게으른 완벽주의자를 위한 심리학/헤이든 핀치
어영부영하는 사이 벌써 3월이라며 화들짝 놀라신 분들이 계셨는지 모르겠다. 연말이 되면 내년에는 다르리라 기대하며 회고도 하고 계획도 세워보지만 처음 마음은 온데간데없이 계획은 세웠으되 실행은 차일피일 미루는 자신에게 실망하고 계시다면, 이 책이 도움이 될지도 모른다.
<게으른 완벽주의자의 심리학>이라는 매력적인 제목의 책을 쓴 저자는 임상심리전문가 헤이든 핀치 박사이다. 현재는 임상 심리 클리닉을 운영하며 온갖 미루기 문제를 가진 사람들을 비롯 포함하여 정신 건강에 어려움을 겪는 환자를 돕고 있다고 한다.
이 책의 장점은 임상심리전문가답게 쉬운 용어로 쾌활하게 질러가는 방식을 활용하여 책장이 아주 쉽게 넘어간다는 것이다. 반면, 정신 건강상의 문제이기 때문에 심각한 경우 어차피 전문가의 진료를 요할 수밖에 없어 ‘병리적인 증상이 없어 굳이 임상심리전문가를 만나지 않는다면 미루기 문제를 해결하기 요원한 걸까’라는, 해결이 되다 만 듯한 느낌을 받을 수 있다는 것이 단점이다. 혹시 구입하여 읽으실 분께서는 참고하시면 좋겠다.
미루기 procrastination라는 단어는 라틴어 ‘pro 지지하는’와 ‘cras-tinus 내일의’의 합성어에서 유래한다. 일반적으로는 상황이 악화할 것을 알면서도 과업이나 결정을 미루는 행위를 의미하며, 조금 더 정확히는 실행하려고 의도했던 과업을 미루는 행위를 말한다.
아마도 ‘미루기’에는 procrastination이라는 단어를 쓰고, 다음 문장의 ‘미루는 행위’에서는 delay와 같은 동사를 썼을 것인데 국문으로 번역할 때 같은 단어를 사용하여 묘하게 동어반복의 느낌을 준다. 그러거나 말거나, 미루기는 해야 할 할 일 또는 하고자 하는 일을 제 때 처리하지 않고 (다분히 의도적으로) 지연시키는 상태를 말한다. 저자는 한 발 더 나아가 이를 ‘어떤 일을 하려 했지만 미루고만 있는’ 수동적 미루기와 ‘압박감을 느껴야 능률이 더 오른다’는 믿음으로 기한까지 일을 시작하지 않는 ‘능동적 미루기’로 나누었다. 그런데 능동적 미루기 역시 막연히 하기 싫은 마음에서 비롯하는 경우가 많아 해결책은 결국 같지 않을까 생각했다.
좀 미루더라도 결국에 해내기만 한다면 크게 문제가 되지는 않을 것이다. 그러나 만약 미루는 자신을 보며 비하하거나, 자괴감에 빠진다면 그때는 문제가 된다. 또, 미루기가 습관으로 굳어지거나, 미룸이 계속되어 사소한 손해를 넘어 인생의 중대한 기회를 날려버리게 된다면 그것은 심각한 문제다.
단순하게 말하자면 뇌가 ‘즉각적인 만족감’을 추구하기 때문이라고 한다. ‘즉각적인 만족감을 추구하는’ 뇌가 자꾸 미루기를 선택하는 이유가 반드시 개인의 자제력, 시간 관리 능력, 체계적으로 정리하는 능력에 문제가 있어서는 아니라는 점이 중요하다. (물론 이런 것들도 원인일 수 있다.)
저자에 따르면 미루기는 심리적인 문제일 수도 있기 때문이다. 흔히 오르내리는 질환은 'ADHD(주의력 결핍 과잉 행동 장애)'이다. 질환 이름에서 알 수 있듯, 만족 지연 능력이 떨어지고 특정 과업에 집중하는 능력도 낮기 때문에 일을 자주 미룬다. '불안장애' 환자는 불확실성에서 오는 불안함 (일을 일단 해버리고 난 후 실패할지도 모르는 불안) 때문에, '우울증' 환자의 경우는 일을 시작할 에너지 자체가 부족하여 미루기를 택한다.
사람들은 ‘자존감 self esteem’과 ‘자신감 self-confidence’을 혼용하곤 하는데, 사실 두 단어의 정의는 적어도 심리학에서는 다르다. 자존감은 자신에 대해 긍정적 혹은 부정적 태도를 지녔는지, 자신을 좋게 생각하는지 나쁘게 생각하는지를 의미한다. 자존감이 높은 사람은 자신을 존중하고 스스로 가치 있다고 느끼며, 동시에 완벽하지 않음을 인정한다. 반면 자존감이 낮은 사람은 자신의 약점에 집중하며 스스로 가치가 없거나 부족하다고 느낀다. (중략) 자존감이 자신에 대한 평가라면 자신감은 내가 잘할 수 있다는 믿음이다.
낮은 자존감과 자신감이 초래한 미루기는 우리가 좇고자 하는 기회를 제한한다. 비정상적인 관계는 너무 오래 유지하고, 진급이나 성장의 기회를 포기하게 만든다. 주변 사람도 힘들기는 매한가지다. 당신이 성공하는 모습을 보지 못하고, 간혹 당신이 스스로 할 자신이 없는 일을 대신해주기 위해 나서야 할 때도 있다. 결국 당신은 굉장히 얕은 삶을 살면서 스스로 이 정도 자격밖에 없다거나 이게 최선이라고 생각한다.
의외로 '완벽주의자'들도 미룬다. 결과물이 완벽하지 않을 것을 걱정해서다. '가면 증후군' 환자도 종종 미루기를 택하는데, 자신의 잠재력을 부정하고 기회를 잡지 않는 형태의 미루기가 나타난다고 한다. 또, 가면증후군 환자는 자신의 능력을 끝없이 의심하는 특성을 지녀, 자신의 무능과 결점, 실수에 너무 집중한 나머지 완벽주의자의 성향까지 보인다고 했다.
사족이지만 나는 ‘가면 증후군 imposter syndrome’에 살짝 의구심이 있다. 자신의 능력을 의심하여 무능과 결점을 크게 보는 사람은 그 존재적 특성상 평생 본인이 ‘가면 증후군’이라는 사실을 알게 될 리가 없으므로, 책을 읽으면서 혹시 ‘내가 가면 증후군일까’ 걱정한다면 그럴 리 없다고 해야 할까? 그렇다면 진실로 ‘가면 증후군’을 지닌 사람은 이 책을 읽어도 자신의 방법을 찾지 못할 수 있겠다. (정직하게 말하면 ‘가면증후군’을 다룬 다른 모든 책에 대해 그렇게 생각한다.)
가장 먼저 선행되어야 할 것은 ‘체력 갖추기’이다. 일을 시작하고 집중력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기초체력이 필요하다. 저자는 “피로나 허기, 영양부족은 집중력을 저해한다. 충분히 자고, 운동하고, 건강한 음식을 섭취해 당신의 뇌가 따라올 수 있는 환경을 조성하자”라고 말한다.
그다음으로는 '자존감'을 돌봐야 한다. 자신에 대해 긍정적인 자아상을 가지고, 해낼 수 있다는 믿음을 충분히 주며, 실패해도 괜찮다고 다독여야 한다. 자존감이 낮은 사람은 결과를 지레 두려워하여 시작 자체를 망설이기 때문이다.
미루는 행위의 근본적인 원인은 과업이나 결정의 회피에 있다. 과업은 (혹은 결정을 내리는 일은) 단조롭고, 어렵고, 불편하고, 혼란스럽고, 막연하고, 막막하기 때문이다. 즉, 불편한 감정을 일으키기 때문이다. 사실 미루기는 과업 자체를 회피한다기보다는 불편한 감정을 회피하는 것에 더 가깝다. - 불안장애가 있는 사람들이 가장 많이 피하는 대상은 불확실성이다. 아무런 행동도 취하지 않고 아무것도 바꾸지 않음으로써 이들은 불확실성을 제거하고 불안감을 줄인다. 회피는 우울증에서도 흔하게 나타난다, 현재 상태를 유지하면 에너지를 아낄 수 있고, 결단을 내리지 않으면 후회할 가능성을 낮출 수 있기 때문이다.
불안'장애’는 아니지만 충분한 불안증을 갖춘 나도 ‘불확실성’이 극도로 싫어 미루고 미루는 것들이 꽤 있다. 그 안으로 파고들어 보면 아마도 실패할지도 모른다는 걱정이 있을 것이고, 그것은 낮은 자존감과 같은 이름이지 않을까 싶다. 일을 저지르고 나면 후회할지도 모른다며 끊임없이 나를 괴롭히는 부정적인 대화에 홀릴 때가 많은데, 책에서도 부정적인 대화를 과감히 끊고 지금의 내 결정이 최선이라는 자세를 가지라고 지적했다.
그다음부터는 구체적이다. 그 일 (또는 결정)을 ‘왜’ 해야 하는지 명확히 하고, 일의 범위를 결정하며, 일의 단계를 작은 덩어리로 쪼개라는 것이다. 특히 큰 목표를 작은 덩어리로 쪼개면 집중력도 유지될뿐더러 단계마다 소소한 성취감도 이룰 수 있다. 쉬운 것부터 시작하라는 것도 같은 맥락의 조언이나 이건 사람에 따라 달라질 수 있을 것 같다. 기한이 있는 일은 기한에서부터 역산하여 타임라인을 만들면 된다. 프로젝트 매니지먼트 경험이 있는 사람은 금세 알 것이다. 이때 초반에 역량을 집중할 것인지, 후반에 총력을 기울여 마무리를 할 것인지도 개인의 성향에 따라 달라질 수 있다. 몇 년 전쯤 <로켓스타트 시간관리법>이라는 책을 읽었는데 이 책은 초반에 역량을 집중하여 기한보다 앞서 끝낼 것을 (로켓 스타트) 권했다. 개인적으로도 막판에 몰리는 것보다는 초반에 집중하여 끌어가는 편을 선호하기는 한다. 기한보다 일찍 끝내면 수정할 기회가 생겨 실패할 확률이 적어진다는 점도 이득이다. (aka 불안증)
나는 미루기는 해도 집중을 못하지는 않는 편이라, ‘일단 시작’ 하는 전략이 적합하다고 생각한다. 이 또한 사람마다 다를 것이니 2023년 계획을 아직도 시작하지 못하셨다면! 객관성 렌즈를 장착하고 책을 읽어보시기를. 자신과 비슷한 사례를 찾기만 해도 도움이 될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