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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현정 Apr 20. 2024

언어의 무게

밥 한번 먹자

사진 출처: Pixabay(dandelion_tea)


말에는 무게가 있다. 


어떤 말은 가만히 듣고 있기 힘들 정도로 무겁고 또 어떤 말은 한없이 가벼워서 입 밖으로 나오는 순간 흩어져 버린다. 딱히 정도의 무게였으면 좋겠다 싶은 범위가 있는 아니다. 어떤 무게의 말은 옳고 범위 밖에 있는 말은 그르다고 믿는 것도 아니다. 대체로 진심이 담긴 말을 좋아하지만 가끔은 진심이 전혀 담겨 있지 않아서 입바람을 후 불면 공기 중으로 사라지는 그런 말이 위로가 되기도 한다. 


우리가 내뱉는 많은 말 중에 그 무게를 가늠하기가 가장 어려운 말은 '밥 한번 먹자'가 아닐까 싶다. '사랑해'나 '미안해' 같은 말은 대체로 진심 없이는 쉬이 내뱉기 어려운 말이기도 하고 눈빛을 보면 말속에 담긴 진의를 대충 짐작할 수 있다. 하지만 '밥 한번 먹자'는 말의 무게는 쉽게 가늠이 되지 않는다. 누군가의 '밥 한번 먹자'는 그저 인사치레에 불과한 무게감이 없는 말이고 또 다른 누군가의 '밥 한번 먹자'는 '한 번'이 '두 번'이 되고 '세 번'이 되는, 진짜 관계를 발전시켜 나가기 위한 말이다. 


그동안 기약도 없이 '밥 한번 먹어요'를 남발하고 입 밖으로 말을 내뱉기 무섭게 그런 말을 했다는 사실조차 잊은 적이 몇 번인지 헤아릴 수조차 없다. 그저 언젠가 밥 한번 먹자고 말하면서 곧 사라지고 말 찰나의 마음을 전하기보다 '한 번'의 밥을 '두 번', '세 번'의 밥으로 이어나가는 그런 묵직한 진심을 주고받고 싶다.




'한번'과 '한 번'


위 글을 유심히 읽었다면

'한번'과 '한 번'은 다르다는 사실을 눈치챘을지도 모르겠다. 


'밥 한번 먹자'라는 말이 대체로 가볍게 들리는가?

만약 그렇다면 '한번'이라는 표현의 무게를 본능적으로 이해하고 있는 셈이다. 


'한번'과 '한 번'의 차이는 두 글자 사이에 존재하는 빈 공간의 유무뿐이다. 

두 글자 사이에 빈 공간이 있는 '한 번'말 그대로 차례나 횟수를 나타내는 표현인 반면 

두 글자 사이에 빈 공간이 없는 '한번'은 횟수를 나타내는 표현이 아니라 '지난 어느 순간', '시험 삼아', 혹은 '기회가 있다면'이라는 의미를 가진 명사, 혹은 부사다. 


'한'과 '번' 사이 텅 빈 공간의 무게가 얼마나 되는지 모르지만

'밥 한번 먹자'라는 말이 한없이 가볍게 느껴지는 건 별다른 진심이 담겨 있지 않은 탓이고,

'밥 한 번 먹자'라는 말이 묵직하게 느껴지는 건 번이 번, 번이 있을 같은 진심이 가득 담겨 있어서가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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