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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현정 Mar 07. 2024

고통과 죄책감의 초상

맨체스터 바이 더 씨



한겨울을 배경으로 한 영화 <맨체스터 바이 더 씨(Manchester by the Sea)>는 과거에 벌어진 사건 때문에 고통과 절망의 구렁텅이에 갇혀 사는 남자를 주인공으로 내세운다. 케네스 로너건이 각본과 감독을 맡은 이 영화에서 비극을 겪고 고향을 떠난 비탄의 주인공을 연기한 배우는 1988년에 아역 배우로 영화계에 발을 들여놓은 케이시 애플렉이다. 2016년 선댄스 영화제에서 초연된 후 아마존 스튜디오가 배급한 이 가슴 아픈 영화에서 로너건은 평범한 한 남자가 어떻게 가시지 않는 슬픔을 받아들이는지 섬세하게 연기한다.         

       

애플렉이 연기한 리 챈들러는 주거용 건물의 유지보수 업무를 담당하는 잡역부다. 리는 막힌 변기를 뚫어달라는 주민의 요청은 능숙하게 처리하지만, 자신을 짓누르는 죄책감의 무게를 어떻게 감당해야 할지 갈피를 잡지 못한 채 어떤 목표 의식도 없이 그저 주어진 일을 해내기에 급급하다. 몹시 추운 어느 날, 리는 오랜 친구인 조지로부터 형이 위독하다는 전화를 받는다. 몇 년 만에 되돌아온 고향에서 자신이 16세 된 조카 패트릭(루카스 헤지스)의 후견인으로 지정됐다는 사실을 알게 된 챈들러는 큰 충격을 받는다.                


리는 조카를 사랑하지만 '아버지'의 역할을 할 준비는 돼 있지 않다. 챈들러는 자신이 나고 자란 고향, 사람들이 모두 자신을 "바로 그 리 챈들러"로 기억하는 고향에서 과거의 사건이 일으킨 파장과 마주해야만 한다. 리는 그동안 뿌리내리고 살아온 작은 마을을 떠나지 않겠다고 고집부리는 조카를 위해 고향에 정착하려고 노력한다. 하지만 미셸 윌리엄스가 연기한 전처 랜디와의 가슴 아픈 만남은 힘겨운 여정의 전환점이 된다.                

영화 <가라, 아이야, 가라(Gone Baby Gone), 2007>와 <비겁한 로버트 포드의 제시 제임스 암살(The Assassination of Jesse James by the Coward Robert Ford), 2007> 개봉 후 평단의 극찬을 받은 애플렉은 골든 글로브, 영국 아카데미 시상식, 아카데미 남우주연상을 수상할 정도로 뛰어난 연기로 영화를 이끌어나간다.  애플렉은 고통과 분노를 가슴 깊이 묻어둔 채 살아가는 황폐한 남자를 훌륭하게 연기하고, <웬디와 루시(Wendy and Lucy), 2008>, <블루 발렌타인(Blue Valentine), 2010)>에서 섬세한 연기로 호평을 받은 윌리엄스는 매우 강렬하고 영리한 인물 해석으로 관객의 눈길을 사로잡는다.                


리와 랜디가 맨체스터 거리에서 우연히 마주치는 가슴 아픈 장면에서 윌리엄스는 감정 변화를 흡입력 있게 묘사해 관객에게 강렬한 인상을 남긴다. 2012년에 연기를 시작한 헤지스 역시 회피적인 태도로 아버지의 죽음과 마주하지만 예기치 못한 순간에 극적으로 감정을 폭발시키는 10대 소년으로 열연해 화제를 모았다.                

많은 찬사를 받은 이 영화는 매사추세츠의 작은 마을 맨체스터 바이 더 씨(혹은 줄여서 맨체스터)에서 형, 어린 조카와 함께 어선을 타고 낚시를 하던 리의 회상 장면에서 출발한다. 이 장면은 리가 그의 삶을 완전히 망친 비극적인 사건이 일어나기 전에는 가족과 친밀한 유대감을 갖고 있었음을 보여준다.


리가 퀸시의 한 아파트 건물 앞에 쌓인 눈을 무표정하게 쓸어내는 우울한 장면이 회상 장면 바로 뒤에 이어진다. 상반되는 두 장면을 잇달아 보여 주는 로너건 감독의 재치가 이 영화에 매력을 더한다. 감독은 회상 장면과 현재 상황을 노련하게 편집해 과거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 리가 왜 장난기 많은 남자에서 잡담이나 형식적인 사과 같은 모든 종류의 사회적 상호작용을 거부하는 반사회적인 사람으로 변했는지 알려준다. 회상 장면은 리의 가족을 완전히 해체시킨 비극적인 사건의 실체를 서서히 드러내는 역할을 한다. 리의 형이 울혈성 심부전을 진단받는 장면은 하나뿐인 형을 잃게 될 슬픔의 서막을, 가족과 함께 살았던 주택 지하실에서 친구들과 함께 노는 장면은 상상할 수도 없는 비극의 도래를 예고한다. 오스카상 수상작인 <유 캔 카운트 온 미(You Can Count on Me), 2000>에서 로너건 감독과 함께 작업했던 레슬리 바버가 작곡한 OST 역시 관객의 몰입을 돕는다.      


한 남자의 슬픔과 상실을 그린 이 가슴 아픈 영화는 진부한 클리셰로 관객에게 감동을 안기거나 뻔한 트릭으로 관객의 눈물을 강요하는 일반적인 할리우드 영화와는 거리가 멀다. <맨체스터 바이 더 씨>는 관객에게 인생의 의미와 끔찍한 실수의 대가에 대해 생각하고 아름다운 영상과 품위 있는 음악이 더해진 세련된 영화를 감상할 수 있는 기회를 선사한다. 여러 가닥의 실타래를 조심스레 엮어 한 인간이 마주한 슬픔과 아픔을 보다 우아하고 통찰력 있게 묘사한 훌륭한 영화를 오랫동안 기다려온 영화 애호가에게 <맨체스터 바이 더 씨>를 추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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