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sooway Apr 01. 2017

장국영과 나

한때 존재했던 빛나는 피사체를 추억함



장국영에 대하여 쓰려고 한다.


내가 그를 처음 알게 된 건 중2에서 중3으로 넘어가던 겨울방학, 동네 비디오가게에서였다. 그때 이미 최신영화 코너와는 거리가 멀었던, 새빨간 케이스에 뽀얀 먼지가 내려앉은 2개들이 <패왕별희> 비디오테이프를, 나는 왜 골라들었던 것인지 지금은 잘 모르겠다. 사람과 영화 사이에도 인연이 존재한다고 믿는 수밖에. 까만 봉다리(!)에 털렁털렁 비디오를 담아 와서는 안방에서 혼자 플레이해 보았던 기억이 난다.


그건 음, 트라우마에 가까운 감동이었다. 그때까지 영화라곤 해리포터와 일본 공포영화밖에 몰랐던 어느 여중생에게, <패왕별희>는 '유희'가 아닌 '예술'로서의 첫 영화였다. 예민한 사춘기 감수성에 한동안 후유증에 시달렸던 것 같다. 몇번이고 영화를 돌려보고 울고 밤잠을 설치기를 반복했다. 그리고 그 영화 안에, 꽃다운 얼굴과 섬세한 손끝을 가진 배우 장국영이 있었다. 뿌연 화면 안에서 그는 이 세상 존재가 아닌 것처럼 아름다웠고 신이 들린 것처럼 연기했으므로, 나는 그에게 반하지 않을 도리가 없었다. 이미 우리 삼촌 세대에서 인기가 사그라든 그 배우를, 나는 뒤늦게 사랑하게 되었다.





그로부터 삼개월쯤 지났을까. 4월의 첫번째 밤, 심야 라디오를 들을 때였다(<이소라의 음악도시>). 평화롭고 다정하게 속삭이던 DJ의 목소리가 갑자기 한껏 떨리기 시작했다. 배우 장국영 씨가 사망하셨다고 하는데요. 이게 무슨 일인지 모르겠네요. DJ가 울먹이기 시작했다. 나는 처음엔 내 귀를 의심했고, 잠시 후 그것이 내가 이제 막 사랑하게 된 배우의 근황이라는 것을 알았다.


신문은 앞다투어 그의 부고 소식을 다뤘고, 방송은 추모특집을 내보냈다. 홍콩에서는 만우절 이후 며칠 사이 몇 명이나 덩달아 뛰어내렸다고 했다. 나는 어안이 벙벙했고, 그를 알게 된지 얼마되지 않아 잃어버린 것이 다소 억울했으며, 가슴이 아주, 아주 많이 아팠다.


기억하건대 그것은 내가 살면서 체감한 최초의 죽음이었다. 가까운 지인 중 누군가 세상을 떠난 경험이 없었기 때문에. 숨쉬고 말하며 빛나던 실체가 한순간에 이 세상에서 자취를 감추는 것을, 나는 그때 처음 목격했던 것이다.




그때부터 나는 청소년기가 끝날 때까지 장국영이 출연했던 모든 영화를 섭렵하기 시작했다. 신화창조신화산! 혹은 지오디짱!을 외치는 친구들 사이에서, 유명을 달리한 한 세대 이전의 배우를 좋아하는 것은 흔한 일은 아니었다. 비디오가게의 구석 코너를 섭렵하며 가게 아저씨의 의아한 표정을 보는 날이 늘어갔다('동방신기'가 데뷔했을 무렵에 '천녀유혼'을 빌려가는 여중생은 내가 봐도 좀 신기할 것 같기는 하다).


그러면서 왕가위 감독을 알게 되었고, <화양연화>와 <중경삼림>과 <해피투게더>를 보게 되었다. 그영화들 속 나른히 움직이는 배우들과 권태로이 흐르는 음악들, 그 영화들이 실어나르는 가슴먹먹한 기분을 즐길 줄 알게 되었다. 양조위를 알게 되었고,  그 역시 멋진 배우라는 것을 알게 되었으며, 그의 출연작 <색,계>를 보다가 탕웨이라는 여배우에 반해서 나의 워너비를 삼기에 이르렀다. 깐느영화제가 세계적인 영화제라는 것을 알게 되었고, 다른 수상작들을 보게 되었다. 부에노스아이레스와 홍콩은 언젠가 꼭 한번 가보고 싶은 도시가 되었다.


한창 취향과 정서가 무럭무럭 자라던 그 때, 온갖 영화들을 와구와구 먹어치우던 그 때, 장국영을 알지 못했다면 어쩌면 나는 아마 아예 다른 취향의 소유자가 되었을지도 모른다.


해피투게더(1997), 덕분에 꼭 가보고 싶은 아르헨티나.




2014년 겨울, 꿈에 그리던 홍콩에 진짜 갈 수 있었다. 그곳은 어지럽고 복잡하며 우아한 곳이었다. 내가 사랑했던 배우, 사랑했던 영화들의 실체를 내 발로 밟아가며, 꾹꾹 만져가며 대면했다.


스타의거리 핸드프린팅 행렬에서 장국영의 손바닥만 찍혀있지 않았다. 그가 살던 동네에 찾아가서 장국영의 영어이름인 'Leslie Cheung'의 집을 물었지만 아무도 알지 못했다. 겨우 찾은 생전 그의 집에는 (당연하게도) 다른 사람이 살고 있었다. 내가 너무 늦게 온 건지, 그냥 원래 세상에 영원한 건 없는 건지 알 수 없었다.


집 앞에 꽃다발을 내려두고 조용히 돌아섰다. 지금은 너무 유명해져버린 영국 여가수의 노래를 귀에 꽂은 채 펑펑 울면서 걸어 내려왔다. 당신같은 사람을 또 찾아낼테니 걱정말라는 가사의 노래. 그 새소리 들리던 조용한 부촌에서 혼잡한 번화가로 스며들 때의 기분을, 지금도 잊을 수 없다.


홍콩 골동품 거리에서 발견한 그의 사진.




장국영 14주기를 하루 앞둔 어제, 재개봉한 영화 <아비정전>을 보았다. 나 말고도 몇 명의 관객들이 함께였다. 30여년 전 홍콩영화를 보기 위해 금요일 밤 번화가의 극장에 숨어든 이들이, 나는 괜히 반갑고 고마웠다.


<아비정전>을 극장 화면으로 볼 수 있어서 여러모로 행운이라고 생각했다. 탈탈탈탈 돌아가는 선풍기에서, 수리진(장만옥)의 얼굴에 달라붙은 머리카락에서, 땀으로 번들거리던 루루(유가령)의 목선에서, 홍콩 뒷골목의 덥고 눅진한 공기가 훅 끼쳐오는 것 같았다. 큰 스크린으로 본 장국영은 몸짓 하나하나가 권태로웠고, 큰 눈은 더욱 공허했다. 중간중간 깔리는 음악들은 낮은 탄성을 지르게 했다. 어린 눈에 무척 섹슈얼하게 느껴졌던 장면, 축구장 매점에서 일하는 수리진에게 아비가 전설의 작업멘트("4월 16일 오후 3시, 너와 나의 1분")를 시전하고 난 후, 두 사람이 연인이 되었음을 나타내듯 침대에 누워있는 대목에서, 클로즈업된 장국영의 얼굴이 입술로 장만옥의 손가락을 무심히 애무하는 장면은 다시 봐도 별거 없이 무지 야했다.


 아 아비정전. 내 청소년기를 장악했던 감수성이 여기 있었다.



그러나 당연하게도 <아비정전>은 중학생 때, 고등학생 때, 그리고 스무살 언저리에서 보았던 것과는 또 다른 느낌이었다. 그건 어느새 내가 필름 속 그들과 비슷한 나이가 되었기 때문일지도 모르겠다. "사촌이 결혼해요"라며 함께 있고 싶다 말하는 수리진이나 "왜 내 번호를 외우려고 노력하지 않냐"며 떼를 쓰는 루루의 모습, 정착을 거부하는 아비에게 특별한 한 사람이 되고 싶은 여인들의 몸짓을, 예전에는 왜 무심히 지나쳤을까. 옛사랑을 잊지 못하는 수리진의 뒷모습을 묵묵히 바라보는 경찰관(유덕화)의 표정이나, 친구의 여자가 장난처럼 선보이는 춤사위에 반해버린 장학우의 세상 바보같은 표정이, 그때는 왜 지금처럼 가슴 아프지 않았을까.


이 쓸쓸하디 쓸쓸한, 쉼없이 엇갈리는 사랑의 먹이사슬에서 최종 포식자인 아비의 다 귀찮다는 표정만을 나는 기억하고 있었다.





너무나 유명한 뒷모습, 거울 앞에서 음악에 맞춰 맘보를 추는 장국영의 모습에 잠시 심장이 내려앉았다. 그건 아마 극장의 모든 사람들이 마찬가지였을 것이다.


<아비정전>의 많은 부분은 장국영의 뒷모습으로 이루어져 있다. 수리진을 향해 축구장 매점으로 들어서는 영화의 맨 첫부분, 양어머니의 기둥서방을 혼쭐내고 돌아서는 뒷모습, 루루에게 귀걸이 한 짝을 던져주고 유유히 사라지는 뒷모습, 필리핀까지 찾아간 친어머니에게 거절당한 후 상처를 숨기기 위해 애써 씩씩하게 걸어가는, 느리게 돌아가는 그 뒷모습.


올해도, 내년에도, 앞으로 오랫동안 나는 이렇게 장국영이라는 배우의 뒷모습을 좇으며 그리워하겠지, 라는 생각이 들었다.





지금은 자취를 감춘 존재가 한때 이 세상에 존재했음을, 지극히 아름다웠음을 기억하는 일은 중요한 것 같다. 남은 사람에게도 말이다.


다행히 그가 남긴 긴 영화들이 있어 마음만 먹으면 언제든 생생히 그를 조우할 수 있다. 그건 예술가에게 주어진 특권임과 동시에, 그 예술가를 사랑하는 이에게 주어진 행운이기도 하다.


감히, 장국영에 대하여 썼다.

한번은 그에 대해서 길게 써보고 싶었다.

내 정서의 기원(起源)이자, 재능있는 아티스트이자,

내가 아는 한 가장 아름다운 피사체.

몇 년이 지난 후에는 어떤 말들로 그를 기리게 될지 모를 일이다.


수많은 영화들을 남겨주어 고맙습니다.

부디 평온하기를.



- 2017. 4. 1. 10:30PM






매거진의 이전글 서로의 빛이 된다는 것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