 사랑에 빠진다는 건, 그 여행길 위에서 우연히 만나는 동행 같은 거지. 좋은 동행을 만나는 건 여행의 가장 큰 기쁨 중 하나잖아. 서로의 이야기를 나누고, 손을 꼭 붙잡은 채 험한 길을 걷고, 지칠 때 잠시 등을 맞댄 채 쉬기도 하고.


하지만... 엄밀히 말하면,  

동행을 만나서 더 좋은 여행이 될 순 있어도,

동행을 만나기 위해 여행을 하는 건 아니니까.



길을 따라 걸으며 위로하고 격려하던  두 사람, 그러나 어떠한 이유로 갈림길에 섰을 때는, 아쉽지만 서로의 남은 앞길을 축복하며 각자 걷게 되더라도 어쩔 수 없는 것.

<라라랜드>가 말하는 사랑의 의미란 그런 것 같다.

동의하니? 나의 해석에, 영화가 말하는 사랑에.





<노트북>의 라이언 고슬링, 여기서도  바보처럼 한 여자만 바라보는 역할을 맡았네. 이 정도면 헐리우드의 '프로 일편단심러' 라고 불러야 할 듯. 사랑스러운 엠마 스톤은 성우 서유리를 상당히 닮았더군. 저런 마르고 재능있는 여인 같으니.


중간에 라이벌 느낌의 친구 역할을 보고는 "조연 주제에 뭔 노래를 저렇게 잘 하나" 했는데 알고 보니 존 레전드였네?? 어이쿠 제가 용안을 못 알아뵙고;; 어쩐지 대충 허밍만 해도 소울이 뚝뚝 떨어지더라... 까메오인 레스토랑 사장님이 <위플래쉬>의 호랑이 선생님인 것은 나중에 알았음. 넘나 깨알같은 것.


어이쿠 레전설씨 안녕하세요...




음, 그러니까 내 말은, 이런 영화를 어떻게 사랑하지 않을 수 있냔 말이야. 씁쓸한 현실 앞에 주눅 든 청춘들을 지극히 영화적이고 음악적인 방식으로 위로하는 영화. 그 위로가 뜬구름 같은 최면이 아니라, 때론 현실이란 게 흰 셔츠에 커피를 쏟은 채 오디션을 보러 가야 하는 순간처럼 거지같아도, 그 사이사이엔 빛나는 순간들이 있을 거라 말하는- 이 사탕가루처럼 달콤하고 빛나는 영화를, 난 사랑하지 않을 수가 없다.


더불어 이제 겨우 세 번째 장편 영화를 연출한 이 청년 감독의 재능이, 난 진심으로 부럽고 존경스러워. <라라랜드>를 보는 내내 "영화는 만드는 게 아니라 농사처럼 짓는 것"이라던 어느 영화감독의 말이 떠올랐어. 그는 참 좋은 농부의 재능을 지녔구나.


그의 다음 수확이 벌써 기다려지는구만.




- 2016. 12. 11. 2:10PM 메가박스 서면 2관





+)

간만에 정말 좋은 영화를 발견하면 마음속에 말이 많아진다. 맘 맞는 친구와 펄펄 김 나는 오뎅탕에 김치전 젓가락으로 쭉쭉 찢으며, 소주 한잔 앞에 놓고 몇 시간이고 영화 얘기만 하고 싶은 기분이다.


++)

올해 내 최고의 영화는 상반기에 <동주>, 하반기에 <라라랜드> 되겠습니다. 짝짝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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