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느리미학 Mar 27. 2021

7-1. 토막글 하나, 느린 우체통

최명희문학관

경기전 뒤편에 위치한 '최명희문학관'은 우연히 마주한 공간이었다.

아직 대나무 숲의 여운이 진하게 남은 채 한옥마을 골목골목을 거닐다 마주한 곳. 소설 '혼불'을 지어낸 최명희 작가님의 문학관. 소설 혼불은 일제 강점기 시절, 사매면 매안마을의 가문을 지키려는 유서 깊은 양반가의 종부 3대와 빈민촌 거멍굴 사람들의 이야기를 그린 소설이다. 무려 10권이라는 책을 저술한 작가님이며, 혼불을 주제로 한 문학관이기도 하다. 들어서자마자 보이는 아이들의 다채로운 색감의 그림과 글이 여러 군데 전시되어 있었다. 어떤 주제를 가지고 전시 중인가 싶어 조심스레 인기척 없는 조용한 그곳으로 발걸음을 내디뎠다.


혼불이 전시된 곳은 '독락재'라는 곳이다. 최명희 작가님의 생전에 다른 사람들과 주고받았던 편지나 엽서, 혹은 그 무엇들이 전시되어있는 곳. 소설 혼불의 내용이 짧게나마 전시관 곳곳을 메우고 있어 눈으로 보는 재미 또한 있다. 그 사이에서 종종 원고지가 눈에 띄었는데 찾아보니, 작가님은 그 흔한 컴퓨터 키보드 한번 두드리지 않고 원고지로 집필을 했다고 한다. 어느 날은 온종일 걸려 원고지 한 장,  또 어떤 날은 서너 장. 쇠진해진 육신으로 마치 혼절하듯 새벽녘에야 잠이 들곤 했다는데 이렇게 집필한 원고지만 해도 1만 2,000장이라고 한다. 언젠가 작가님은 원고지의 칸이 너무 깊어 토씨 하나만 틀려도 다시 쓰기를 반복해 10여 장의 파지를 만든 적이 있다며 고백했다 한다. 그런 열정을 닮은 문학관의 공간은 덧없이 무해한 공간이 아닐까, 오직 문학이라는 주제만으로도 이곳에서 꼬박 밤을 새워도 좋을 것 같았다.


고전적인 것에 더 진한 향수를 느낄 때가 종종 있다. 잠이 오지 않는 밤에 쓰는 시, 좋은 책을 읽다 마음이 가닿는 대목을 발견할 경우 주저하지 않고 잘 깎아놓은 연필과 공책을 꺼내어 들곤 한다. 키보드로 뚱땅거리는 것은  편하긴 편하겠지만 내 손으로 사각사각 한자씩 써 내려가는 것은 좋은 느낌을 준다. 짧은 감정도, 좋은 감정으로 골라 쓴 단어들의 나열도 내 글에 오롯이 담긴다. 해서 더 좋은 글을 낼 때도 종종 있다. 아마 그런 느낌이 아니었을까, 부러 원고지에 한자씩 써 내려간다는 것은.


얼마나 시간이 지났을까 인제 그만 나가려던 찰나, 아주 조그맣고 새빨간 우체통 하나가 시야에 들어왔다. '느린 우체통'이라고 쓰여 있었던 우체통은 1년 후 나에게 보내는 편지라는 주제로 운영하고 있었다. 1년 후 나에게 보내는 편지라니! 어쩐지 근사했다. 반대편에 위치한 사무실의 쪽문을 두어 번 두드리니 직원분이 나와 안내를 해주셨다. 자못 날씨가 추워지는 걸 느꼈지만 낭만인지, 무엇인지 모를 감정에 꽁꽁 언 손을 쥐고 잘 정돈된 벤치 한쪽에 앉아 편지지 위에 글자를 적어 내려갔다. 


'안녕? 어떻게 지내?'

아마 정신없이 써 내려간 편지 안에는 걱정과 설렘, 그리고 부담과 기대의 조각들이 빼곡히 메워져 있었을 것이다.


네게 꼭 맞는 옷처럼 이 여행길은 내 평생 두고두고 남을 일이니,
너는 이날을 꼭 기억했으면 좋겠다. …
이 여행길에 널 다시 만난다면 그때가 언제가 되든
눈시울이 붉어져도 내 가슴으로 널 끌어안을 테니


아마 나도 모르게 편지를 써 내려가는 동안 내내 숨죽여 울었을 것이다. 돌이켜 보면 나는 '나 자신'에게 관대하지 못했다. 남에게 좋은 사람인 척 가장해 서성이는 것이 삶의 전부였던 내 스무 살 초반. 누군가의 위로도 전혀 도움이 되지 않아 참 혼자 많이도 울었었다. 서러움에 울고, 미안함에 울고. 아마 그때 그 누구보다도 '나 자신'에게 위로를 받고 싶어 그렇게 눈물이 멈추지 않았던 것이 아니었을까? 비로소 이제야 그때 건네지 못한 위로를 건넨다.


과연 1년 뒤 내게 올 이 편지의 내용을 기억하고 있을까?라는 생각을 하며 편지를 직원에게 건넸다. 어제의 전주가 오늘은 다르게 느껴지는 것은 아마 여행이라는 것의 묘미가 아닐까 잠시 머무는 동안 알 수 있는 건 그 동네의 일부분이겠지만 내 마음대로의 해석이 즐거운 건 오롯이 낯선 방문객이 할 수 있는 특권이 아닐까 생각해본다.


아마 오늘은 숙소로 돌아가는 길에 술 한잔을 기울여야겠다. 아무와도 이야기하지 않아도 좋을 선술집을 검색해본다. 아마, 마지막 전주의 밤은 조금은 길 것 같다.

작가의 이전글 7. 조선에 당도한 것을 환영하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