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sooway Mar 23. 2016

사랑을 잃고 나는 크네

조제, 호랑이 그리고 물고기들(2003,일본)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내가 너무 사랑영화를 많이 보나?' 라고 생각한 적이 있습니다. 일부러 그런 건 아닌데, 정말 보고 싶어서 고른 영화들은 내용과 형식이 어떻든 결국 사랑영화였던 적이 많더라고요. 눈과 귀가 어지러운 액션이나 정신이 긴장하는 스릴러를 잘 보지 못하고, SF나 판타지에 대한 공감능력도 현저히 낮은, 편협한 영화적 식성의 소유자여서 그런 것 같습니다(근데 크리스토퍼 놀란이나 박찬욱 봉준호 감독은 너무 좋아하는 게 의문). 무엇보다도 '집으로 돌아가는 버스 안에서 골똘히 생각에 잠기게 하는 영화'를 좋아하고 또 고르려 한다는 점에서, 확률적으로 인간의 감정, 그 중에서도 사랑을 다룬 영화를 보게 될 때가 많지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누군가 제게 "사랑에 대해 가장 많은 생각을 하게 했던 영화가 무엇이었어?" 라고 묻는다면, 저는 수많은 후보자들 중에서 하릴없이 이 영화를 선택할 것 같습니다. 한때는 제목이 <조제 호랑이 그리고 물고기들>인지 <조제 물고기 그리고 호랑이들>인지 헷갈렸던 이 영화.



3년 전에 끄적여 둔 영화 감상 feat.페북



츠네오는 깜깜한 해저 속 자신만의 세계에 갖혀 있던 쿠미코를 발견하고, 자진해서 그녀의 두 발이 되어주고, 물 밖을 구경시켜 주고, 빛속으로 인도합니다. 츠네오가 그렇게 불러주었기 때문에, 죽은 듯 살며 할머니가 주워온 헌 책을 읽던 장애인 쿠미코는 비로소 '조제'가 됩니다. 조제가 그 곳에 있었기 때문에, 주변 여자들을 전전하며 딱히 슬플 것도 아쉬울 것도 없이 살아가던 대학생 츠네오는 비로소 울다가 웃다가 빗속을 달렸다가 굳게 닫힌 문을 두드렸다가 하는-사랑을 할 줄 아는- 남자가 됩니다.





영화의 결말만큼 서늘하게 얘기해 볼까요. 엄밀히 말하면, 츠네오가 조제의 곁에 머문 것이 조제를 위해서는 아니었다고 생각합니다. 그건 조제가 어떤 사람인지 알고 싶고, 조제와 이야기하고 싶고, 조제가 차려주는 밥을 먹고 싶고, 조제의 웃는 얼굴을 보고 싶고, 조제를 어루만지고 싶은 츠네오 자신을 위해서였을 거라고, 생각합니다. 곁에 있어 달라 말하는 조제도 마찬가지였겠죠. 조제에게는 츠네오가 필요했으니까요. 츠네오가 없으면 조제는 불편하고, 심심하며, 무엇보다 보고 싶어서 가슴이 아팠을 테니까요.





어쩌면 사랑은, 적어도 연애감정은,

'지극히 이기적인 이유 때문에 지극히 이타적인 방식으로 두 사람이 함께하는 것'일 수 있겠다고,

<조제, 호랑이 그리고 물고기들>을 보며 생각했습니다.


상대방과 함께 하는 것이 행복하기 때문에, 상대방이 필요하기 때문에, 연인들은 사랑을 합니다. 상대를 사랑하는 일이 더이상 나를 행복하게 하지 못할 때,  상대의 존재가 없이도 살아갈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 때, 연인들은 이별을 합니다.


이 슬프고도 당연한 원칙을 이해하기에, 조제는 떠나는 츠네오를 붙잡지 않습니다. 그의 마음이 영원하지 않음을 원망하지 않습니다. 그리 할 수밖에 없음을 이해하기에, 우리는 도망치는 츠네오를 비겁하다 생각하는 대신, 길가에 주저앉아 오열하는 그를 보며 같이 훌쩍일 수 있습니다.





그들이 영화 밖에서도 존재한다면 어떨까요. 모르긴 몰라도 왠지 지금쯤 잘 살고 있을 것 같습니다. 츠네오는 취직도 했고 새 여자친구도 있죠. 영화의 마지막, 단정히 머리를 묶고 정갈히 밥상을 차리는 조제의 뒷모습은 어쩐지 믿음직스럽습니다. 연애가 끝나는 시점에 그들은 조금씩 더 좋은 사람이 되어 있었으니, 서로의 기억을 양분 삼아 더 좋은 연애를 할 수 있겠지요.


영화가 조제의 단정한 뒷모습으로 말합니다. 사랑이 끝났다 한들 우리는 사랑하기 전으로는 돌아갈 수가 없다고. 좋게든 나쁘게든, 지금의 나는 사랑을 시작하기 전의 나와는 다른 사람일 수밖에 없다고. 조제가 다시 혼자가 되었다 한들 예전의 쿠미코가 아니듯이.





연애의 시작, 혹은 이별의 아픔을 토막내어 그린 영화는 셀 수 없이 많겠지요. 그러나 사랑의 탄생부터 소멸까지를 이토록 손이 저릴 만큼 생생히 그린 영화는, 적어도 제 기억 속엔 <조제, 호랑이 그리고 물고기들>이 유일합니다.


일출과 일몰, 핌과 짐, 떨림과 권태, 시작과 끝- 그 사이 아득한 감정의 파고를 남김없이 '체험'하고 싶은 이에게, 이 사랑영화를 추천합니다.



- 2016. 3. 22. 9:10PM 롯데시네마 서면





+) 봄맞이 재개봉영화가 풍년이네요. 지금 <조제..>와 <무간도>가 상영 중이고, 4월 초 <비포 선라이즈>와(세상에!) <성월동화>, 4월 중순 <인생은 아름다워>가 재개봉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당분간 주 1회 영화관 출석이 불가피하게 됐습니다. 영화관들이여 얼른 내 카드를 가져가세요. 정작 최신개봉작을 못 보고 있는 게 함정.


매거진의 이전글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인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