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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우수 Sep 03. 2024

2. 시멘트 속에서 꽃 피운 통찰

(2) 사무실에 왜 샤워실이 있냐고요.

(첫머리)

권태로움이 계속됐다.

어차피 아는 맛이라고 자평하며

도전의 부재를 당연시 여겼다.


그리고는 이내 잠에 들었다.


자꾸만 내 앞을 가로막는

존재들이 나타나서,

나는 그것을 해결하거나

몹시 빠져나가고 싶어 했다.


꿈인지 현실인지 모호해졌다.

논리와 이성이 뒤틀린 시공간에서

모두가 한 자리를 꿰차고 있었다.


나는 그 모든 존재를 없애거나,

파란(波瀾)에서 빠져나오기 바빴다.


이것은 순수하게 나의 시점이다.

나의 세상에서는 내가 가장 평범하며,

그 외에는 모두 '이상한 사람'이다.


앨리스는 가장 평범한 '나'이다.

나는 '이상한 나라'에 들어와 있다.


눈을 떠보니,

이상(異常)한 곳에서 체류하고 있었다.


다시 눈을 깜빡였더니,

이상(理想)한 곳에서 유영하고 있었다.


그렇구나.

나는 홀과짝에 '二상'을 넘나들며 사는 중임을 인지했다.


(본문)

내가 새롭게 구한 회사는

신논현역에 위치하고 있었다.

오르막길이 매우 가팔라서, 눈이 온 다음날에는

몹시 위험천만한 출근길 등반을 해야만 했다.


도심 한복판에서 아이젠을 신지는 않았지만

내 발걸음은 꽤나 위험을 대변했다.


입사를 위한 인터뷰를 진행하는 날이었다.

11월 초. 겨울이 시작된 계절이었기에

해가 무척 빨리 졌다.


오후 5시 즈음이었던 것 같은데,

무척 깜깜했던 기억이 있다.


'입사하기도 전에 일부러 찾아와 봤던 건물인데,

내가 여기에 입장하다니!'


부푼 마음을 안고 회사 바깥에 있는 초인종을 눌렀다.

그리곤, 2층에 있는 대표실로 면접장소를 안내받았다.


면접 후, 출근날짜를 지정받고

회사문을 열고 나가려는 그때,

대표는 나가려는 나에게 잠시만 기다리라며,

다시 올라가더니 2만원을 들고 내려와

내 손에 쥐어주었다.


첫 인상은 매우 좋았다.

모든게 내 계획대로 되는 것 같았다.


사무실은 주택을 리모델링한 공간이었다.

바닥은 꼭 가정집처럼 장판으로 되어있었고,

부엌의 싱크대와 상부장도 무척 가정집스러웠다.

그렇기에 화장실에 샤워기와 욕조도 남아있었다.


훗날 알게 된 사실이지만,

내가 속한 기획실행팀의 팀장은 밤을 새우며

사무실에서 종종 샤워를 하곤 했다.


그에게 샤워는 종료이자 시작,

마치 컴퓨터의 부팅 버튼 같은 거였다.


정말 다행히도, 나는 그 샤워기와 친해지지 않았다.

써야 하는 순간도 많았지만 이를 악물고 쓰지 않았다.



최소 1년은 버티고 그만두자라는

초심에 큰 금이 갔다.

현실은 냉혹하고 무척이나 아팠다.

최소 내가 있던 강남의 삶은 몹시 그러했다.


나는 '수습기간 동안 월급을 받지 못해도 좋습니다!'

라는 말의 책임을 지게 되었다.


그 회사에 입사하고,

첫 달에는 49만 원을 받았다.

아직까지 잊기 힘든 금액이다.


내가 실제로 근무한 평일만 산정되었고,

수습기간인만큼 실급여보다 70% 적게 산정.


당시 내가 살던 원룸의 월세가 44만 원이었고,

전기, 수도, 가스를 합친다면 '마이너스'가 되는

월급이었다. 딜레마였다.


그럼에도 나는 떳떳했다.

그 말을 헛으로 뱉은 건 아니었기 때문이다.

열정페이를 자처한 건 나였고, 나는 진심으로 일을 사랑했다.


그렇게 나는 빳빳하게 말라갔다.

인생 최저의 몸무게를 찍은 시기였다.

(당시 몸무게는 51kg, 갈비뼈가 보일 정도로 야위었었다)


회사에 근무하는 동안,

보이는 것이 얼마나 대단한지 알게 되었다.


하루는 홈페이지에 구성원 소개 페이지를

업데이트를 해야해서, 사무실 내에 흰 천을 깔고

영상기획팀의 팀장님을 필두로 전 직원이

프로필 사진을 촬영한 적이 있다.


의도와 목적 자체는 몹시 좋았지만,

촬영에 임하는 직원들은 '또 시작이네'라며 불평했다.

영혼 없는 사람들의 모습은

박제되어 웹상에 전시되었다.

정말 멋지다고 생각했던 회사의 한 페이지가

이렇게 하잘것없이 꾸며지는구나 하며 통한했다.


대표는 팀원의 성장이나 내실에는 눈곱만큼도

관심이 없는 사람이었다.

내가 지금까지 만난 최악의 리더였다.


프로필 사진도 어떻게 하면 '간지'가 날지

그것만 주야장천 연구하는 경영학 전공자였다.


엘도라도와 같은 황금도시를 찾아 헤맨 젊은 탐험가가

자신의 짧은 모험경력 중

발견한 번쩍이는 보물상자에는

먹지도 쓰지도 못하는 쓰레기가 가득 진열돼 있었다.


기대가 너무 컸던 탓일까,

여간 실망스럽지 않았다.


그래도 그 회사에서 통찰하는 법을 깨달았다.

일그러진 페르소나로 구성된 2층짜리 건물 안에는

너무 많은 허상이 있었기 때문에,

통찰은 나다움을 잃지 않기 위한 호흡과도 같았다.


영상기획팀의 팀장은

유순하고 조직에 충성을 다하는 사람이었다.

많은 사람들이 영상팀장을 좋아했고,

술자리에서도 빠지지 않고 찾게 되는 편한 사람이었다.


'나는 대표가 우리에게 몹쓸 짓을 한다고 생각해.'

라는 말은 그가 술만 마시면 하는 단골 멘트였다.

일대일로 편한 자리를 가질만한 연령대는

아니었기 때문에, 그와 친해지지는 못했다.


권태로운 하루가 시작된 날.

그는 9시에 나타나지 않았다.


2층에 자리 잡은 영상기획팀으로 올라가

영상팀장이 안 나오는 이유에 대해 물었다.


'우리 팀장, 서울대 나왔다고 했잖아요? 그거 학력 위조래요.'


에...?!


사건의 전말은 이러했다.


영상팀 팀원 한 명이 술을 마시다가,

자연스럽게 지인의 지인과 합석을 하게 되었다.

그분이 서울대 출신이었고, 반가운 마음에


'우리 팀장님도 서울대 출신이에요!'

라는 말을 꺼냈고, 그 후 벌어진 일은 결말과 동일하다.


유령이었던 사람은 그렇게 사라졌다.


적지 않은 연봉을 받았다고 알고 있었기에,

그 사건은 훗날 내가 가질 'My 신념 리스트'에

일정 지분을 차지했다.


그건 뭐냐면,

'부자는 금수저 아니면 사기꾼이다.'라는 것이다.


개천에서 용난다는 말은 어머니아버지 세대에서만

가능했다는 어느 신문의 칼럼처럼,

자수성가를 했다는 사람은 좀처럼 찾기 어려웠다.


뉴스에서는 사업을 한다며 비싼 차를 몰고 다니던

비즈니스맨이 훗날 사설도박으로 돈을 탕진해서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는 보도를 했다.


김제 마늘밭 110억 원 사건,

경남은행 직원의 3000억 원 횡령,

글로벌 파국을 몰고 온 루나 사태...


빛 좋은 개살구가 이리저리 굴러다녔다.


충분히 그릇된 신념일 수 있다.

하지만 글을 쓰는 현재까지의 나에게는 유효하다.


당시 대표는 정말 나쁜 사람이었다.

디자이너 한 명이 일을 하다가,

컨펌을 완료하고 리플릿 1,500부를 인쇄했다.


직장인들은 너무 잘 알겠지만,

꼭 수정할 수 없을 때 오타가 크게 눈에 들어온다.

눈을 씻고 찾아도 안 보이던 오타는

늘 한여름날의 매미처럼 강렬하게 나타나고 사라졌다.


내 기억으로, 인쇄비가 150만 원 이상이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끔찍한 실수였지만, 더 끔찍한 건 대표였다.


'이거 실수한 리플릿, 못쓰게 됐으니까 자비로 메꿔.'


그 디자이너는 얼마 지나지 않아,

그 길로 회사를 관뒀다.


내가 서울에서 배운 거라곤,

배틀로얄 같은 서바이벌 영화의 실사화였다.


직원은 실수할 수 있고, 일정 부분 책임을 질 수 있다고 본다.

나는 그렇게 늘 중도의 길을 걸어왔지만,

이건 누가 봐도 아니었다.


나도 이 회사에 다니며 참 실수를 많이 했다.

야근 후, 택시 타려고 들고온 법인카드를 강남 한복판에서 잃어버린 일.

초보운전 시절, 탕비실을 채우기 위해 빌렸던 직장선배의 차를 내리막길에서 중립기어로 범퍼를 박살냈던 일 등...


그럼에도, 대표는 책임을 지는 자리가 아닌가?

책임을 지지 않는다면 저 작자는 무엇을 하는 사람인가?


또 하나 다짐했다.

내가 대표가 된다면 적어도

저런 양아치 같은 짓은 하지 않아야겠다고 말이다.


참 열심히 일하던 직원이 있었다.

그 직원은 직장에 권태와 혐오를 느껴

퇴사를 결심했고, 1년을 채우고자 나름의

다짐을 하고 회사에 통보했다.


대표는 재무를 맡고 있던 재무실장에게

이렇게 말했다고 전해진다.

'1년 되기 전에 잘라야 퇴직금을 안 주지.'


파랑새를 찾아 서울까지 온 나에게,

부모님은 일만 해서 큰 풍운의 꿈을 안은 아들을

이해하지 못한다며, 면박을 줬던 그 아들은

닭똥 같은 눈물을 흘리며 세상에 무릎 꿇고 말았다.


얼마 지나지 않아, 난 다시 대구로 내려왔다.


내 꿈은 '파티플래너'였다.


대구에는 파티 시장이 형성되지 않았고,

나는 이것을 블루오션의 기회로 인식했다.

신박한 기획들로 잿빛으로 가득 찬 대구를

정말로 '컬러풀'하게 만들고 싶었다.

(당시 대구의 슬로건은 컬러풀 대구였다)


그렇게 일사천리로 사업자등록까지 마쳤다.

노트북 하나로 시작했던 사업은

웬만한 직장인 월급보다는 훨씬 나은 수준까지 올라왔다.


하지만 또 한 번 씁쓸한 결말을 맛보았다.



그렇다.

대구에는 큰 기업도,

회사도 많이 없다는 걸 알면서도

헛된 희망을 품었다.


똥인지 된장인지 꼭 찍어먹어 봐야만 성에 찼다.


'무식한만큼 용감하다'를 몸소 실천하고야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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