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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 상냥함 한 조각

by 느리미학

누군가 살고 있는 집의 방을 하루 빌려 산다는 것은 내겐 너무도 생경한 일이다.

방이 세 칸 정도, 널따란 창을 낸 거실과 좋은 색감의 부엌이 나 있는 집이었다. 시린 바람이 무색할 정도로 소파 등 뒤에선 한줄기 볕이 쏟아져 내리고 있었으며, 부엌 바 테이블에는 심플한 디자인의 바 스툴이 부엌과 조화를 이루며 자리 잡고 있었다. 곳곳에 초록빛의 난초 혹은 이름 모를 꽃들이 무성히 자리 잡고 있었으며 낯선 이가 이미 익숙한지 발끝에서 고개를 두어 번 주억거리는 작고 귀여운 고양이 한 마리도 갸르릉 거리며 기분 좋은 소리를 내고 있었다.


센과 치히로의 행방불명이라는 애니메이션 영화가 있다. 내가 가장 좋아하는 장면이 하나 있는데 유바바의 쌍둥이 언니인 제니바의 집으로 주인공 센과 가오나시, 보우와 유버드가 찾아가는 장면이 있다. 서두를 것 없다며 따뜻한 차를 끓이고 달큼한 디저트를 정성스레 내온다. 투박하지만 살아온 흔적이 묻어있고 소박하지만 아주 소중한 것들이 곳곳에 자리를 지키고 있는 제니바와 꼭 닮은 집. 어쩐지 이곳과 많이 닮아 있는 듯한 착각이 일었다. 바깥의 차가운 바람 덕에 꽁꽁 얼어있던 뺨이 어느새 집의 온기에 녹아내린다.


저녁 시간 외출에서 돌아온 호스트는 인상 좋은 할머니였다.

반갑다며 내게 인사를 건네주시는 할머니의 표정은 무척이나 다정해 보였다. 부랴부랴 짐 정리를 하며 내게 좋은 커피가 있다며 잠시 기다려달라 부탁했다. 그 분위기에 이끌렸나, 평소 같았으면 거절하고 방에 들어가 혼자만의 시간을 멀뚱히 보냈을 텐데 그 순간의 분위기가 마음에 들어 엉덩이를 붙이고 가만히 분주한 모습을 지켜보았다. 한사코 도와줄 것 없다는 말만 하시며 이내 좋은 향이 나는 커피를 내어주신다. 쌉싸래하지만 향미 깊은 커피를 호호 불며 한 모금, 두 모금 마시고 있을 때 어디에서 여행 왔냐는 물음에 조용히 '제주에서 왔어요'라고 대꾸하자 그 말에 반색하며 '웰컴 투 수원!'이라며 작은 농담을 건넸다. 그 말에 쑥스러워져 혼자 웃고는 오후에 다녀왔던 융릉과 건릉에 대한 이야기를 나눴다. 수원에 오랜 기간 살면서 그곳은 미쳐 가볼 생각을 못 해봤다며 말주변도 없이 장황하게 늘어놓는 내 이야기를 듣고 있던 할머니는 간간이 맞장구도 쳐주며 꼭 가보겠다고 신신당부를 하신다.


어린 시절 내겐 조부모님이 두 분 다 안 계셨다. 누군가 할머니가…. 혹은 할아버지가…. 하는 대화를 할 때면 한 번도 보지 못했던 조부모님을 떠올리곤 한다. 나와 눈을 마주치며 이따금 웃기도 하며 손녀에게 자신의 여행담을 들려주듯 어떨 땐 큰 목소리로, 어떨 땐 소곤거리는듯한 작은 목소리로 이야기보따리를 늘어놓는 모습을 보며 아마 지금 할머니가 있었다면 이런 느낌일까 간접적으로나마 짐작해본다.


아마 투박하지만 말 한마디, 한마디에 애정이 깃들어 있을 것이다.

어느 추운 날 눈이 소복하게 쌓일 무렵 부러 찾아온 손녀를 귀찮아하지 않고 감기에 걸릴세라 자기가 메고 있던 스카프를 둘둘 내 목에 둘러 주고는 방으로 들어가 미적지근하던 보일러 온도를 세게 높여주겠지. 밥도 안 먹고 뭐 하고 돌아다니는 거냐며 툴툴거리지만 이내 부엌으로 들어가 아껴두었던 생선이며, 고기며 할 것 없이 튀겨주고는 고봉밥과 함께 한 상 가득 차려와서는 부족하면 본인한테 꼭 말하라며 묵묵히 안방으로 들어가 앉아 텔레비전을 보는 척하면서 손녀의 밥 먹는 모습을 오랫동안 지켜볼 것이다. 아마 내게 할머니가 있다면 이런 느낌일 것 같다.


저녁 산책 겸, 혼술도 곁들일 겸 숙소 밖으로 종종 걸어 나왔다.

오래 지난 것도 아닌데 생생히 기억에 남는 건 그때 마신 단술도, 뭔지 모를 쌉싸래한 맛이 진하게 여운이 남는 나중에서야 알게 된 은행 열매도 아닌 불그스름해진 볼을 감싸 쥐며 숙소로 돌아가던 길 시원하게 트인 창 사이로 오렌지색으로 은은히 빛이 나던 공방이었다. 골목길 오롯이 그곳에만 불이 싸져 비가 오면 이리로 피해 주세요-. 하는 듯한 그곳은 드라마 '사랑의 온도'를 떠올리게 했다. 남, 여 주인공이 조깅 동호회에서 만나 조깅을 하던 도중 길을 잃어버린다. 설상가상, 비까지 내리는데 세차게 내리는 비를 피해 골목 어귀 한 가게 앞에서 둘은 비 긋기를 한다. 순간 분위기가 이끌었나, 남자는 여자에게 '사귈래요?'라고 묻는다. 돌아오는 대답은 '미쳤어요?'. 비는 오지 않아 아쉬웠지만 공방 앞에서 그 장면을 잠시 떠올리면 알 수 없는 비 젖은 흙내음이 진동한다.


남은 술기운이 아쉬워 맥주와 간단한 먹을거리를 사 들고 조용히 방 안으로 들어왔다. 두런두런 이야기하는 소리가 이따금 간간이 들려온다. 지내는 손님이 시끄러워 잠 못 들까 조용히 이야기를 나누는 두 모녀를 보며 문득 엄마가 보고 싶어 졌다. 조용히 핸드폰을 들고 전화를 건다.


뚜르르- 뚝.


수화기 저 너머에서 들려오는 '딸!'이라는 말을 듣자마자 주책맞게 눈시울이 붉어진다. 울음이 가득 섞인 목소리를 들키지 않으려 목을 두어 번 가다듬고 잘 도착했다고, 잘 자라며 저 혼자 질문만 하고 굿나잇 인사를 빠르게 건넨다. 늘 그래 왔다. '가족'이라는 단어는 날 울리기에 충분했다. 못난 딸, 누나, 언니를 둬서 늘 미안하고 고마웠다. 그래서인지 나도 모르게 가족 이야기를 하다 보면 어느새 대성통곡을 하고 있을 때가 제법 많다.


조금 방 안이 더워진 느낌이 들었다. 아마 술기운 탓일 것이다.

바람을 쐬고 싶어 침대 옆 큰 창문의 문을 열고 고개만 빼꼼히 내밀어 본다. 촘촘히 빛나는 별이 우수수 나의 시야 안으로 쏟아져 내린다. 맞은편에는 높다란 건물들이 빽빽이 자리 잡고 있었지만, 술기운 탓이었을까? 그곳에서 나오는 빛을 난 촘촘한 별이라고 우기고 있었다. 아마 오늘 하루 동안 마주했던 것들 모두가 다 마음에 오래 남아 그렇게 생각했을 것이다. 시간이 흘러 현재까지도 난 별빛같이 쏟아져 내리던 그 무수한 빛을 기억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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