같은 그림, 두 번째 에세이(김환기, 우주)
준비 없는 이사
“엄마, 이삿짐 안 싸요?” 이사를 열흘쯤 앞둔 무더운 여름날, 아들이 물었다. 단순한 물음이 아니었다. 무심한 듯 툭 던진 짧은 질문이었지만 그 말속에는 의아함이 배어 있었다. 몇 날 며칠을 궁금해하다 더 이상 참을 수 없는 지경에 다다른 눈치였다. 아들은 걱정 가득한 목소리로 한 마디를 더 뱉었다. “이제 이사가 코앞인데 이 많은 짐을 다 어떻게 하려고 그래요?” 해외 이사만 기억하는 아들은 이삿날이 코앞인데 모든 짐이 그대로 제자리에 있는 게 몹시 황당한 모양이었다.
해외 이사는 사실 국내 이사와는 비교도 안 될 만큼 귀찮고 번거롭다. 몇 년 전, 2년간 캐나다에서 살 계획을 세우고 해외로 보낼 이삿짐을 싼 적이 있었다. 예삿일이 아니었다. 출국 두세 달 전부터 짐을 분류하고 종류별로 상자에 담는 일을 수도 없이 반복했다. 필요하긴 하지만 자주 사용하지 않아 미리 상자에 넣어도 괜찮은 짐, 그것보다는 자주 쓰지만 두어 달 정도는 없어도 되는 물건, 최후의 순간까지 사용하다가 비행기에 직접 들고 타야 하는 일상 용품으로 나누는 일은 쉽지 않았다. 이삿짐센터 직원들이 오기로 한 날에 맞춰 각양각색의 물건이 꽉꽉 들어찬 수십 개의 상자를 마치 레고를 쌓듯 거실 한쪽에 주르륵 정렬해놓고는 뿌듯해하기도 했다.
하지만 그게 끝이 아니었다. 이삿짐센터 직원들이 수십 개의 상자와 가구를 싣고 떠난 후에도 집에는 여전히 짐이 남아있었다. 당장 입어야 할 옷가지들은 옷장이 실려 나간 자리에서 어지럽게 뒹굴었고 갈 곳 잃은 책들은 오래된 헌책방의 책더미에나 어울릴 법한 모양새로 아무렇게나 흐트러져 있었다. 몇 안 되는 남은 살림살이로 소꿉놀이하듯 두어 달을 살고 나서 캐나다로 떠났지만 기다림은 계속됐다. 꿈에 그리던 이층집에서 식탁 하나 없이 바닥에 둘러앉아 밥을 먹는 나날을 서너 주쯤 견디고 나니 노심초사 기다렸던 이삿짐이 마침내 도착했다.
다시, 안녕
다시 이사를 앞둔 아들은 그때의 지루하고 하염없는 기다림을 떠올렸다. 국내 이사를 할 때는 미리 짐을 쌀 필요가 없다는 설명을 듣고도 고개를 갸우뚱했다. 당연한 반응이었다. 똑같은 이삿짐을 우리 가족 넷이 힘을 합쳐 담고 싸고 정리하는 데 몇 주나 걸렸다. 옛집을 떠난 짐이 새집에 도착하기까지 두세 달은 족히 걸렸다. 캐나다로 가는 이삿짐이 바다를 건너는 데 걸린 시간을 고려하더라도 엄청난 차이였다.
하지만 자동차로 두 시간 떨어진 도시로 옮기는 이번 이사는 달랐다. 아침 7시 30분, 이삿짐센터 직원들은 결의에 찬 눈빛으로 등장했다. 불볕더위 따위에게 질 수 없다는 각오를 다지기라도 한 건지 검은 옷을 입고 머리에 띠를 두른 채 결연한 표정을 짓는 이삿짐 5인방은 일사불란하게 움직였다. 다들 비지땀을 흘리며 푹푹 찌는 좁은 집을 잰걸음으로 바삐 오갔다. 수영을 하다 갓 물 밖으로 나온 것처럼 모두 티셔츠가 잔뜩 젖어 있었다. 두 손으로 옷을 꽉 짜면 한 바가지쯤 물이 흘러내릴 것만 같았다. 각자 맡은 구역에서 숨 고를 새도 없이 분주하게 짐을 싼 다음에는 사다리차를 이용해 부지런히 짐을 실어 내렸다.
싱크대의 그릇과 서랍장의 옷, 책장을 빼곡하게 메운 책이 차례차례 사라졌다. 마지막 순서는 덩치 큰 가구였다. 방방이 들어찬 커다란 침대까지 모두 빠져나간 바닥 곳곳에는 회색 먼짓덩어리들이 나동그라져 있었다. 그동안 집을 충분히 아껴주지 못했다는 미안한 마음이 밀려들어 괜히 화장지를 몇 장 뜯어다가 애꿎은 바닥과 걸레받이만 닦아댔다. 우리가 그곳에서 살았던 흔적이 모두 사라지기까지 딱 3시간 30분이 걸렸다. 캐나다에서 살았던 2년을 제외하더라도 그 집에서 살았던 기간이 햇수로 무려 10년이었다. 3시간 30분이면 모두 사라질 것들을 끌어안고 우리는 10년의 세월을 그곳에서 보냈다.
어제와 작별하고 내일을 맞이하는 날
이삿짐 5인방은 바로 전날까지 그 집에서 생활하며 우리가 남긴 모든 삶의 흔적을 소중하게 다뤘다. 옛집에서 10년간 꾸린 삶의 흔적은 이삿짐 상자에 담겨 새집으로 옮겨졌다. 어쩌면, 그들이 정성스레 포장해 상자에 담은 건 우리의 살림살이가 아니라 우리의 삶이었는지도 모른다.
울고 웃었던 10년의 세월이 고스란히 녹아든 어제의 삶을 내일의 터전이 돼줄 새집으로 옮겨놓은 이삿짐 5인방. 이삿짐을 옮기는 그들의 노동은 누군가의 세월이 담긴 어제의 삶과 눈 앞에 펼쳐질 내일의 삶을 잇는, 그 무엇보다 고귀하고 신성한 행위였다. 그들이 이어준 어제와 내일 사이에는 오늘이 있다. 어제를 발판 삼아 더 나은 내일을 만들기 위해 씩씩하게 살아내야 할 오늘.
김환기의 <우주>는 2개의 독립된 그림이 만나 완벽한 정사각형을 이루는 작품이다. 세로 2.5미터가 넘는 기다란 직사각형 그림 하나만으로도 사람들의 시선을 사로잡기에는 충분하다. 하지만 두 개의 길쭉한 그림을 나란히 붙이면 ‘미술은 질서와 균형’이라는 김환기의 철학을 제대로 이해할 수 있다. 둘이지만 하나같고, 하나지만 둘로 나뉘어 있는 그의 광활한 <우주>를 보며 어제와 내일 사이에서 균형을 지키며 신나게 살아갈 오늘을 그려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