밥 한번 먹자
말에는 무게가 있다.
어떤 말은 가만히 듣고 있기 힘들 정도로 무겁고 또 어떤 말은 한없이 가벼워서 입 밖으로 나오는 순간 흩어져 버린다. 딱히 이 정도의 무게였으면 좋겠다 싶은 범위가 있는 건 아니다. 어떤 무게의 말은 옳고 그 범위 밖에 있는 말은 그르다고 믿는 것도 아니다. 대체로 진심이 담긴 말을 좋아하지만 가끔은 진심이 전혀 담겨 있지 않아서 입바람을 후 불면 공기 중으로 사라지는 그런 말이 위로가 되기도 한다.
우리가 내뱉는 많은 말 중에 그 무게를 가늠하기가 가장 어려운 말은 '밥 한번 먹자'가 아닐까 싶다. '사랑해'나 '미안해' 같은 말은 대체로 진심 없이는 쉬이 내뱉기 어려운 말이기도 하고 눈빛을 보면 말속에 담긴 진의를 대충 짐작할 수 있다. 하지만 '밥 한번 먹자'는 말의 무게는 쉽게 가늠이 되지 않는다. 누군가의 '밥 한번 먹자'는 그저 인사치레에 불과한 무게감이 없는 말이고 또 다른 누군가의 '밥 한번 먹자'는 '한 번'이 '두 번'이 되고 '세 번'이 되는, 진짜 관계를 발전시켜 나가기 위한 말이다.
그동안 기약도 없이 '밥 한번 먹어요'를 남발하고 입 밖으로 말을 내뱉기 무섭게 그런 말을 했다는 사실조차 잊은 적이 몇 번인지 헤아릴 수조차 없다. 그저 언젠가 밥 한번 먹자고 말하면서 곧 사라지고 말 찰나의 마음을 전하기보다 '한 번'의 밥을 '두 번', '세 번'의 밥으로 이어나가는 그런 묵직한 진심을 주고받고 싶다.
'한번'과 '한 번'
위 글을 유심히 읽었다면
'한번'과 '한 번'은 다르다는 사실을 눈치챘을지도 모르겠다.
'밥 한번 먹자'라는 말이 대체로 가볍게 들리는가?
만약 그렇다면 '한번'이라는 표현의 무게를 본능적으로 이해하고 있는 셈이다.
'한번'과 '한 번'의 차이는 두 글자 사이에 존재하는 빈 공간의 유무뿐이다.
두 글자 사이에 빈 공간이 있는 '한 번'은 말 그대로 차례나 횟수를 나타내는 표현인 반면
두 글자 사이에 빈 공간이 없는 '한번'은 횟수를 나타내는 표현이 아니라 '지난 어느 순간', '시험 삼아', 혹은 '기회가 있다면'이라는 의미를 가진 명사, 혹은 부사다.
'한'과 '번' 사이 텅 빈 공간의 무게가 얼마나 되는지 모르지만
'밥 한번 먹자'라는 말이 한없이 가볍게 느껴지는 건 별다른 진심이 담겨 있지 않은 탓이고,
'밥 한 번 먹자'라는 말이 묵직하게 느껴지는 건 그 한 번이 두 번, 세 번이 될 수 있을 것 같은 진심이 가득 담겨 있어서가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