트루빌 해변, 1864, 외젠 부댕
9월의 첫째 날, 아이가 물었다. “엄마, 벌써 9월이야? 8월은 모두 어디 갔어?” 부산에서 서울로 올라오는 고속도로는 일찍부터 막혔다. 꽉 막힌 도로 위에서 낮잠도 자고 노래도 듣고 휴게소에서 산 핫도그도 먹었는데 한참을 더 가야 한다는 말에 아이는 조용해졌다. 목이 아프지도 않은지 고개를 뒤로 젖혀 썬루프 너머로 구름을 한참 쳐다봤다. 제대로 놀지도 못했는데 벌써 8월이 끝나버렸다는 사실을 믿기 힘든지 아이는 8월의 행방을 궁금해했다. ‘그건 8월한테 물어보면 되지 않을까?’ 아이의 질문을 듣자마자 반사적으로 이런 생각이 떠올랐다.
아이와 이야기를 나누다 보니 8월이 끝난 게 실감 났다. 8월을 지나 9월이 되자 신기하게도 더위가 한풀 꺾였다. 유난히도 길었던 열대야와 함께 여름도 끝나버렸다. 한낮의 해는 여전히 뜨겁지만, 이제 창문을 열어놓고 자면 새벽에는 한기가 든다. 가다 서기를 반복하는 차 안에서 다시 잠든 아이를 보며, 지나가 버린 8월에게 나도 물었다. ‘너는 어디로 흩어졌니?’
8월의 시작은 이사였다. 하늘 높이 솟아오른 뜨거운 태양은 이상하게 사람을 들뜨게 한다. 여름 휴가철을 맞아 여행을 떠나는 사람들을 보며 내 마음도 설렜다. 일상의 짐을 벗어 던지고 어디로든 떠나고 싶었다. 하지만 이사가 예정돼 있는데 다 내팽개치고 멀리 떠날 배짱은 없었다. 바다로 달려가고 싶어 뜨겁게 달아오른 마음을 가라앉히는 특효약은 산더미처럼 쌓인 일거리였다. 여름이 시작될 무렵부터 “바쁘다 바빠”를 외치며 미뤄둔 일거리들은 더 이상 미룰 수 없는 지경이 됐다. 입으로는 이사 때문에 바쁘다고 이야기하면서 실제로는 이사와 상관없는 일을 하느라 정신없는 나날이었다. 단 1초도 허투루 쓰이지 않도록 사력을 다해 시간 은행을 지키는 문지기가 된 기분이었다.
이사는 여러모로 오케스트라와 닮은 것 같다. 훌륭한 오케스트라를 위해서는 모든 연주자가 각자 맡은 역할을 잘 해내야 한다. 피아노에서부터 바이올린, 트럼펫에 이르기까지 모든 악기가 제때 정확한 소리를 내야 오케스트라가 완성된다. 바이올린이 살짝 박자를 놓치거나 피아노가 건반 하나를 잘못 누르는 정도로 큰일이 생기진 않는다. 하지만, 누구 하나라도 돌이킬 수 없는 실수를 저지르면 조화가 깨지고 아름다워야 할 연주는 불협화음이 돼버린다. 공연 내내 연주하는 시간보다 기다리는 시간이 많은 심벌즈가 타이밍을 놓치면 사달이 벌어질 수도 있다. 이사도 마찬가지다. 일정에 정확하게 맞춰 짐을 싸고, 옮기고, 새집에 넣어야 한다. 우리의 이사에도 약간의 불협화음은 있었다. 이삿짐 차가 두 시간을 달려 새집에 도착했는데 입주 청소는 마무리돼 있지 않았다. 거기에다 새집은 사다리차를 쓸 수 없는 곳이라고 했다. 그래도 오케스트라 공연이 파국으로 치달을 만한 사건은 벌어지지 않았다.
이사 후에도 “바쁘다”라는 소리가 입에서 떨어질 날이 없었다. 매일 수도 없이 바쁜 척을 해대며 간신히 새 동네에 적응할 무렵, 올해로 아흔다섯인 할머니가 돌아가셨다. 할머니는 내가 태어났을 때부터 할머니였고, 수십 년째 나의 할머니였다. 그래서인지 누가 물을 때를 제외하면 할머니의 나이는 전혀 의식하지 못하고 살았던 것 같다. 언젠가부터 눈에 띄게 쇠약해졌지만 그래도 영원히 같은 자리에 있을 것만 같았다. 영원한 게 없다는 당연한 진실을 망각하고 살다가 예기치 못한 순간 잊고 살았던 진실을 마주하는 게 인생인가 보다.
이십여 년 전 할아버지가 돌아가셨을 때, 할머니는 등으로 울었다. 할머니는 사람들을 등지고 옆으로 누웠다. 며칠간 계속된 강행군을 더는 못 이기고 할머니가 잠든 줄로만 알았다. 곤히 잠든 모습이 평화로워 보인다고 생각하는 찰나, 할머니의 등이 들썩였다. 아무도 모르게 참았던 눈물을 흘리는 할머니를 가만히 토닥이며 생각했다. 얼마나 오랜 세월을 함께하든 배우자가 세상을 떠나면 슬픈 건 당연한 일이라고. 이번에는 엄마가 울었다. 아흔이 넘은 부모가 돌아가시면 그래도 조금은 덤덤할 줄 알았는데 아무리 나이가 많아도 슬픈 건 똑같다며 엄마는 숨죽여 울었다. 할머니가 돌아가셔서 슬프기도 했지만, 엄마가 울어서 더 슬펐다.
이사를 하고, 장례를 치르고, 몇 차례 손님을 맞고 나니 여름의 끝이 보였다. 여름의 끝을 상징하는 8월의 마지막 날은 마흔세 번째 역서를 마감하기로 약속한 날이기도 했다. 8월 말까지 남은 날은 몇 안 되는데, 갈 길은 멀었다. 마감을 늘려달라는 말은 도저히 할 수가 없었다. 그래서 그야말로 촌각을 다퉈가며 일을 했다. 외식은커녕 일상적인 외출조차 포기한 채 집안에 틀어박혀 읽고 쓰기를 반복했다. 흩어지는 여름의 끝자락을 붙들고 어디라도 가고 싶은 나를 붙들어 앉힌 건 이번에도 역시 일이었다. 자꾸만 밖으로 향하는 마음을 간신히 붙잡고 매일 밥 먹는 시간까지 아껴가며 글을 썼다.
미하엘 엔데가 쓴 소설 <모모>에는 사람들의 시간을 빼앗는 회색 신사가 등장한다. 사람들은 시간을 아껴야 한다는 회색 신사의 속삭임에 넘어가 생산성을 높이는 데 도움이 되지 않는 일을 모두 포기했다. 사람들은 여자 친구에게 꽃을 선물하거나 친구와 함께 보내는 시간은 모두 낭비라고 여겼다. 빗자루로 바닥을 쓸 때마다 사색에 잠기곤 했던 청소부는 바쁘게 비질을 하느라 바로 옆에 친구가 지나가도 알아보지 못할 지경이 됐다. 그럴듯한 속임수로 시간을 빼앗은 회색 신사들은 사람들이 아낀 시간을 오직 자신들을 위해서 사용했다. 사람들이 많은 것을 포기하며 힘들게 아낀 시간은 결국 아무것도 아닌 게 돼버렸다. 한 번 잃어버리고 나면 절대로 되찾을 수 없는 시간을 통째로 회색 신사에게 바친 꼴이 됐다. 다행히, 나의 8월을 송두리째 가져간 시간 은행은 정직한 곳이었다. “바쁘다 바빠”를 수없이 내뱉으며 정신없이 보낸 8월이 이제 끝났다. 8월에 쓸려간 시간을 되돌아보면 나의 시간은 헛되이 허공 속으로 사라진 게 아니다. 언제 지났나 싶게 흘러가 버린 8월이지만 나의 8월 속에는 많은 안녕과 새로운 시작의 흔적이 남아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