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정어휘> & <어른의 어휘력> 유선경
예전보다 감정 표현에 박해진 느낌을 받는다. 특히 일터에서 '감정적이다'라는 평가는 부정적으로 해석된다. 감정을 세심히 들여다보고 어떤 단어를 붙일지 생각해 보는 기회를 갖지 못한 탓일까, 요즘 나오는 감탄사는 '대박'이 전부라서 당황스러울 때가 있다. 좋을 때, 당황했을 때, 놀라울 때, 화가 날 때 모두 '대박'이나 기껏해야 '짜증 나' 정도로 얼버무린다. 이름을 불러주어야 나에게 온다는 시구처럼 감정에도 알맞은 이름을 붙여야 나의 상태를 정확히 알아줄 수 있다는 것을 새로이 배웠다. 지금 느끼는 감정도 모르면서 자꾸만 다른 외적인 것에서 나를 찾고자 했다면 쓸 수 있는 감정 어휘의 수를 늘리는 시도를 해보면 어떨까?
기억이나 회상에서 감정이 시작된다. 기억이나 회상이 과거의 것이라는 인지는 잘못되었다. 기억은 ‘이전의 인상이나 경험을 의식 속에 간직하거나 도로 생각해냄’이고 회상은 ‘지난 일을 돌이켜 생각함’이다. 그 시점은 언제나 바로 지금이다. 기억이나 회상은 지난 일에 대한 현재의 감정이다. 우리의 뇌에 과거나 미래는 없어서 지금 생각하는 모든 것을 현재 벌어지는 일로 인식한다. 게다가 현재란 늘 바뀌기에 돌이킬 수 없는 과거에 대한 감정이 그때마다 달라질 수 있다. (중략) 중요한 것은 ‘나의’이다. 나의 꽃, 나의 감정, 나의 느낌, 나의 기억……. 그것들이 ‘나’라는, 세상에 하나뿐인 개별성과 주체성, 고유성을 만든다.
껍데기를 쓰면 안전하다 하면서도 퇴화되기를 바라는 이유, 그 안에서 ‘나의 꽃’이 생기 없이 시들어가고 있어서이다. 더 크고 단단한 껍데기로 갈아탈수록 상처받는 일이 줄어들지만 기쁨도 줄어든다. 다양한 감정이 납작하게 눌린 파이 같아서 한 겹 한 겹의 감정을 체감하지 못한다.
감정 어휘를 익혀야 하는 이유는 또 있다. 아이러니하지만 감정을 잘 조절하기 위해서,라고 한다. '감정적이다'라는 말을 부정적으로 해석하는 이유가 무엇일까? 아마도 감정을 조절해내지 못하고 표출한다는 의미일 것이다. '감정적이다'의 반대 표현으로 '이성적이다' 대신, '감정 조절을 잘한다'라고 쓰는 것도 같은 이유라고 생각한다. 책에 따르면 감정을 잘 조절한다는 것은 '자극과 반응 사이에 공간이 있음, <빅터프랭클, 죽음의 수용소에서- 인용>'을 알아내는 것이라고 했다. 그러자면 내가 느끼는 이 감정의 이름이 무엇이고, 출처가 어디인지 명확히 알아야 한다는 것이다.
감정을 조절한다는 것은 잘 참고 잘 억누르고 잘 없애는 것이 아니며 반대로 잘 분출하는 것도 아니다. 감정을 조절한다는 것은 외부나 내부의 자극과 나의 반응 사이에 ‘생각’을 넣을 수 있는 것이다. 즉각적으로 좋거나 편하면 받아들이고 싫거나 힘들면 회피하는 식이 아니라 자신에게 닥친 감정의 실체를 정확하게 인지하고 감정을 유발한 원인을 분석해서 어떤 감정인지 할 수 있는 한 세부적이고 정확하게 이름을 붙여 표현하는 것이다.
꼭 그런 순서는 아니었지만 내가 읽어 해석하기로 감정을 잘 읽어주어야 하는 마지막 이유는 역시 '행복한 현재'를 위해서라고 생각한다. 인간이란 어리석어서, 좋은 일이 있으면 나쁘게 될 것을 불안해하고 나쁜 일이 있으면 자기를 비하하느라 더욱 깊은 비탄에 빠진다. 남이 나를 알아주어도 그 인정이 진짜인가 의심하며 곤혹스러울 때가 있고, 알아주지 않으면 '자존'이 채워지지 않는다며 서글퍼한다. 그 순간 느끼는 감정을 정확히 인지하여 충분히 향유할 수 있다면 그것이야말로 행복한 현재를 사는 방법이 아닐까.
옛날에 징검다리는 마을 사람들이 오며 가며 저마다 큼지막한 돌을 한 개씩 들고 와서 하천에 한 발 보폭 사이로 놓아 오랜 시간에 걸쳐 천천히 만들어졌다. 덕분에 다음에 오는 사람이 수월하게 건널 수 있었다. 마을을 내 마음으로, 징검다리를 기쁨으로, 마을 사람들을 그때마다의 나라고 상상해 보자. 기쁨은 생이라는 고해에 놓인 징검다리다. 덕분에 다음에 올 내가 수월하게 건널 수 있다. 사람에게 한 번 일어난 일은 결코 사라지지 않는다. 기쁨 또한 그러하다. 우리는 기쁨을 징검다리 삼아 생을 건넌다. 기쁨이 설령 공포로 뒤바뀐다 해도 과거에 놓은 징검다리가 무너지는 것은 아니다. 징검다리를 무너뜨리는 것은 언제나 나 자신, 정확히는 나의 감정이다.
<감정 어휘> 책에서는 감정을 오감으로 다룬다. 작가는 '감정'을 "외부의 자극과 내부의 자극에 대해 마음이 일으키는 반응"이라고 풀었기 때문이다. 내게 오는 자극을 느끼는 경로가 바로 '감각'이기 때문이다. 바라보면서도 어쩌지 못해 안타까운 상황을 목도한 적이 있다면, "마음이 시리다"라고 쓴다. 시린 것은 통각 (+촉각)이다. '이가 시리다'와 같이 차갑다고 쓰기에는 딱 맞지 않고 시큰하고 아픈 감각을 포함한다. 그러고 보니 감각에서 유래한 감정 표현이 꽤 많다. 아늑하다, 씁쓸하다, 역겹다, 다습다.. 일상에서 충분히 느꼈을 법 한 감각들과 더불어 나의 감정을 읽어주는 어휘를 배울 수 있는 좋은 기회가 될 것이다.
유선경 작가님이 쓰신 다른 책 <어른의 어휘력>을 같이 읽으면 더도 덜도 아니하고 꼭 알맞은 단어를 골라내는 기쁨을 한층 더 느낄 수 있게 될지도 모른다. 요즘은 무슨 글만 쓰면 '중학생 수준'으로 쓰라고 하는데, 중학생을 너무 무시한 처사가 아닌가 싶다. 사실 '쉽게 쓰라'는 조언은 자기 생각을 명확하게 표현하지 않고 부러 현학적으로 돌려 말하지 말라는 뜻인데 괜한 우리말 어휘만 핀잔을 당하는 경우가 허다하다. 중학생의 어휘력은 생각보다 탄탄하고, 성인이라면 모름지기 알아야 할 어휘의 범주가 있는 법이다. 외람되지만 책을 읽어도 남는 것이 없는 이유 중에는 말 그대로 '읽기만' 한 경우도 한 자리 차지하지 않을까 의심하고 있다. -한글은 표음문자이므로 '읽기 능력'과 '실질적으로 해석할 수 있는 능력(=문해력)'이 명확히 구분된다.- 2023년 목표를 '제대로 된 독서'로 잡으신 분들께 슬쩍 권하며, 살짝 쭈그러드는 마음으로 '아주 술술 읽히는 책은 아닐 수 있음'이라고 메모를 달아둔다.
덧붙이는 노트. <감정어휘> 속에 작가님이 마음에 들지 않는 책을 읽다가 내동댕이치고 발로 밟아 구겨가며 약속을 하였기에 꾸역꾸역 읽었다고 쓰신 일화가 있다. 나도 마음에 들지 않는다며 갖은 불평을 다 한 책은 있지만 '내동댕이치고 발로 밟아 구기'지는 않았으니, 내 쪽이 덜 까다로운 것 같아 상당히 자족했다. + 작가님은 글을 너무 잘 쓰시고, 특히 <어른의 어휘력>에 열거한 단어 중에 모르는 것이 많아 한 페이지 넘겨갈수록 기가 죽었다. 그렇지만 나는 약사이고, 저분은 무려 '라디오 작가' - 비주얼 없이 대본이 열일하는-인데! 라며 자존도 챙겼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