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나는 이 일을 사랑하지 않는다.
(첫머리)
카페 소파에 차키를 놓고 와버렸다.
걱정도 안 되더라, 카페에 보관하고 있을 거라
생각했기 때문에. 가져가서 어디쓰겠냐면서.
하지만 지갑을 놓고 온다면,
그 사실을 인지한 순간부터
온몸에 불안감과 자책감이 나를 삼켜버린다.
지갑 안에 얼마가 들었더라..
카드를 함부로 긁으면 어떡하지..?
실수든 자의든 자신의 것을 잃어버리는 것은
자신의 책임이다.
하지만 그와 동시에 지갑을 발견한 사람도
양심과 도의의 양갈래 길에 서게 된다.
그 사람이 나의 것을 돌려줄지 가져갈지
알 수 없다. 유혹의 농도에 따라 취하는 정도는
제각기일테니.
하지만 무사히 돌려주었으면 좋겠다.
그것은 타인의 것이며 잠시 떨어졌을 뿐이라고
생각해 주면 좋겠다.
나의 것들을 내가 놓치더라도
되돌려 놓아주길 바란다.
이내 정신을 차린 내가 곧 회수해 갈 테니까.
(본문)
자진폐업 후,
내 모자란 역량을 깨닫고
다시 서울로 올라가길 희망했다.
잘려나간 내 커리어를 수선해야 했다.
동대구역에서 KTX를 타고
2곳의 회사에 면접도 보러 갔다.
2번째로 면접 본 회사에서는
면접을 보고 얼마 지나지 않아,
‘함께 일하고 싶다’라는 문자를 보내왔다.
인정받은 것 같아서, 기뻤지만 그것도 찰나.
답장을 보내기까지 보류한 시간,
억겁같이 느껴지는 그 시간에 참 많은 일이 있었다.
서울에서 돌아온 지 얼마나 됐다고,
다시 상경한다는 말로
부모님의 속을 헤짚어놓았다.
나는 수시로 부모님이 한 땀 한 땀 올린 도미노를
망가뜨리는 훼방꾼 역할을 톡톡히 했다.
빼짝말라서 사람구실이나 겨우하던
아들을 타지에 보내기 싫은
어머니는 끈질기게 나를 설득했다.
‘다른 일을 찾아보면 어떠니? 공무원이든 뭐든 길이 많잖아.'
그렇다.
우리 집안은 혁신이나 진보에 대한
관용은 없는 편이었다.
나에겐 도전을 위한 도전이 늘 함께했다.
물론 공무원 좋지.
그런데 내가 하고 싶은 일은
어딘가에 소속되어 하루하루 권태로운
반복을 마주하는 삶이 아니었다.
매번 안정보다는 불안정에서 난 피고 졌다.
공무원이 나쁘다 좋다의 개념을 떠나,
내 성향에 맞는 걸 찾는 게 중요했다.
아무리 생각해도 나는 ‘현장체질’이었다.
무대를 세팅하고, 행사를 위해 현장을 통제하며
실수가 하나라도 나면 끝장나는
아슬아슬한 외줄 타기를 몹시 즐겼다.
그래서 난 서울로 가야겠다고
마음을 단단히 굳혔다.
당시에는,
우리나라 광고기획사의 정점에 있는
제일기획에 들어가고 싶었다.
그런데, 학벌이 받쳐주지 못했다.
그래서 대학교를 먼저 다니고
구직을 해야 되는 게 순서였다.
그때 깨달았다.
‘학교에 들어가고 싶진 않은데...?’
그렇다.
나는 이 일을 사랑하지 않는다.
그렇게 결론을 내렸다.
내가 정말 하고 싶은 일이라면,
온갖 역경과 고난을 이겨낼 용기가 나오는데
그렇지 않았다.
참으로 직관적인 선택이었다.
당시에는 MBTI가 유명하지 않을 때라,
내가 극T 성향이라 그런 건지
아니면 돌+I라 불리는 AB형이라 그런 건지,
어떻게 해석할지 모르는 나였다.
그저 직감을 따라갈 뿐.
나는 침대에 누워 곰곰이 생각하며
부모님이 권유하신 공무원에 대해 알아봤다.
당시 공무원 인기는 가히, 대유행 수준이었다.
때마침 주변에도 공무원을 준비하던 친구가 있었다.
그 친구에게 많이 물어보기도 하고,
스마트폰으로 공무원 관련 카페에 들어가서
단기 합격한 사람들의 수기만 주야장천 찾아봤다.
그렇게 나는 내 뇌를 차근차근 속였다.
할 수 있다. 할 수 있다.
내가 합격할 수 있겠다 싶은 직렬을 골라,
관련된 수험서부터 잔뜩 샀다.
차례대로 비닐을 뜯으며 공부했다.
그렇게 난 '공시생'이 되었다.
우선 국어.
우리 아버지는 국어국문학과를 졸업했고,
현재까지도 수필 쓰기를 즐겨하신다.
작년에는 문학대회에서 상도 타셨다.
그래서 그런지, 나는 국어에서 타고난 재능을 느꼈다.
남들이 어렵다고 하는 포인트를 대부분 이해하지 못했다. 어렵지 않았기 때문이다.
타고난 기질이 빛을 발했던 과목이었다.
다음은 한국사.
한국사는 범위가 광범위한 데다가 몹시 지엽적이었다.
아니, 도대체 호우명그릇이 몇 년도에 발견되었는지
왜 알아야 하는 거지..?
물론 역사적으로는 중요한 사실이겠지.
근데 내가 앞으로 수행해야 할 직무와
무슨 연관이 있는 건지 도무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그렇다.
애초에 이 시험은 이해하면 안 되는 것이었다.
치열한 암기싸움이었다.
아무튼 한국사도 끝이 안보이긴 했지만,
조금조금씩 외워지는 게 신기하게 느껴졌다.
대망의 영어.
영어는 30대 중반이 된 아직까지도 잼병이다.
접속사, 전치사, 형용사, 부사...
어려워도 너무 어려웠다.
인강으로 공부하고 있는데,
녹화된 영상 안에는 노량진에서 공부하는
'랜선 공시생 친구들'이 있었다.
강사가 '여기에는 뭐가 들어가야 되죠?' 묻자,
'부사!'라고 친구들이 손쉽게 대답할 때,
난 영어를 접었다.
이거는 도저히 내 노력으로 되는 영역이
아니라고 빠르게 판단했다.
뼈가 으스러질 만큼 뛰더라도
평생 우사인 볼트를 제치지 못한다는 걸 알았다.
나는 또 요령을 찾기 시작했다.
영어를 공인어학성적으로 대체할 수 있는 직렬이나,
올해 채용하는지 안 하는지 알 수도 없는
특채를 바라보기도 했다.
이때 정말 많은 걸 느꼈다.
'계속해서 목표를 낮게 하려면 한도 끝도 없구나.'
밑을 보는 일은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이 시기에 헛헛함을 달래고자
산도 많이 탔다.
등산이 주는 깨달음에도 위안을 얻었다.
'올라가고 있기에 힘든 것이다. 내가 지금 힘든 이유는 올라가고 있기 때문이다.'
생각이 많다 못해 머릿속에서 핵융합 실험을 하고 있는 것 같았다.
공무원 시험은 시간 싸움이었다.
나는 시간을 아끼고자 걸어 다니면서 영단어를 외웠고,
손발톱 깎는 시간이 아까워 손가락을 벌벌 떨면서
손톱을 깎았다.
위기의식이 주는 공포는 몹시 잔인했다.
결국 나는 비닐을 뜯지도 못한 과목의 수험서를
중고나라를 통해 팔게 되었고,
길고 길었던 한 달 보름의 수험생활을 끝냈다.
딱 내 생일에 맞춰 그만두었다.
스스로에게 주는 생일 선물이다라고 생각하며.
내가 지금껏 살아오면서 가장 느리게 흘렀던 시간이었다.
지옥이 있다면 차라리 그곳으로 가고 싶을 만큼. 정말.
나와 맞지 않는 걸 붙잡고 있던 시간이었기에,
그만둠은 온 세상은 희망으로 물들였다.
미뤄뒀던 무한도전도 챙겨보기 시작했다.
나는 그렇게 또 멈춰 섰다.
그리고 3개월 간 대부분의 시간을 침대에 누워
스스로를 지속식물상태에 빠뜨렸다.
시간이라는 개념은 내 심장을
짤순이에 넣고 탈탈 털 듯, 바삐 움직였다.
그렇게 나는 으스러진 채로
못난 아들을 구해달라며
펑펑 울며 부모님께 용서를 구했다.
내 인생에 정답을 제발 좀 알려달라며
하느님과 부처님에게 돌아가며 빌고 또 빌었다.
앉아서 울고만 있기에는 너무나도 젊었다.
호흡이 거칠고, 앞이 안 보일 정도로 깜깜했지만
나는 새로운 살 길을 찾아서 스스로 걸어야만 했다.
내 발걸음에 대의명분이 없어진 지는 이미 오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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