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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느리미학 Apr 09. 2021

10. 왕이 사랑한 정원

석파정

여행자가 되면 으레 자연스러워지는 일이 있다.

누가 깨우지 않아도 새벽녘 저절로 눈이 떠진다든가, 저녁 늦게 보고 싶은 영화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저절로 감기는 눈꺼풀 정도. 이 두 가지는 여행 내내 꽁무니 쫓듯 나를 쫓아다녔다. 한산한 아침을 맞이하며 늦잠을 자고 싶었지만 감겨있는 눈과는 다르게 벌써 잠이 달아난 정신 탓에 힘겹게 눈꺼풀을 추켜올렸다. 정신도 차린 김에 일찍 준비하고자 방문을 열어 욕실로 향하던 찰나, 아직 아무도 쓰지 않아 햇살만이 조용하게 반짝이는 거실 바닥 한가운데 착한 고양이가 배를 깔고 누워 내리쬐는 햇볕이 따갑지도 않은지 온몸으로 받아내고 있었다.


짐을 다시 챙겨야 했다. 전주보다도 더 짧은 여행길. 하루만 묵기에는 아쉬웠던 이곳을 뒤로하고 다른 여정을 떠나야만 했다. 어쩐지 여유롭지 못한 여행이 되어버린 것 같았지만 어쩌랴, 이것 또한 여행의 묘미인 것을. 빠진 것 없나 살펴보며 짐을 꾸리자 밖에선 조심스럽게 소란이 일었다. 아마 주인 할머니가 깬 것 같았다. 굿바이 인사를 전할 수 있어 마음이 조금이나마 놓였다. 짐을 챙겨 들고 거실로 나오니 무엇을 준비하고 있는지 분주한 할머니의 뒷모습을 보고 넌지시 불러본다.


"저, 이만 가보겠습니다."

조심스러운 작별 인사에 깜짝 놀라신 할머니가 뒤로 돌며 당황한 표정을 내비치신다.


"벌써 가게?! 지금 아침 준비하는 중인데…. 얼마 안 걸리는데 조금 먹고 가면 안 될까요?"

친절한 할머니. 또다시 이름 모를 포근한 분위기에 휩쓸려 한 켠에 짐을 두고 근처 의자에 자리 잡아 앉았다. 이제 어디로 여행 가냐는 질문에 자고 있던 따님이 혹시라도 깰까 싶어 서울에 간다고 조심스레 답했다. 뒤이어 향이 좋은 캐모마일 차와 함께 잘 구워진 토스트, 그리고 그 옆에 나란히 줄지어 있는 노랗고 하얀 스크램블이 담긴 접시가 내 앞에 차례대로 놓였다. 할머니가 미안한 기색을 내비치며 차린 게 얼마 없다고 말씀하신다. 손사래를 치는 대신, 감사하다는 말을 진심 담아 전했다. 


하루 머무는 손님이 혹시라도 불편해하지는 않을까 이래저래 살피는 모습을 보고 저절로 마음이 가 닿았다. 하루, 할머니의 집을 놀러 온 것 같다는 말과 함께 다시 수원에 오게 된다면 이 숙소에 다시 머물겠노라 말을 건네자 사춘기 소녀만큼이나 볼이 발그레해진 할머니는 세상 무해한 웃음을 지어 보이며 아무 말 없이 내 손을 살포시 잡았다.




혹시, 아침 지옥철을 경험해본 적이 있는가?

이와 비슷하게 나는 '지옥 버스'를 종종 경험해본 적이 있다. 친절하지 않은 운전기사가 무자비하게 잡아대는 브레이크와 함께 몇 번이고 넘어질 뻔한 아침의 버스는 지옥이 따로 없다. 사람들은 서로를 의지해 제멋대로의 버스 안에서 살아남는다. 혹여 압사를 당하지 않을까 걱정한 적도 사실 종종 있다.


여덟 시쯤, 헤매다 도착한 지하철역에서 서울로 향하는 기차에 몸을 실었다. 아직까진 한산한 기차 안에서 손잡이를 움켜잡은 채 출발하기를 10분 정도 지났을까? 순간 사람들이 우르르 기차 안으로 쏟아졌다. 오가는 짜증 섞인 표정 속에서 점점 설 자리를 잃어가자 짐칸으로 가방을 올려두고 손잡이를 겨우 부여잡았다. 아직 30분은 더 가야 하는데 정류장마다 나가는 사람 하나 없이 들어오는 사람만 추가되는 기차 안에서 정신 또한 잃지 않게 애쓰며 버텼다. 그나마 버스가 아닌 기차라, 급브레이크에 놀랄 일 없다는 것이 싱거운 위로가 돼주었다.


낙산공원 성곽길 옆으로 숙소를 잡았다.

높다란 언덕길 위에 위치한 3층짜리 작은 빌라. 입구에는 아기자기한 손글씨로 '게스트 하우스'라고 적혀 있었다. 다시 하루, 방 한 칸을 빌렸다. 사람 좋아하는 착한 강아지 두 마리와 그 곁을 조용히 지키시는 할머니 그리고 인상 좋은 중년 부부가 사는 집이었다. 체크인 시간도 되기 전 짐을 맡기러 온 손님이 귀찮지도 않은지 연신 웃는 낯으로 커피며, 과자며 내어주신다.


복도 많지. 여행을 떠나오기 전 했던 걱정들이 무색하게 햇살은 내내 반짝였고, 만나는 이들은 모두 내게 친절했다. 호스트 아주머니는 커다란 창이 내어진 침실로 안내했다. 창 건너편에는 기다랗게 내어진 성곽길이 끝도 없이 뻗어져 있었다. '숙소 하나는 기가 막히게 예약했군!' 하며 별안간 속으로 생각했다. 그 속내를 알아차리기라도 한 듯 아주머니는 '밤이 되면 불이 켜지거든요? 그럼 얼마나 예쁜지'라는 말을 덧붙여 주신다.


석파정에 가기로 했다.

흥선대원군의 옛 별장과 아름다운 정자가 있는 이곳은 서울미술관 3층에 위치해 있다. 미술관 안으로 들어가 3층으로 오르는 엘리베이터와 계단을 통해야지만 비로소 마주할 수 있다. '왕이 사랑한 정원'으로 정의되는 석파정은 꽤 재미있는 일화가 하나 있다. 본래 김홍근이라는 문인의 별장이었던 이곳을 흥선대원군이 무척이나 탐을 내었다고 한다. 해서 김홍근에게 팔라고 요청했지만, 매번 거절당하자 그 당시 임금이자 자신의 아들인 고종과 함께 다시 방문하여 하룻밤을 묵었다고 전해진다. 본래 성리학 예법에 따르면 임금이 묵은 곳은 신하가 계속해서 살 수 없었기에 결국 김홍근은 흥선대원군에게 별장을 넘겨주었다고 한다. 주변을 대충 둘러봐도 충분히 탐이 날 만한 공간이었다. 온통 초록빛으로 둘러싸인 이곳은 어디를 바라보나 절경이었다.



녹음이 짙은 나무 사이로 고즈넉한 모습의 한옥이 조화를 이루고 있었다.

창밖으로 설핏 보이는 나무는 아주 오래된 소나무라고 한다. 지지대가 없으면 곧 쓰러져 버릴 것 같은 이 위태로운 이 나무의 나이는 650살로 추정된다고 한다. 얼마나 오랜 세월 동안 사람들의 삶을 바라보며 살아왔을까. 


새가 지저귀는 소리가 흥겨운 노랫가락으로 들려온다. 고요한 구름 틈새로 이내 햇빛이 비치었다. 잠깐 시간을 내어 근처 벤치에 걸터앉아 이 공간이 주는 분위기를 조금이나마 느껴본다. 낙낙하고 여유로운 시간. 선선한 바람도 때마침 살랑거리며 불어온다. 바람결에 나뭇잎이 흩날리는 소리와 이따금 들려오는 사이좋은 가족들의 말소리, 순간 시간이 잠깐 멈추어도 좋단 생각에 빠진다.


세상에 시름을 피해 어쩌면 누구도 들이지 않고 오롯이 혼자만 방문했을 이곳.

계곡이 흐르는 물소리, 가만히 바람이 넘나드는 소리, 그리고 덤으로 주어지는 햇볕까지. 마음속 깊이 위로가 되어주지 않았을까? 시끄러운 생각은 잠시 접어놓고 오솔길을 따라 하염없이 시야 속으로 쏟아지는 풍경을 바라보며 걸었을 것이다. 그리고 비로소 홀로 이 있을 수 있었던 곳일지도 모를 석파정에 다다르면 흐르는 물줄기 소리만이 벗이 되어주고, 흩날리는 초록의 빛깔만이 안주가 되어줬을 것이다. 곪아있던 생각 따위는 머물 수 없는 이곳을 흥선대원군은 아마 정말로 사랑했을 것이다.



그런 생각을 하며 석파정에 다다랐다.

조용히 들려오는 시냇물의 소란스러움에 나도 모르게 얼굴에 웃음이 일었다. 증심사에서 마주했던 시냇물과는 또 다른 소란스러움. 오가는 객의 생각을 방해할세라, 조심히 물꼬를 튼 시냇물들은 소곤소곤 줄지어 잘도 흘러갔다. '흐르는 물소리 속에서 단풍을 바라보는 누각'이라는 뜻의 '유수성중관풍루'라고도 불리는 이곳은 4면이 모두 시원하게 뚫려있다. 어느 각도로 보나 모든 곳이 그림이 된다. 바깥세상과는 다른 풍경에 길 잃은 방랑자처럼 보았던 곳을 또다시 바라본다. 끝없이 펼쳐진 무수한 빛깔의 착각 때문일까. 온종일 이곳에 앉아 천천히 오는 밤을 마주하고 싶었다.


왕이 사랑한 정원, 석파정은 늘 그렇게 기억되어 올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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