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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sooway Mar 11. 2021

김윤석 배우님, 그렇게 안 봤는데

미성년 (2019,한국)

*영화 <미성년>여러 요소가 포함되어 있으며 스포일러는 딱히 없습니다.



오랜만이군요, 영화에 대한 글을 쓰는 것도. '퇴근 후 영화관'의 시간들을 잃은 지도 1년이 넘었습니다. 제게 '혼영(혼자 영화보기)'이란 일과 중에 꽉 막혔던 숨통이 트이는 시간이자, (다른 관객과 함께일지언정) 암흑에 푹 파묻혀 온전히 혼자임을 만끽하는 일종의 의식이었는데, 마스크를 쓰고 방역수칙을 준수하고자 신경을 곤두세운 채로는 도저히 예전의 기쁨을 느끼지 못하겠더라고요. 그래서 자연스레 영화를 볼 일도, 영화에 대한 글도 줄었다는 변명을 잠깐 덧붙여보며.


간만에 영화 하나를 소개하려고 합니다. 올 초부터 방구석에서 벌써 세 번을 연거푸 본 영화이자, 벌써 '2021년 수웨이가 꼽은 베스트 무비'에 노미네이트 된 작품이지요. <미성년>. 아마 당신도 배우로 익히 알고 있을, 김윤석 님의 영화감독 데뷔작(겸 출연작)입니다.


제가 이 영화를 소개하는 마음은, 마치 몇 년 전 제가 즐겨 찾았던 동네 단골 짬뽕집을 소개하는 마음과 비슷해요. '짬뽕에 인생을 걸었다'는 가슴 웅장한 플랜카드가 걸려있던 그 가게는, 기가 막힌 국물 맛에도 불구하고 외진 위치 때문인지 부실한 홍보 때문인지 손님이 많지 않았죠. 저는 안타까운 마음으로 이 짬뽕집을 여기저기 소개하고 다녔니다. 이 집 진짜 잘해. 진국이라니까. 나한텐 인생 짬뽕인데, 너도 한 번 맛보면 좋아할 거야. 제가 <미성년>을 바라보는 마음도 다르지 않답니다. 이 사랑스러운 영화가 더욱 널리 사랑았음 좋겠는데, 하는 마음. 이 영화 한번 잡숴봐, 같은 마음.





사실 저는 김윤석 배우가 출연한 영화 별로 좋아하지 않아요. 정확하게 말하면, 그가 출연한 영화 속 세상을 좋아하지 않는 것 같요. 전설의 대사 "4885, 너지?"로 상징되는- 어둠과, 음모와, 폭력과, 온통 스크린을 잠식한 시커먼 남자들과, 수사와 범죄와 감옥 같은 것들 말이지요. 그래서 저는 <미성년>을 보고 난 뒤 적잖은 충격을 받았니다. 아니 이 아저씨(죄송합니..), 이렇게 섬세하고 따숩은 사람이었단 말인가. 이런 맑은 영혼으로 그동안 그런 거친 영화들을 어떻게 찍 건가. "내가 스릴러 안 좋아한다고 했는데 아무도 믿어주지 않았다"는 그의 눈물겨운(..) 인터뷰대로, <미성년>은 마치 '싼 집 찾다가 열받아서 내가 차린 가게'처럼, 영화인 김윤석의 취향과 지향점을 정확히 보여줍니다. 


그러나 김윤석 님의 기존 필모그래피가 풍기는 어두운 기운 <미성년>이라는 어딘가 불건전(?)해 보이는 제,  안타깝게도 관객으로 하여금 이 영화를 다소 오해하게 만들었던 것 같아요.  제 룸메도 '좀.. 스트레스받는 영화일 것 같아서 안 보고 싶었어'라고 말했던 것처럼 말이죠.


사실, 그런 오해가 아예 근거 없는 건 아니에요. 이 영화의 설정 자체는 꽤 자극적이거든요. 불륜 커플의 자녀인 두 여고생이 겪는 이야기. 그러니까  아빠와 쟤네 엄마가 바람을 피우는데, 우리 둘은 같은 학교에 다니는 상황. 게다가 쟤네 엄마는 울 아빠의 아이를 임신했고, 아무것도 모르는 불쌍한 울 엄마는.. 으악! 이쯤 되면 네이트판 같은 데에 올리자마자 '톡커들의 선택' 1위에 랭크될 것 같 장 사연입니다.





그런데요, 제가 이 영화에 크게 반했던 이유는, 이러한 지옥 같은 설정에도 불구하고 신기할 만큼 따뜻하고 산뜻한 영화였기 때문에요. 어른들의 잘못으로 원치 않게 조우하게 된 아이들, 처지도 생각도 너무나 다른 두 소녀가 어떻게 서로를 해하고 위로며 성장하는지. 그와 대비되는 어른들의 모습은 얼마나 철없고 숙하며 비겁한지. 진짜 성숙하지 못한 사람-미성년-은 과연 누구인지. 영화는 말초적인 스토리에 잠식되는 대신 인물들의 마음을 파고들면서,  알 구슬을 꿰듯  섬세하게 이야기를 완성시켜 나갑니다.


그러니까 <미성년>은 인생에 예상치 못한 풍파가 닥쳤을 때 이를 대하는 인간적인 자세, 성숙함, 위엄 같은 것들에 대해 말하는 영화입니다. 그리고 그 방식은 한없이 섬세하고, 유머러스하며, 인간에 대한 애정으로 가득해요.


그래서일까요.   영화를 면서 나는 '예술'과 '예술이 아닌 것'의 차이를 자주 생각했습니다. 저 세상에 범람하는 막장드라마, 혹은 늘 낮에 읽은 커뮤니티 막장 썰과 영화 <미성년>의 차이는 무엇일까. 그건 불륜녀의 머리채를 낚아채는 쾌함 대신, 내 딸과 불륜녀의 딸에게 "밥 사 먹어. 그리고 싸우지 마. 너희가 왜 싸워?" 라 말하는 어떤 의연함 같은 것. 빌런을 처단하는 쾌감 대신 대부분의 등장인물들에게 애정과 연민을 갖게 하는 어떤 사려깊음 같은 것. 손에 땀을 쥐며 몰입하가도 돌아서면 잊고 마는 찰나의 유희 신, 저것이 삶이라면 어떨 한동안 곰곰이 생각하게 하는 여운 같은 것.





배우들 이야기를 하지 않을 수 없겠군요. <미성년>은 여배우들의 영화입니다. 천하의 나쁜 놈이지만 매가리없이(..) 하찮게 다뤄지는 불륜남 아빠 김윤석을 제외하면 모두 여성 캐릭터. 화장기 없는 얼굴로 깊은 마음들을 표현하는 들을 보는 것은, 이 영화가 가진 큰 덕목 중 하나. 누가 알았겠어요, 넷플릭스 오리지널 <킹덤>의 비정한 중전 김혜준 배우가 말간 눈빛 지어보일 거라곤. '남편에게 배신당한 유부녀는 진짜 저런 모습이지 않을까' 을 만큼 땅에 밀착된 연기를 보여주는 염정아 배우  인내하는 얼굴은 어떻고요. 불장난에 빠진 철없는 엄마지만 마침내 그녀를 연민하게 만드는 김소진 배우의 공허한 목소리까 듣다 보면,  영화는 "한국에  연기 잘하는 여배우가 이렇게 많지롱!" 이라고 외치는  같기도 합니다.


그뿐인가요. 영화의 재미를 해칠까 봐 모두 밝힐 수는 없지만, 말도 안 되는 라인업의 배우들이 카메오로 출연해 극에 생동감을 더합니다. 유명세만으로 소비되는 것이 아니라 말 그대로 '떡같이' 활용되는 배우들을 보며, 배우의 가치를 누구보다 잘 아는 감독의 배우 활용법 는 것 같았습니다. 그중에서도 이정은 배우의 강렬한 등장은 가히 씬스틸러의 교과서라 불러도 아깝지 않은 듯한데, 이 장면 당신이 꼭 보셨으면 좋겠. 증맬루..



아무나 깐느 가는 거 아니다 진짜...



유독 좋았던 장면이 있어요. 옳지 않은 사랑에 빠진 엄마에게 딸이 말합니다. "엄마, 내가 엄마를 좀 좋아하게 해 줄 순 없었어?" 이 대사를 듣는 순간, 좀, 울컥한 느낌이 들더라고요.  나의 그늘이자 울타리인 어른들이 사실은 한없이 불완전한 존재임을 깨달았던- 내 인생 어떤 구간들이 떠올랐거든요. 그들을 사랑하지만 더 이상 완벽하다고 기지 못하는 순간들, 그의 실수와 부족함에 실망하고 상처받으며 "아 우리 엄마(아빠)는 왜 저래" 투덜대지만 끝내 그들을 미워하지 못했던 . 사랑하기에 원망하는 그 마음을, 이렇게 잘 표현한 대사 들어본 적 없는 것 같서요.


본에만 5년이 걸렸다던 <미성년>에는 이런 빛나는 간들이 가득합니다. 모든 장면, 모든 대사들이 오랫동안 정성 들여 닦 유리알 같아요.  감칠맛을, 신도 꼭꼭 씹어  음미해 봤으면 좋겠어요.


+) 다만 결말에 대해서는 갑론을박이 있었던 걸로 알고 있는데요. 저도 처음에는 "읭?" 하긴 했니다, '신인감독의 패기'로 해석하니 이해 못할 것도 없더라고요.  오히려 신선한 느낌도 들었고요. 이토록 용감하고 인디적인 엔딩라니! 김윤석 당신랑 사람.. 거장 두뇌와 스무살 영화학도의 심장을 가진 사람...(주접)





말이 길어졌는데요, 결론은 당신이 누구냐에 따라 두 가지 씀을 드릴 수 있을 것 같군요.


우선 이 글을 읽는 당신이 (로또 1등 당첨금을 타러 가던 길에 벼락을 맞을 확률로) 김윤석 님일 경우. 기작을 내주시기 바랍니. '김윤석은 연기가 아니라 영화를 잘하는 거였다'던 누군가의 마따나, 당신이 만들어낼 또 다른 두 시간짜리 소우주가 나는 너무 궁금해요. 재능 있는 영화감독으로서 세상에 더 많은 이야기들을 풀어놓아주기를, 관객 한 사람으로서 간절히 읍소해봅니다.


그리고 김윤석 님이 아니면서 '좋은 영화'를 보고 싶은 누군가에겐, 하고 당당 자세로 이 영화를 합니. 비록 저의 단골 짬뽕집은 수년 전에 결국 문을 닫았<미성년>은 2년 전에 극장에서 내렸지만, 우리에게는 언택트 시대 필수품 OTT 서비스들이 있(왓*에도 있어요) 좋은 영화는 언제 봐도 좋은 법이죠.


아니 일단, 재미가 있다니깐요? 맵고 짜고 기름진데 몸에도 좋은 요리 같다니깐. 나 믿고 이 영화 한번 잡숴봐요. 그러고 나서, 우리 같이 수다 떨요.



- 2021. 1. 22. 9:40PM 우리집 방구석 1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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