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체리토마토파이>, 베로니크 드 뷔르
유시민 작가님은 <어떻게 살 것인가>에서 “어떻게 살 것인지에 대한 물음은 필연적으로 어떻게 죽을 것인지에 대한 고민을 동반한다”는 의미의 말씀을 하신 적이 있다. 그 책을 읽을 당시만 해도 내게 죽음이란 ‘선대의 것’이었기에 잠깐 고개를 주억거리고 말았다. 한 끗 차이를 두고 굳이 선을 긋자면, 역시 내 나이에 ‘어떻게 살 것인가’를 묻는다면 죽음보다는 나이 듦이 더 현실적인 고민이다. 그러다 만난 책이 <체리토마토파이>였다. 한국과 비교할 때 꽤나 넉넉해진 저녁시간에 새로운 즐거움을 준 (그렇지만 무려 데뷔한 지 15년이 지났다는) 웬 아이돌의 꼰대짓을 한참 보다가 저 친구는 몇 살이지 찾아보니 91년생이다. 순간 정신이 번쩍 났다. 예의 같은 거 따질 꼰대짓은 91년생의 몫이고 나는 한 발 물러서서 포용력을 갖추어야 할 나이가 된 것일까?
아흔 살 잔 할머니의 일기를 또박또박 읽었다. 가끔 소설이라고 하면 뭉텅이로 뛰어넘고 싶은 욕구가 올라오기도 하는데 이 책은 그렇지 않다. 내가 유독 인물을 글자가 아닌 ‘사람’으로 대하기 때문인지도 모르지만. 병원약사로 일하면서 약봉투와 원내 의무기록사이를 오가며 약을 검수할 때, 나는 고집스레 환자를 번호가 아닌 이름으로 불렀다. 중환자실에 오래 계시던 분인데 어느 날 연속으로 약이 보이지 않으면 걱정이 될 지경이었다. 이 일기를 보는 내 모습에서 그런 나를 또 읽었다. 대개는 연달아 쓰셨는데 몸이 좋지 않다고 쓴 후에는 이틀씩 날짜가 비어있지 않은가. 그러면 실재하는 분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책이 아직 절반이나 남아있다며 안도하곤 했다. 쫄깃한 서스펜스가 아니어도 이만하면 나를 글자에 붙들어두기에 충분한 긴장감이다.
나머지는 관리가 잘 된 편이다. 아니, 착각인지는 몰라도 나 스스로는 자세가 곧고 발목이 가늘다고 생각한다. 지팡이를 자주 쓰게 되긴 했지만 여전히 걸음이 빠르고, 전화 통화를 하면 아직도 젊은 여자 목소리 같다는 말을 종종 듣는다. 얼굴은 세월의 풍파에 쪼글쪼글 구겨졌지만 그래도 나는 아직 안색이 좋고 눈의 총기가 꺼지지 않았다. 특히 백포도주나 크레망을 한 잔 들이켜면 안광부터 달라진다.
이 할머니는 또 귀엽기도 하다. 이만하면 봐줄 만하다며 거울에 이리저리 둘러보는 할머니를 떠올리게 만든다. 티타임에 오랜만에 남자가 온다며 오랜만에 분을 바르고 입술도 칠한다. 딸이랑 신경전을 벌이는 대목에서는 엄마와 딸의 오랜 관계를 생각하게 된다. “걔는 내가 먹는 쌀이 너무 둥글고 내가 쓰는 식초가 너무 시다고 한다. 자기도 오랫동안 불평 없이 잘만 먹어놓고서. 생각을 그렇게 하니까 맛이 다르게 느껴지는 거지.” 이런 궁싯거림 같은 것에서.
일기장이 넘어갈수록 주변 사람이 하나둘 떠나고 남겨지는 마음을 쓴 글들이 애잔하다. 역시 사람은 어울려사는 동물이라 관계에 영향을 많이 받는 것일까. 가끔은 귀찮고, 가끔은 설레며 하루하루를 맞이하다가도 그만 쓸모없는 노인이라거나, 겨울에는 노인들이 죽기 좋은 달이라거나, 장례식에 성가대신 록음악을 튼다는 기사를 읽을 때 깊이 가라앉는 마음을 느낄 수 있다.
희한하게도 세월이 갈수록 죽음 앞에서 초연해진다. 심지어 가장 사랑했던 사람들의 죽음조차 그렇다. 사별도 많이 겪어보면 익숙해지는 걸까. 추억에 눈물이 나고 가슴속에는 고독이 점점 더 두텁게 한 겹 한 겹 깔린다. 고독이 우리를 에워싸고 세상과 괴리시킨다. 우리는 마치 두 갈래 강 사이에 사는 것 같다. 산 자들의 강이 한 갈래, 죽은 자들의 강이 또 한 갈래. 어쩌면 떠나간 사람은 그렇게 멀리 가지 않았는지도 모른다. 그 사람은 완전히 사라진 게 아니다. 저 멀리 어딘가에 그 사람이 있는 것 같은데 아주 멀지만은 않은지도 모른다. 우리도 차례가 오면 그 사람에게로 갈 것이다. 그래서 죽을 날이 가까운 만큼 사별은 덜 슬픈지도 모르겠다. 우리도 진즉에 그 길에 들어섰고 그 사람은 단지 조금 앞서갔을 뿐이기에.
나는 쪼그라든 말, 뒤틀리고 무너져 내린 언어를 듣고 싶지 않다. 쭈뼛쭈뼛 나를 힘들게 하면서 끝날 줄 모르는 이야기가 싫다. 상처도, 고통도, 의존적인 삶도 더는 알고 싶지 않다. 그래서 오랫동안 함께 걸어온 이 길에서, 나는 뒤돌아선다. 나는 동생과 내가 출발한 그곳으로 돌아간다. 예전의 시간으로, 흐르는 세월이 아프지 않았던 때로.
우리 엄마는 어떻게 나이 드실까 솔직히 겁이 난다. 오래 살기 때문에 유병률이 더 높아진 몹쓸 병은 생각도 하기 싫으니 머릿속에서 몰아내버리더라도 쇠락하는 육체를 지탱할 자식이 옆에 있어야 하는데 만리타국에 나와있으니 괜히 마음만 복닥 인다. 그런 걱정은 잠깐 미뤄두고 내 생각을 하노라면, 내가 벌써 늙어버리면 곤란하지 하고 도리질을 친다. <아티스트웨이>에서는 일단, 무엇이라도 시작해 보라 독려하면서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그 나이가 된다”고는 했지만 사실 우리 모두 알고 있지 않은가. 특정 나이가 되어버리면 시작할 수 있는 일들에 한계가 있다는 것도 말이다. 그리하여 내가 가장 잘할 수 있고 매일 해도 질리지 않으며 늙어가는 나를 직시하게 도와주고 가끔은 조금이라도 나은 모습으로 늙을 수 있게 해주는 일을 하기로 했다. 잔 할머니의 십자말풀이처럼. 나를 아는 분들이라면 짐작하고도 남음이 있을 것이다.
기. 록. 하. 기.
본래도 일기를 썼지만 더 솔직하고 더 가감 없이 매일의 기록을 남겨보리라 마음먹었다. 나 죽고 나서 누가 볼까 걱정하지 않는다. 어쩌든 나는 알지도 못할 텐데 뭐. 지금의 불안, 설렘, 홀가분함, 시기, 질투, 화남을 숨기지 않고 써야겠다. 나중에는 내가 죽으면 어떻게 하고 싶은지까지 써두어야지. 암만 내가 모른다고 해도 자기들 멋대로 나의 죽음을 취급하게 만들기는 싫으니까.
이 모든 일이 거의 60년 전이라는 생각을 할 때면 나는 현기증이 나고 머리가 어질어질하다. 어떤 추억들은 쉬이 떠오르지 않는다. 옛날에는 그렇게 가까웠던 사람들의 얼굴이 이제 잘 기억나지 않는다. 심지어 우리 어머니 아버지 얼굴도 희미해져 가고 목소리도 생각이 날 듯 말 듯하다. 나의 청춘이 흐려지고 색이 바랜다. 나의 지난날은 물이 쏟아진 수채화 같다. 그렇게 어떤 이름이 나에게서 도망가고 어떤 추억이 사라진다. 어떤 날짜, 어떤 나이... 바로 이런 순간에 세월의 무게가 여실히 느껴진다. 부모님, 삼촌, 이모, 사촌, 옛날 친구가 그립다. 이제 나에게는 아무도 없다. 어떤 이미지, 어떤 이름, 어떤 말, 어떤 장소를 나에게 확인시켜 줄 수 있는 사람이 없다.. "너도 기억나니?"라고 물어볼 수 있는 사람이 없다. 나 홀로 이 보잘것없는 기억력, 누렇게 변한 사진들을 붙잡고 있다. 망각과 함께 나 홀로 남았다.
일기 형태의 아기자기함이 더 깊은 생각으로 이끌어줄 수 있다는 것을 처음 알았다. 우리는 이 땅에 태어난 것만으로도 거창하며, 특별함을 이루지 않더라도 하루를 빼곡히 채워가는 사람들이 있다는 것을 또 이렇게 환기한다. 생의 마지막 순간까지 멈추지 않은 기록 -비록 허구이나-을 보듬다 나에게 주어진 매일에 행복하기로 선택야지 다짐했다. 그것이 이 골디락스 행성에 '운명처럼 거창하게' 태어난 소명인지도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