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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느리미학 Mar 26. 2021

7. 조선에 당도한 것을 환영하오

경기전

조금은 이곳이 낯설었을까.

한참을 뒤척이다 겨우내 잠이 들었다. 바닥이 보이지 않는 깊은 곳에 영영 빠지는 꿈을 꾸었다. 놀이기구라면 딱 질색인 사람인데 그렇게 깊은 수렁에 빠지는 꿈이라니…. 벌떡 일어나 앉으니 비로소 꿈이었다는 것을 깨닫는다. 안도감에 한차례 가슴을 쓸어내린다. 생생하게 꿈을 꾼 건 굉장히 오랜만의 일이라 한동안 일어나고도 멍하게 가만히 앉아만 있었다. 커튼을 쳐놓은 창가에는 이미 아침햇살이 드리웠고, 자기들끼리 무에 조잘거리는지 숙소 주변을 맴도는 조그마한 새들의 지저귐도 간간이 들려왔다. 핸드폰을 보니 시간은 아침 9시가 지나가고 있었다. 꿈은 금방 머릿속에서 희미해져만 갔고 그 생각이 들자 괜히 혼자 푸스스- 웃음을 터트렸다.


어제의 흥성거림은 온데간데없이 사라져 있었다.

조용히 이야기를 나누는 사람들만 몇몇 산책하듯 걷고 있었고, 나처럼 이른 아침부터 경기전을 구경하겠노라고 나온 사람들만 매표소에 간간이 보였다. 여유가 깃든 이 거리가 마음에 들던 찰나 조금 이곳을 산책해도 좋겠다는 생각이 들어, 경기전을 지나쳐 걷기 시작했다. 저마다의 아침을 준비하는 모습이 곳곳에 보였다. 어제의 여운이 채 가시기도 전에 다시 장사를 준비하려는 상인들, 벌써 한차례 왔다 간 손님들의 자리를 부랴부랴 정리하는 상인들…. 아침의 거리는 여전히 고요했으나, 조금씩의 흥성거림이 깃든 낙낙한 그곳을 편안히 둘러보며 걸었다. 어제 다녀갔던 오목대의 입구를 알리는 거리의 끝에 다다르자, 비로소 경기전에 가야겠다는 마음이 들어 발걸음을 재게 옮겼다.


전주 경기전은 조선 시대 첫 번째 왕인 '태'의 어진이 있는 곳이며 제를 지내기 위한 공간이기도 하다. '경사스러운 터에 지어진 사당'이라고 전해지는 이 경기전은 임진왜란과 정유재란 두 편의 전쟁 끝에 모두 소실되었다가, 광해군 때 경기전만 복원되었다고 전해지고 있다. 초입에 다다르면 붉은 홍살문이 바로 보이는데 이 문의 윗부분이 날카로운 창살 모양을 띠고 있다. 이 문이 왜 이런 모양새를 띠고 있는지 궁금해져 찾아보니, 옛 전설에는 우리나라의 대부분 귀신의 옷차림이 펄럭거리는 옷이라고 생각한다고 전해진다. 홍살문의 날카로운 창살에 옷이 걸려 사당 안으로 들어오지 못하게 막는다고 하여 그런 모양새를 띠고 있다고 한다. 참 우리나라와 꼭 닮은 이야기다.


문과 문을 따라 들어가 본다.

나뭇잎 하나 없는 앙상한 나뭇가지들이 오소소 떨며 바람에 나부끼는 모양새가 보인다. 매표소에 옹기종기 모여 있던 사람들은 모두 어디로 갔는지 주변에 처연하게 휘날리는 나뭇잎마저 더는 보이지 않는다. 이어폰에는 단조로우나 잔잔한 경음악이 흘러나오고 있었다. 학창 시절, 보고 자랐던 사극 드라마에는 가사 없이 흘러나오는 배경음악이 대사 밑으로 잔잔히 깔리곤 했다. 그 시절 그 어떤 OST보다 잔잔하고 아련하기까지 한 가사 없는 음악이 마음에 오래도록 남았다. 무수한 상상력으로 가득 채웠을 그 시절, 애달프게 흘러나오는 배경음악과 음악을 닮은 사극 드라마 한 편을 볼 때면 내내 잠 못 이룬 밤이 하나둘, 늘어났다. 그럴 때면 주저 없이 잠을 포기하고 핸드폰을 조용히 켠다. 메모장으로 들어가 한 편의 소설을 지어내 본다. 서론도, 결말도 없는 위기와 절정과 조금의 애달픔만이 담겨있는 소설에는 엔딩은 존재하지 않는다. 보는 것만으로도 애달파 구슬프게 울어도 좋은, 이름도 짓지 않은 무명의 주인공들은 내 핸드폰 메모장 안에서 세상사 가장 아픈 사랑을 겪는다.


이런 경기전 같은 공간은 도심 안에 존재하지만, 막상 그곳에 들어가 보면 주변의 현대적이고 이질적인 건물들은 시야에서 사라져 버린다. 아마 그래서 습관적으로 공간을 오롯이 즐기기 위해 매번 귀에 이어폰을 꽂고 경음악을 켠다. 키는 순간 이곳은 더는 21세기가 아닌 19세기.

조금 혼란스럽거나 이상하지만, 고요히 스며드는 빛바랜 꿈이 된다.


조그마한 문들이 오목조목 밀집되어있다. 그곳을 지나 건너가기도 하고, 장난스레 옆에 조그맣게 나 있는 문으로 다시 들어가 보기도 한다. 문득 지나오던 문에서 초록빛을 봤나 싶어 뒤로 돌아보니 빼곡히 공간을 채우고 있는 대나무 숲이 시야에 한가득 쏟아져 내렸다.


경기전 대나무 숲


아마 이 사진을 담아내는 동안 생각했을 것이다.

난 이곳을 보기 위해서라도 다시 전주를 찾을 거라는 사실을. 대나무 숲을 가르는 길과 그 길 끝에 나 있는 문 하나만으로도 내겐 충분했다. 그 풍경이 온 마음에 가득 차는 느낌이 들 정도였으니. 그곳을 통과하고 싶어 안달 나 있는 사람처럼 안절부절하며 카메라를 켜 내내 사진을 찍었다. 오래도록 간직하고 싶은 사진 하나가 비로소 핸드폰에 담기자, 우수수 빗소리처럼 쏟아지는 대나무 숲의 소곤거림을 들으며 문의 바깥으로 향했다.


청명한 소리가 아직 귀 언저리에서 가만히 맴돈다.

숨을 들이쉬면 아직도 그때 초록의 진한 냄새가 코끝을 스칠 것만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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