같은 그림, 두 번째 에세이(한나 파울리, 아침 식사)
귀국이라는 단어에는 묘한 향수와 그리움이 배어 있다. 길든 짧은 해외에서 얼마간의 시간을 보내고 나면 아무 생각 없이 내 나라말로 편하게 이야기하고, 괜히 주눅 들지 않아도 되는 고국이 그리워지게 마련이다. 그중에서도 가장 그리운 건 엄마가 차려주는 따뜻한 밥상이다. 어른이 되면 사람들은 대개 직접 밥을 하는 법을 배운다. 서당 개 3년이면 풍월을 읊는다고 엄마 밥을 먹은 세월만큼 밥맛도 엄마의 맛을 닮는다. 하지만 서당 개가 아무리 풍월을 읊어도 훈장을 따라갈 수는 없다. 그래서인지 엄마의 밥상은 언제나 그립고 아련하다.
2년간의 캐나다 생활을 끝내고 한국으로 돌아올 무렵의 나도 그랬다. 정들었던 나라를 떠나는 게 아쉽기도 했지만 내 나라가 주는 포근함과 엄마의 손맛이 담긴 밥상을 생각하면 내심 설렜다. 다만, 코로나 시대의 귀국은 그렇게 간단하지 않았다. 귀국 날짜가 다가올수록 마음이 초조해졌다. 비행기를 타는 데만도 몇 가지 서류가 필요했다. 항공사들은 코로나 백신접종 증명서와 코로나에 걸리지 않았음을 증명하는 음성 확인서가 없으면 탑승을 거부했다. 만약 탑승 2~3일 전에 하는 코로나 검사에서 양성 판정이 나오면 어떤 일이 벌어질지 생각만 해도 끔찍했다. 살고 있던 집을 비워야 하는 날짜도 정해졌고 우리 가족과 캐나다 생활을 내내 함께했던 차도 팔아버린 후였다. 만약 넷 중 하나라도 코로나에 걸렸다는 결과가 나오면 비행기에 탈 수 없는 건 물론이거니와 갈 곳 없는 신세가 될 게 뻔했다.
귀국을 위해 코로나 검사를 받으려면 일 인당 10만 원을 내야 했다. 증상이 있어서 받는 필수 검사가 아니라 해외여행을 위한 자발적인 검사였던 탓에 울며 겨자 먹기로 비싼 돈을 낼 수밖에 없었다. 하얀 가운을 입고 투명한 가리개로 얼굴을 감싼 직원은 차분한 손길로 막대를 조심스레 콧속으로 밀어 넣었다. 고객에게 그 어떤 통증도 남기지 않겠다는 사명감이 투철한 사람 같았다. 콧구멍을 부드럽게 휘감은 막대는 어떤 통증도 남기지 않은 채 순식간에 밖으로 빠져나갔다. 10만 원이 아깝지 않은 ‘노 페인(no pain)’ 서비스였다.
사람이 북적이는 좁은 공간은 코로나바이러스가 확산하기 딱 좋은 곳이라고 했다. 그래도 마음이 조금은 느슨했다. 캐나다를 떠나기 전에는 혹시라도 비행기에 타지 못한 채 남의 나라에서 천덕꾸러기가 될까 봐 벌벌 떨었다. 무사히 귀국 항공기에 올라탄 이상 두려울 게 없었다. 어차피 해외입국자는 2주 동안 의무적으로 자가격리를 해야 하는 시절이었으니 설사 비행 중에 코로나에 걸린다 한들 딱히 달라질 것도 없었다. 느긋한 마음으로 기내식을 먹고 영화를 몇 편 보고 나니 인천이었다.
인천공항은 더 이상 오고 가는 사람들의 설렘과 아쉬움이 느껴지는 낭만적인 공간이 아니었다. 날카로운 긴장감만이 공항을 가득 메우고 있었다. 열세 시간의 비행 끝에 한국에 도착했지만 공항 밖으로 나가기까지 통과해야 할 관문이 많았다. 적외선 열 카메라를 지나고, 서류를 제출하고, 자가격리 감시 앱도 깔아야 했다. 투명한 아크릴 칸막이 뒤에 몸을 숨긴 공항 직원들은 심지어 내가 알려준 전화번호가 정말 맞는지 확인하는 전화까지 걸었다. 물 샐 틈 없이, 아니 바이러스 샐 틈 없이 완벽하게 한국을 지켜내겠다는 투철한 의지가 느껴졌다. 한참 만에 게이트를 통과한 다음 새하얀 방호복을 입은 사람들을 따라가니 예약해 둔 택시가 우리를 기다리고 있었다. 택시는 갑작스레 퍼붓기 시작한 폭우를 뚫고 한참을 달렸다. 쏟아지는 잠을 참지 못하고 꾸뻑꾸뻑 졸다 보니 2년 만에 보는 우리집 앞에 차가 멈춰 섰다. 언제 찌푸렸냐는 듯 활짝 갠 하늘이 우리의 귀국을 반겼다.
2년 만에 돌아왔다는 기쁨도 잠시 2주 동안 갇혀 지낼 생각을 하니 막막했다. 일단 허기부터 달래야 할 판이었다. 당장 저녁으로 무얼 먹어야 할지 머리를 굴렸지만 쉽게 답이 나오지 않았다. 배달앱을 뒤지며 메뉴를 고민하던 찰나, 나를 구원하는 메시지가 날아들었다. 환영의 밥상을 차려주고 싶지만 그럴 수 없으니 저녁을 포장해서 집 앞에 갖다 두겠다는 친구의 카톡이었다. 해외에서 입국한 사람은 모두 잠재적인 코로나 감염자로 의심받던 시절이었으니 함부로 대문을 열 수도 없었다. 친구가 집 앞을 떠났다는 사실을 확인한 후 조심스레 연 대문 앞에는 하얀 비닐봉지가 몇 개 놓여 있었다. ‘격하게 환영합니다’라는 글귀가 적힌 커다란 봉지 안에는 따뜻한 미역국이, 그 옆 작은 봉지에는 차가운 아이스크림과 시원한 물이 들어 있었다. 물론, 아이들이 반긴 건 밥보다는 아이스크림이었다.
친구의 배려 덕에 쉽게 저녁을 해결했지만 진짜 문제는 다음 날 아침이었다. 저녁을 먹자마자 본능적으로 다음 날 아침을 고민하는 게 싫었지만 어쩔 수 없었다. 외출은 금지였고 아침을 배달해주는 곳은 없을 게 뻔했다. 미역국으로 허기진 배를 달래고 나니 그제야 집이 눈에 들어왔다. 어느 한구석 엄마의 손길이 묻어 있지 않은 곳이 없었다. 사실, 아무것도 갖춰지지 않은 집에서 2주간 갇혀 지내는 건 불가능한 일이었다. 게다가 한여름이었다. 엄마는 불가능을 가능케 만들기 위해 미리 생필품을 집안 곳곳에 채워뒀다고 했다. 냉장고는 엄마가 직접 담근 간장이며 된장, 고추장, 매실청, 김치 같은 귀한 재료로 그득했다. 다음 날 아침상에 올라간 음식에서는 엄마의 손길이 느껴졌다. 엄마가 직접 차린 상은 아니었지만 엄마가 준비해 둔 재료에서는 엄마 맛이 났다. 엄마의 진짜 밥상 앞에 다시 앉기까지는 한참 더 걸렸다. 그래도 귀국 다음 날 우리의 마음을 뜨끈하게 데워준 첫 아침상은 누가 뭐래도 엄마 밥상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