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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sooway Feb 26. 2016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인

동주(2016, 한국)



유난히 내가 좋아하는 요소들이 모인 그룹을 발견할 때가 있습니다. 치즈와 버섯과 고기(종류를 막론하고)가 듬뿍 들어간 요리라던지, 좋아하는 작가들의 책이 한칸에 꽂힌 책꽂이라던지, 나를 구심점으로 친한 사람들이 모두 모인 술자리라던지. 네 글자로 '취향저격'이라 하지요.


영화 <동주>는, 제가 좋아하는 시인 윤동주의 삶을, 제가 좋아하는 이준익 감독이 연출하고, 제가 좋아하는 배우 강하늘이 연기한 영화입니다. 개봉 전부터 발을 굴렀습니다. 제겐 '반칙'과도 같은 이 영화가 궁금해서요. 이름 그 자체로 노스탤지어가 되어버린 시인 윤동주와, 이준익의 휴머니즘과, 강하늘의 말간 얼굴이 만나면 과연 어떤 영화가 될까.


그렇게 고대해 만난 영화 <동주>는, 고맙게도 저의 기대를 온전히 채워주었습니다. 흰 종이 위에 사각사각 만년필로 쓴 '한 편의 정갈한 시' 같은 영화였습니다.





윤동주를 모르는 한국사람이 있을까요. 윤동주를 싫어하는 한국사람이 있을까요. 선하고 서글픈 시를 많이 남긴, 잘생긴 얼굴의 청년 시인. 한글 타자연습 프로그램에서 그의 시구 "별 하나에 어머니, 어머니..."를 치면서 괜히 감상에 젖어본 이가 저 하나만은 아니겠습니다마는, 이상하게도 그의 이름을 마주할 때마다 반가움 너머의 먹먹한 기분을 느끼곤 했습니다.


시로 만난 적 많으나, 사람으로 만난 적은 없는 시인 윤동주의 삶. 영화는 그것을 흑백화면 속에 담아냅니다.


사실 영화를 보기 전에는 디지털시대의 흑백영화에 대한 약간의 염려가 있었습니다. 컬러로 찍어서 색을 다 뺐을 텐데... 그 과정에서 상실한 것들이 있지는 않았을까. 결과적으로 말하면, '흑백사진으로 보아 온 교과서 속 윤동주의 이미지를 깨고 싶지 않아서' 선택했다는 흑백 기법은 감독의 탁월한 선택이었던 것 같습니다. 영화는 움직이는 흑백사진 같기도 하고, 때론 수묵화 같기도 하며, 흰 종이 위에 검은 잉크로 써 내려간 시구들 같기도 합니다. 중간중간 '이 장면이 컬러였으면 어땠을까' 상상해 봤는데 쉽지 않더군요. 적어도 제 눈에 <동주>는, 흑백이어서 더욱 아름다운 영화가 맞는 것 같습니다.





영화를 탄탄히 견인하는 것은 강하늘과 박정민, 젊고 영민한 두 배우가 그리는 '동주'와 '몽규'입니다. 함께 나고 자란 둘도 없는 단짝이지만, 정반대의 성향을 가진 두 사람. 시를 쓰는 동주와 산문을 쓰는 몽규. 내성적인 동주와 호탕한 몽규. 문학의 아름다움을 믿는 동주와 투쟁을 통한 혁명을 믿는 몽규. 둘은 볼트와 너트처럼 다르게 생겼지만 서로에게 맞물린 채 일생동안 영향을 주고받습니다. 서로를 내 살처럼 생각하는, 소울메이트라 할 수 있는  존재들이죠.


아무도 몰랐던 송몽규라는 인물을 발굴한 것은, 윤동주의 전기영화가 할 수 있는 예상치 못한 묘책이었던 것 같습니다. 고뇌하고 질투하고 걱정하고 사랑하는 인간 윤동주의 질감을, 몽규라는 거울을 통해 더욱 생생히 비춰 보일 수 있었거든요.





누군가의 말마따나 "청춘의 단면을 베어낸 듯 푸른 느낌의" 배우 강하늘은, 내성적이고 소심하되 비겁하지 않은 청년 동주의 결을 영화 내내 촘촘히 만들어갑니다. 캐릭터상 지르고 발산하는 연기보다는 안으로 수렴하는 연기를 할 수밖에 없음에도, 감정이 오롯이 다 전달되게 표현하면서, 실존인물의 무게에 짓눌리지 않으며 누구나 납득할 만한 시인 윤동주를 만들어 간다는 것은, 분명 쉬운 일이 아니었을 겁니다. 개인적으로 영화 초반, 몽규를 향한 애정과 열등감이 공존하는 '동공지진' 연기가 압권이라고 생각했습니다(진담입니다).


매력적인 캐릭터와 배우의 내공이 만나 제대로 빛나는 박정민의 '송몽규'는, 이 영화를 찾은 관객들이 가장 신선해할 수확이지요. 제목이 '동주'가 아니라 '몽규' 였어도 무리가 없을 만한 존재감을 보여주니까요. 알고 보니 영화 <파수꾼>의 삼총사 중 억울한 친구(?) 역할로 나온 배우더군요. 지극히 좋은 배우라는 사실을 여실히 증명하였으니, 더 자주 뵐 수 있길 소망합니다.




영화 속 동주는 자주 부끄러워합니다. 친구처럼 턱하니 신춘문예에 당선되지 못해 부끄러워하고, 가고 싶었던 대학에 입학하지 못해 부끄러워하고, 첫사랑 처녀의 빤한 눈빛에 부끄러워하고, '시가 좋다'는 칭찬에 부끄러워하고, 창씨개명 통지서를 받아 든 채 부끄러워하고, '나약한 자들이나 문학으로 숨는다'는 비난에 괴로이 부끄러워하고, '이 엄혹한 시절에 감히 시인을 꿈꿨다'며 부끄러워합니다. 부끄러움을 안다는 것이 마치 무능의 증거처럼 여겨지는 요즘, 부끄러움을 모르는 자들의 기세가 창창한 세상과는 대비되는 모습이지요. 그 부끄러움과 괴로움들을, 동주는 맑은 조선어로 기록했습니다.


영화를 보며, 부끄러움이란 인간이 느낄 수 있는 '가장 인간다운 감정'이라고 생각했습니다. 내 존재와 양심에 비추어 어긋나는 일 앞에, 대놓고 주먹을 휘두르진 못할지언정 적어도 괴로워하는 것. 괴롭다 말하는 것. 그것이 시를 쓰는 인간과 배를 채우는 짐승의 차이라고 생각했습니다.




단지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를 노래하고 싶었던 청년이 시인을 꿈꿀 수 없었던 세상. 호롱불 아래 원고지가 아니라 일본 순사가 내민 '범죄인정 각서'를 마주할 수밖에 없는 비극. 존경하던 대시인에게 "자네, 이미 시인이군" 하는 찬사를 듣던 그가 정체를 알 수 없는 주사를 맞으며 총기를 잃고 죽어가는 모습. 그런 것들을, 영화는 감독 특유의 '인간에 대한 애정'을 담보로 우직하고도 품격 있게 그려냅니다. 영화 전반에 흐르는 감정들은 결코 격하지 않지만, 내레이션 삼아 낭낭히 흐르는 윤동주의 시구들처럼, 맑고 눈물겹습니다.





결국 <동주>는,

'부끄럽지 않은 삶', 그리고 '부끄러움을 아는 삶'을 산다는 것에 대한 영화이고, '대의'라는 명분으로 인간이 인간에게 행한 세상 모든 억압의 희생자들에게 바치는 추도사이며, 윤동주와 송몽규- 이 땅에 잠시 존재했던 아름답고 안타까운 두 청춘을 기억하기 위한 비망록입니다.


보석 같은 그의 시 앞에 '부끄럽지 않은' 영화라고, 감히 생각했습니다.





영화 <동주>를 통해 새로 알게 된 윤동주의 시들이 몇 있었습니다.

그 중에 가장 마음에 남은 것은 「바람이 불어」 라는 시였습니다. 여기에 나눕니다.



「바람이 불어」  -윤동주

바람이 어디로부터 불어와
어디로 불려가는 것일까.

바람이 부는데
내 괴로움에는 이유가 없다.

내 괴로움에는 이유가 없을까.

단 한 여자를 사랑한 일도 없다.
시대를 슬퍼한 일도 없다.

바람이 자꾸 부는데
내 발이 반석 위에섰다.

강물이 자꾸 흐르는데
내 발이 언덕 위에 섰다.




- 2016. 2. 25. 19:50PM 롯데시네마 동래 2관






+) 이 영화를 '한국인이라면 꼭 보아야 할 영화'와 같은 수식어로 추천하고 싶지는 않습니다. 민족의식에 호소하지 않고도 그 자체로 충분히 가치있는 영화니까요. 극장 옆자리 소녀들과 어린 커플은 다소 지루한 듯 한숨을 쉬거나 잡담을 하기도 했습니다. 유희로서의 영화보다는 문학을 읽는 기분으로 접근하기를 권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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