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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느리미학 Apr 10. 2021

11. 내 오랜 벗이여.

호호식당

내겐 만나면 편안한 친구가 몇 있다.

몇 년 만에 만나도 어제 만난 사이처럼 스스럼없이 서로를 대할 수 있는 친구가 제주를 떠나 서울에서 생활한 지도 거의 8~9년 정도 지났을 것이다. 아무런 이야기를 나누지 않아도, 대화의 빈 괄호가 있어도, 그 빈 괄호조차 편안한 친구. 누군가의 험담도, 누군가에 대한 평가도 없이 그저 서로의 삶이 어땠고 최근 본 책과 영화가 재미있었으며, 굉장한 곳에 다녀와 봤다는 말들을 나누어도 사춘기 여고생으로 돌아간 것 마냥 고민 하나 없이 까르르하고 웃을 수 있는 친구가 내겐 있다.


만나자마자 그녀는 내게 부러 묻는다. 

"숙소 잡았어?" 잡았다고 말하자 실망한 기색이 역력했다. 번번이 서울 올 때면 귀찮지도 않은지 자신이 사는 집에서 자고 가라 말해준다. 혼자 사는 집이 아닌데도 불구하고 매번 염치없이 신세를 질 때도 있다. 그녀가 발산하는 에너지는 초록과 노란빛이 난다. 이따금 조금 어두운 그늘 빛도 보이지만 그런 색들조차 타인을 즐겁게 하는 무언가가 있다. 어느 날, 다니던 직장을 관두고 그녀는 하고 싶은 것이 생겼다며 학교에 다녔다. 그리고 지금까지도 그 꿈을 영위하고 있다. 좋아하는 것이 힘들어질 때쯤 그녀는 또 다른 무언가를 배운다. 그리고 후회 없이 공부하고, 연습하고, 끊임없이 사랑한다. 대가 없이 그녀는 늘 내게 좋은 에너지가 되어준다.


무엇을 하지 않아도 좋은 대화가 오고 갔다. 사는 일이 팍팍하다며 삶을 논하기도 하며, 어디를 다녀왔는데 정말 좋다더라 한 심심하지만 사소하고 소중한 이야기들을 혜화 거리를 거닐며 나눴다. 마주한 길을 또 마주해도 다시 돌아가 말의 물꼬를 트고, 막힌 길목이 나오면 뒤돌아 서로 마주 보고 까르르 한번 웃고 다른 말의 물꼬를 튼다. 부러 무슨 말을 해야 할지 생각하지 않아도 자연스럽게 이 이야기에서 저 이야기로 물 흐르듯 잘도 흐른다.


호호식당이라고 있다.

일본 가정식으로도 유명한 이 식당은 정감 있는 이름과 꼭 닮은 모양새를 띄고 있다. 규모가 그리 크지 않은 한옥을 개조해 만든 것 같은 식당. 유명세에 걸맞게 식당 안은 가득 차 있었다. 빼꼼 문을 열어 들여다보니, 두어 팀 정도 기다리고 있었다. 줄이 길면 돌아가자고 할 참이었지만 두어 팀 정도면 기다릴 수 있다며 웃어 보이고 친구와 함께 따뜻한 램프 아래쪽으로 자리를 잡았다. 한옥 안 마당은 좁았으나 여유로움이 깃든 곳이었다. 한가운데 내리쬐는 햇살이 푸른빛의 이름 모를 꽃과 난초들 그리고 그사이 숨어있는 잡초들까지 반짝이며 비춰주었다.


기다리는 객이 추울까 친절하게 담요를 준비해두는 이곳. 정갈한 한옥에서 인자한 호호 할머니가 튀어나와 추우니 빨리 들어오라며 재촉할 것만 같은 분위기와 식당 안 사람들의 느긋함과 저마다 이유 있는 행복한 미소를 보니 어서 들어가 저곳에 빨리 합류하고 싶었다.


커다란 창을 내어 빛이 잘 드는 자리로 안내받았다. 안은 밖에서 보는 것보다 더 협소해, 사람들과 부딪칠세라 조심히 들어섰다. 창밖에선 우리가 기다렸던 인원보다 훨씬 더 많은 인원이 제각각 자리에 걸터앉아 두런두런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정갈한 음식 사진이 담긴 메뉴판을 한참 동안 들여다본다. 메뉴가 많기도 많다. 어느 것 하나 대충 만들어 낼 것 같지 않은 이 식당에서 무엇을 먹어도 좋을 것이라고 잠깐 생각했다. 그렇게 군침을 흘리며 메뉴판을 들여다보다 어느 한 곳에 시선이 머물렀다. '부드러운 돼지고기와 달큰한 무의 만남'이라는 설명이 나를 홀렸나? 고민하지 않고 부타가쿠니 정식으로 메뉴를 정했다. 한국말로 번역하자면 일본식 돼지고기 장조림 정도 되겠다.


음식을 기다리는 동안 서로의 안부를 다시 묻는다.

했던 이야기들을 더 딥하게 나눠본다. 순간 친구의 핸드폰이 잠깐 울렸다. 이내 그녀는 미안한 기색을 내비치며 핸드폰을 든다. 


"점심시간이 아니면 남자 친구와 연락할 수가 없어서…. 정말 미안해"

라는 말과 함께 핸드폰 자판을 꾹꾹 눌러 메시지를 전송해 보낸다. 아마 친구는 좋은 사람을 만났을 것이다. 비 오는 날, 우산이 없다 하면 잠깐 기다리라며 헐레벌떡 다 젖은 채로 뛰어와 우산을 씌어줄 테고, 날씨가 좋으면 부러 집까지 찾아와 좋은 곳으로 데려다 줄 사람을 만났을 것이다. 부러 묻지 않아도 그녀의 표정이 대변해주고 있었다. 어린아이처럼 웃음기 서린 얼굴로 그에게서 온 메시지에 까르르 웃기도, 실망한 기색을 내비치기도. 수백 가지의 표정을 지어 보인다.


얼마 지나지 않아 예쁜 식기에 담긴 정갈한 음식들이 나왔다.

하얗고 고슬고슬한 밥과 부드럽게 졸인 무와 돼지고기. '같이 먹으면 더 좋답니다' 싶은 초록빛의 와사비와 노랗고, 빨갛고, 초록의 단무지와 피클 그리고 매실장아찌까지 어느 것 하나 정갈하지 않은 것이 없었다. 포슬포슬하게 익은 무를 한입 크게 베어 문다. 맛을 느꼈나 하는 순간 뭉개져 입속 저편으로 순식간에 사라져 버린다. 입안엔 떠날 줄 모르는 간장의 짭조름함과 달큰한 맛이 진하게 남는다. 그 옆으로 시선을 옮겨 부드러운 돼지고기를 와사비와 함께 먹어본다. 역시 입안으로 뭉개져 쥐도 새도 모르게 사라져 버린다. 찬으로 나온 삼색의 것들 또한 삼삼하여 밥과 함께 먹지 않아도 짜지 않아 좋았다. 오랜만에 좋은 식사 시간이었다.


유명해지기 전에는 아는 사람들만 아는 곳이었을 것이다.

어느 날, 막 오픈한 가게를 발견한 미지의 손님은 정갈한 주인의 음식 솜씨에 속으로 나만 알고 싶다고 생각하며 누구에게도 누설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 손님은 종종 먹어보지 않았던 메뉴를 맛보러 가야 한다는 핑계로 방문했을 것이다. 햇빛이 비치면 내리쬐는 볕을 이유 삼아, 비가 오면 추적추적 내리는 쓸쓸함을 이유 삼아 허기진 배를 쥐고 찾아와 창가 쪽으로 앉아 이따금 내리쬐는 햇볕에 반짝이는 꽃을 보기도 하며, 소리 없이 찾아온 빗줄기가 꽃의 잎사귀를 거세게 내리치는 것을 보기도 하며 주문한 음식을 기다렸을 것이다. 이내 정성스레 내온 음식을 오랫동안 좋아했던 그 손님은 아직 종종 이곳에 방문할까? 혼자 상상을 해본다. 마주한 친구를 보니 아마 나와 비슷하거나 같은 생각을 하는 것 같아 웃음이 일었다.


무엇을 말하려 들지 않아도 서로의 마음을 알고, 대화가 이어졌나 싶은 순간 다른 대화로 이어져 누구 하나 지적하지 않으니 온전히 음식의 맛과, 기분 좋은 포만감을 느낄 수 있었다. 시간이 지나 서로 나이가 들어 걷는 것이 불편해져도, 좋은 음식을 낸 식당을 찾아 지금과 같은 이야기들을 나누며 그녀와 밥을 먹고 싶다는 생각을 해본다. 아마 그때가 되면 서로 좋은 인연과 한평생을 살고 있거나, 혼자서도 좋은 인생을 지내고 있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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