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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현정 Apr 22. 2024

One More Light-신봉철

또 다른 처음을 열어준 그곳에서

One More Light-신봉철


또 다른 처음

처음은 언제나 설렌다. 무언가를 처음 하기로 약속한 때부터 실제로 그 처음이 현실이 될 때까지는 그저 매 순간 설렘과 벅참으로 가슴이 요동친다. 처음이라는 두 글자가 적힌 문을 열고 그동안 꿈꿨던 세계로 발을 내디뎌야 하는 순간이 되면 약간의 두려움도 더해진다. 하지만 더 이상 처음은 없을 것 같은 단조로운 일상을 두드리는 또 다른 처음은 언제나 반갑다.      


‘작업실’이라는 단어를 듣고 떠올리는 감상은 저마다 다르다. 갓 구워진 따끈한 빵이 줄지어 서 있는 맛있는 작업실을 떠올리는 사람도 있을 테고, 무겁고 커다란 나무판이 이리저리 깎이고 다듬어져 세상에 단 하나뿐인 수제 가구로 태어나는 톱밥 냄새 가득한 작업실을 상상하는 이도 있을 거다.     

 

내게 작업실은 오랫동안 꿈꿔왔던 새로운 세계였다. 오랫동안 꿈꿔왔지만 언제가 될지도 모르고 그 언제가 과연 오기나 할 건지 확신도 없는 그런 영원한 처음의 세계다. 식구들이 모두 떠나고 텅 빈 집에 홀로 남아 엉망으로 뒤엉킨 그릇을 싱크대에 갖다 넣고 너저분하게 흐트러진 지우개 가루를 치운 다음에야 비로소 얻을 수 있는 나의 작업 공간. 그 식탁 위에서 수십 권의 책을 번역하며 오랫동안 꿈꿔왔던 작업실은 나에게 미지의 공간이었다.      


위험하지만 한없이 아름다운 유리와 그 유리 조각을 매 순간 예상할 수 없는 새로운 시선으로 밝혀주는 빛의 향연에 우주를 담아내는 신봉철 작가의 작업실은 내가 상상했던 그 어떤 작업실보다 황홀했다. 처음은 언제나 설레지만 그의 작업실은 그 어느 때보다 멋진 또 다른 처음을 선물해주었다.      


One More Light              

불이 꺼진 작업실 2층에는 날카롭게 조각난 초록색 맥주병 조각 사이에 몸을 감춘 채 낮은 목소리로 속삭이듯 질문을 던지는 작품이 걸려있었다. 어두웠던 2층에 조명이 켜진 순간 내 머릿속에도 불이 켜졌고 내 가슴에는 불꽃이 일었다. 꺼져 가는 모닥불의 불씨를 되살리는 마른 장작처럼 빛은 불이 꺼진 2층 다락에서 홀로 들릴 듯 말 듯 낮게 읊조리던 신봉철 작가의 <One More Light>에 생명력을 불어넣었다.      


누군가 귀를 기울이는 사람이 나타날 때까지 울음을 삼키며 희미한 소리로 질문을 던지고 또 던지던 <One More Light>는 천장에서 쏟아져 내리는 조명을 받아 모두에게 들릴 만큼 우렁찬 목소리로 물었다. “Who cares if one more light goes out in a sky of million stars?” 록 밴드 린킨 파크가 2017년에 발표한 동명의 노래에서 영감을 받아 만든 작품 <One More Light>는 내동댕이쳐지고 부딪혀 날카롭게 조각난 위험천만한 유리병의 잔해 속에서 내게 물었다. 이토록 많은 별이 반짝이는 하늘에서 별 하나쯤 더 사라진다고 누가 신경이나 쓰겠냐고.     


안반데기의 쏟아지는 별         

강원도 안반데기의 별


‘하늘 아래 첫 동네’, ‘은하수의 성지’, ‘구름 위 마을’ 같은 매혹적인 별명으로 불리는 강릉 안반데기 마을. 도로 양쪽에 눈 벽이 쌓여 그러잖아도 좁은 길이 더욱 좁게 느껴지는 꼬불꼬불한 시골길을 한참 따라가니 더 이상 차가 올라갈 수 없는 막다른 곳이 나왔다. 그곳에 차를 세우고 온 세상을 얼리고도 남을 만큼 차갑게 서걱대는 밤공기를 헤치고 한참을 걸어가니 풍력 발전기가 귀가 멍해질 만큼 요란한 소리를 내며 바람을 갈랐다.     

어디를 보아도 별이 있었다. 하지만 무엇 하나 의미 없는 별은 없었다. 별을 좀 더 제대로 보아야 했기에 별다른 준비도 없이 찾아간 한겨울의 안반데기에서 조용히 몸을 뉘었다. 전날 밤 내린 폭설로 하얀 눈밭으로 변해버린 배추밭 끄트머리에 누워 바라본 하늘은 별밭이었다. 배추밭에 누워 바라본 별밭에는 별이 가득했지만 그중 하나가 사라졌다면 난 알았을 거다. 광활한 우주와 교신하듯 윙윙 돌아가는 풍력 발전기 소리를 들으며 내게 찾아온 또 다른 ‘처음의 순간’에 감사하며 하늘에 있는 별을 보고 또 봤다.      


언제든 산산이 부서져 누구든 해칠 수 있는 위험하기 짝이 없는 유리 위에 새겨진 그의 질문이 다소 냉소적으로 들릴지도 모른다. 별 하나쯤 사라져도 눈 하나 깜짝하지 않을 것이라는 사실을 뻔히 알고서 따지듯이 던지는 조소 가득한 차가운 질문처럼 느껴질 수도 있다. 하지만 신봉철 작가의 <One More Light>는 좀 더 자세히 들여다봐야 한다. 어두울 때는 귀를 기울여야만 간신히 들리는, 조명이 켜지면 더 잘 들리는 그 질문 뒤에 그는 빛을 받아 더할 나위 없이 아름답게 반짝이는 유리 같은 답을 숨겨뒀다. 별 하나쯤 더 사라진다고 누가 신경이나 쓰겠냐는 날카로운 그의 질문 뒤에는 “그럼요. 내가 신경 써요(Well, I do)”라는 그의 눈빛을 닮은 따뜻한 대답이 담겨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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