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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우수 Sep 11. 2024

3. 대표를 해봐야 주인의식이 생긴다

(1) 갑과 슈퍼을

(첫머리)

아버지께서는 늘 '세상은 둥글게 살아야 한다’고

말씀하시곤 하셨다.


언젠가의 나는 거친 모서리 하나 없는

완전한 원이었으며,

때 묻지 않은 순백의 도자기 접시였다.

나는 스스로 접시를 바닥에 떨어뜨렸다.

추락하는 둥근 자아, 나의 정체성.


날카롭게 부서진 조각들 중 하나를 집어 들어,

눈에 띄지 않는 깊숙한 곳에 감추었다.


나는 꽤 오랜 시간 동안

깨진 조각들을

입가에 붙이거나

눈가에 얹었다.


어느 순간부터 나의 존재는,

조각난 파편으로 이루어진 형상이 되어 있었다.


파편을 단순히 이어 붙이는 것을 넘어,

나는 그 조각들을 정교하게 새겨나갔다.

불완전함이 오히려 나를 더욱 강렬하게 매료했고,

그 결핍에 온 마음을 쏟았던 나날들.


이윽고 나는 몸을 깊이 웅크려,

자신을 냉장 보관할 채비를 마쳤다.


얼어붙지도,

그렇다고 따스하지도 않은 나의 자아.


파편들 틈새로 미세한 기운이 스민다.

나를 존재하게 하는 혈류의

깊고 어두운 골짜기는 어떻게 닿아야 하나.


그곳에 닿으면 난 둥글어질 수 있을까.


(본문)

예전부터 궁금했다.

너무나도 궁금했다.

'왜 우리나라에는 청소년 파티 문화가 없는거지?'


미국에는 프롬파티(Prom party)라는 게 존재한다.


고등학교 졸업을 앞둔 학생들을 위한 축하 파티이다.


우리나라는 다른 선진국들에 비해,

교육에 대한 관심과 열의가 남다르다.

어린 시절의 순수함이 깃든 8세부터

성인의 문턱에 선 19세에 이르기까지,

아이들은 그 시간 동안 치열한 경쟁과 기대 속에 살아간다.


치열하게 공부했던 아이들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입시'다.

오직 학벌만이 우리의 가난과 결핍을 해결해 줄 것이라 광고한다.

우리나라는 오래전부터 그래왔다.


원하는 대학에 진학하지 못했을 때,

고졸로 학업을 마치고 싶을 때,

거의 완벽하게 불행해진다.


그간 크게 다치지 않고 건강하게 졸업하는 것만으로도

우리는 아주 위대한 과제를 완수한 셈이다.

수업마다 쉬는 시간은 있는데,

정작 졸업을 위한 경쾌한 쉼은 제공되지 않는가.


조금만 천천히 가면 안 되는 것일까.

멈추는 사람은 세상에 설 자격이 없는 것인가.


각자의 지문처럼 서로 닮은 구석 하나 없는

우리의 푸른 청춘은,

마치 기성복처럼 똑같이 재단 되어 왔다.


나는 이런 재미없는 곳에서

재미를 찾아 날뛰기 시작했다.


나의 첫 사업은 매우 순조롭게 흘러가는 듯 보였다.

사업자등록부터 홈페이지 제작, 키워드 설정..

창작의 고통과 결정에 대한 책임으로

나의 뒷골은 늘 뻐근했지만 기대되었다.


나는 사업장의 소재지를

부모님과 함께 살고 있는 집주소로 설정했다.


따로 사무실을 임대해서 하기에는

리스크가 크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수중에 가진 돈도 별로 없었다)


가수들이 정식 음원을 내기 전에,

'데모테이프'를 내놓는 거랑 비슷하다고 여겼다.


사실 좀 창피했다.


회사, 기업, 브랜드의 이미지를 PR 하고 기획하는 일을

하겠다는 사람의 사업장 소재지가 아파트 주소로 되어있으니.


나의 밤낮은 완벽하게 뒤 바뀌었고,

그 과정에서 아버지에게 꾸중도 많이 들었다.

'다른 사람이 일어날 때 일어나고, 잘 때 자라.'

(훗날 알게 되었지만, 깊은 진리가 담긴 말이었다)


나는 태생부터 야행성이었다.

밝은 태양 아래에서는 마치 뜨거운 열기에 녹은 젤리처럼

무기력하게 늘어졌고, 도무지 집중을 할 수가 없었다.


그렇게 새벽 4시, 5시까지

매일매일 홈페이지와 회사소개서를 다듬었다.


가장 처음으로 만든 홈페이지 디자인으로

사업을 홍보하다가, 3일쯤 지나고도 아무 연락을 받지 못하면 늘 처음부터 뒤집어엎었다.


'어떤 게 먹히는 디자인일까?'

'어떻게 해야 사람들에게 관심을 받을 수 있을까?'


도통 답이 나오지 않는 고민들로

떠다니는 주파수를 맞추기 위해 부단히도 고민하고 실행했다.


이 과정에서 깨달은 것이 하나 있다.


알게 모르게 내가 관심 있게 봐오던 것,

자연스럽게 수집했던 정보들이 나를 구성하고 있었다.


효율과는 거리가 굉장히 멀었고, 많은 시간을 뺏어갔지만

그 나름대로의 몫을 해주었다.


지금 당장 무엇인가 내 손에 잡히지 않는다 하더라도

괜찮다. 정말 괜찮다.

미래의 나는 미소 지으며 나를 맞이할 것을 알기에.


홈페이지 디자인을 3개월에 걸쳐 'ver 8'까지

만드는 일은 아주 의미가 없진 않았지만

중요한 것이 아니었다.


중요한 것은 시작하는 그 자체에 있었다.


아무것도 가진 게 없던 나는

'잠재적 클라이언트'를 찾아보기 시작했다.


내가 찾아간 첫 번째 잠재적 클라이언트는

한 호텔의 지배인이었다.


여름을 맞이해서 호텔 주최로

'썸머 페스티벌'을 열어보는 것이 어떻겠냐고 제안했고,

아무도 요구한 적 없는 30페이지 분량의

제안서를 몇 날 며칠 밤을 새 가며 만들었다.


나는 첫 제안을 위해 여름용 셋업 정장도 샀다.

실행에 목마른 청년의 눈동자는 반짝 윤이 났다.

오랜 시간 공들여 닦고 또 닦았기 때문이리라.


확신에 가득 차서 신나게 세상을 끼고 춤추던

과거의 나는 어떻게 그렇게까지 할 수 있었을까 싶다.


결과적으로, 실패로 그쳤지만 난 실망하지 않았다.

잠재적 클라이언트는 내가 상상한 희망일 뿐.


머지않아, 진짜 클라이언트가 나타났다!


규모는 크지 않았지만, 대구의 중심지인 중구 동성로에서

개최하는 페스티벌의 한 부스를 담당하게 되었다.


계약서를 작성하며, 갑과 을이 누구인지 명확히 정했다.

나는 을이었지만, 슈퍼 을이었다.


당시 나와 커뮤니케이션했던 주임도 젊었고,

나 또한 몹시 젊었다.


그가 요구하는 사항에 웬만하면 난 딴지를 걸었고,

내 생각대로 기획하고 실행하는 게 맞다고 우겼다.


관행처럼 흘러가는 것은 너무 싫다.

그런 게 더 재밌는 거 아닌가?

그렇게 해서 더 멋지고 쿨한 게 나오는 것이 아닌가?

시끄럽게 냄비를 꽝꽝 두드렸다.


다음 클라이언트를 만났을 때,

나의 냄비는 볼썽사납게 찌그러졌다.


행사를 위해 붙인 현수막은 행사 중간에

한 귀퉁이가 떨어졌고,

클라이언트가 요구했던 배너의 디자인과 시안은 달라져있었다.

그냥 다 엉망이었다.


끝까지 엉망이었다.

나는 클라이언트를 위한 결과보고서를 엑셀로 작성해서 보냈다.

엑셀에 사진을 얹어서 수치를 기재하고, 그래프를 만들어서 보냈다.

지금 생각해도 몹시 끔찍하다.

(클라이언트 갑질이 너무 심해서 긴장한 걸 수도 있다)


다른 에피소드로 넘어가서,

울산에 위치한 대학의 클라이언트를 만나서

일을 했을 때도, 난 한 소리를 들었다.

'이럴 거 같았으면 위탁업체를 안 썼죠.'


아반떼에 가득 욱여넣은 패잔병 같은 짐을 싣고,

서울에서 대구로 돌아오는 4시간 동안

나는 핸들을 휘어져라 때렸고, 자책하고 울음을 머금었다.


현실은 정말 녹록지 않구나.

나는 고작 몇 년 배운 걸로

나만의 파랑새를 찾으려 했구나.

지름길을 찾은 게 아니라, 줄 없이 번지점프를 한 모양새였다.


그럼에도 나는, 상처를 회복하며 계속 나아가려고 애를 썼다.

경쟁 PT에 참여하기도 했고,

누구나 들으면 알만한 공공기관의 창립기념일 행사 기획과 디렉팅을 맡기도 했다.


어느새 나는 나만의 사무실을 구했고,

디자이너 1명을 고용한 어엿한 대표로 움직이고 있었다.


꽤나 오랜 세월, 나를 힘들게 한 프로젝트가 하나 있었다.

부산에서 진행되는 OO 산후조리원의 오프닝 세리머니 행사였다.


행사 중간에 지역 국회의원이 난입하는

아찔한 순간도 있었지만, 무척이나 순조롭게 끝났고

18일 밖에 주어지지 않았던 클라이언트의 급한 요청도

순조롭게 해낸 능력 있는 사람이었다.


나는 매 순간 진심이었고, 최선을 다했다고 자부한다.


그렇기에, 나는 이 산후조리원에서 떼먹은

돈을 아직도 생생히 기억한다.


행사가 끝나고, 잔금을 받기 위해 세금계산서를 발행해 줬지만

대금은 받지 못했다.

회사 대표번호로 연락하기도 하고, 국선변호사도 찾아가 봤다.

하지만 끝끝내 받지 못했다.


큰 금액은 아니었다.

아주아주 좋은 데스크톱 컴퓨터 1대 정도 살 수 있는 돈이었다.


돈이 중요한 게 아니라, 내 노력이 부정당한 것 같아서

도저히 잠을 이룰 수 없었다.


아버지에게 나의 노력의 대가를 정당하게 받기 위해,

노력 중이지만 스트레스를 너무 받는다고 얘기했다.

아버지는 말씀하셨다.

'니 그 돈을 받을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하나? 바보야. 그냥 배웠다고 생각하고 잊어라.'


거짓말처럼 가슴에 박힌 말뚝이 뽑힌 기분이었다.

그렇게 나는 또 하나의 구멍 난 마음을 매워야 했다.


내가 시작했지만, 내가 끝내고 싶어 했다.

나의 한계가 너무나도 명확했다.

웬만한 대기업 월급쟁이만큼 벌고 있었지만

중요한 건 그딴 게 아니었다.


이렇게 한 달, 1년을 보낸다면

난 앞으로 나가는 게 아니라, 뒤로 백스텝 한다는 것을

누구보다도 소름 끼치게 인지하고 있었다.

마치 저승사자가 나타나 요단강 건너 손짓하는 듯하였다.


그 사이에 정말 많은 과정이 있었지만,

그렇게 나는 1년 6개월간의 사업을 정리했다.

스스로 폐업했고, 혼자서 온전히 그 고통을 견뎠다.


나는 또다시 나의 길을 선택해야 하는

기로에 덩그러니 서서 동태 눈깔을 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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