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무 유명한 영화일수록, 오히려 선뜻 손이 가기가 힘든 것 같습니다. 이미 본 것만 같은 기시감 때문이지요(비슷한 예로 제게 영화 '아저씨'는 붕대 감은 원빈과 바리캉으로만 기억됩니다). '러브레터'도 그랬습니다. 제게 영화 러브레터란 숱한 미디어에서 거듭 재생된 명대사 "오겡끼데스까", 그리고 언젠가 영화정보 프로그램에서 보았던 '죽은 연인의 동명이인 동창생 앞으로 편지를 보내며 시작되는 과거여행'이라는 한 줄의 줄거리가 전부였지요.
그래서, 다시 극장에 걸린 이 영화가 반가웠습니다. 소문난 잔치에 먹을 것 없나 두리번거리는 마음으로 스크린 앞에 앉았습니다. 그리고 정확히 두시간 뒤, 저는 영화관 알바생이 흠칫할 만큼 어깨를 들썩들썩 흐느끼며 극장을 나서게 됩니다.
오겡끼데스까아까아까아.... 와따시와 겡끼데스데스데스.....
영화가 너무나 섬세하고 아름다워서, 어쩐지 유리알을 쥔 듯 조마조마한 마음이 들더군요. 도화지같은 설원 위로 피어오르는 입김, 양갈래 머리에 교복 입은 소녀의 하얀 종아리, 펄럭이는 커튼 사이로 책을 읽는 소년의 옆모습, 일렁이는 유리공방의 주황빛 불빛 속에서 입맞추는 남녀, 성에가 낀듯 뽀얀 화면과 서정적인 음악. 영화는 담백하지만 지극히 탐미적이고, 그야말로 mellow합니다. 90년대에 우리나라에 이와이 슌지 신도들이 우후죽순 생겨난 이유를 알겠더군요.
"그 시절은 아름다웠고 나는 너를 사랑했었다"는 첫사랑의 테마, 이를 표방한 수많은 영화의 원류이자 영감이 되었을 영화. 러브레터 속 두명의 후지이 이츠키가 그리는 것은 첫'사랑'보다도 '첫'사랑에 방점을 둔, 몸도 맘도 어리던 시절의 서툰 그 무엇이죠. 태어나서 "사랑한다"는 말을 가족에게밖에 해본 적 없던 시절, 친구에게 느끼는 감정과는 또다른, 배꼽 안쪽이 간질간질하고 어쩐지 안절부절하게 되는, 하지만 그 마음을 들키는 게 부끄러워 정작 상대방을 세모난 눈으로 흘겨볼 수밖에 없었던, 타인의 존재에 대해 느끼는 인생 최초의 '동요'- 그 기억 앞에 무덤덤할 사람이 몇이나 될까요. 그 기억을 뽀얀 화면으로 소환하는 이 영화를, 관객들이 사랑하지 않을 방도가 있었을까요.
그러나 사랑에 관한 영화인줄 알았던 '러브레터'는, 결국 '한때 이 세상에 존재했으나 지금은 사라진 것들'에 대한, 그리고 남은 자들이 그것들을 기억하는 방식에 대한 영화더군요. 죽은 연인, 허물어져 국도가 되어버린 옛 집, 과거가 되어버린 풋사랑. 그것들은 물리적으로 소멸했지만 기억속에 박제되어 그 모습 그대로 남아 있고, 현재를 사는 우리는 영원히 그 아름다웠던 세계들에 대해 회고할 수밖에 없다고, 영화가 이야기하더군요.
정말로 사랑하던 배우들이 죽었을 때(장국영과 히스 레저), 경악에 가까운 슬픔과 함께 느낀 건 '허무'였습니다. 그토록 빛나던 사람들이 한순간에 이 세상에서 자취를 감추는 것을 보며 무서울 정도로 허무했었죠. 헌데 그들이 남긴 필름들을 보면서 아, 잠시나마 이 세상 어딘가에 살다 간 모든 사람들은 그저 영영 존재하는 것이구나, 생각했었어요.
어디 영화배우들만 그럴까요. 우리 모두 이 세상에 약간씩의 추억과 흔적을 남기고 갈 테고, 누군가는 오랜 필름을 돌려보듯 그 기억을 재생할 테니까요. 옛 연인의 어린시절을 붙잡고자 하는 히로코를 위해, 더듬더듬 편지를 써내려가는 이츠키의 손끝처럼.
일본맥주는 무던히도 마시면서 방사능이 무서워서 일본여행은 꺼리던 제게, 오타루는 언젠가 꼭 방문해보고 싶은 도시가 되었습니다. 따뜻한 지역에서 나고 자라 눈과 설원의 이미지에 대한 동경이 큰지라 더욱 그럴 수도 있겠지요. 영화 '러브레터'가 촬영된 시점과 현재에는 20년의 시차가 있으니, 지금 오타루를 여행한다면 영화 속에서처럼 '많이 변해버렸네' 하며 두리번거릴지도 모를 일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