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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느리미학 Apr 23. 2021

12. 달이 비치는 연못

동궁과 월지 (안압지)

나의 학창 시절, 일부분엔 경주가 자리 잡고 있다. 수학여행지의 꽃인 경주에서는 늘 아무것도 사 오지 말라는 부모님의 말씀을 뒤로한 채, 굳이 기념품을 하나둘 사 갔다. 효자손부터 시작해 얼마 안 가 쇠젓가락으로 돌아설 걸 알면서도 옻칠한 나무젓가락을 부러 사 갔다. 그 시절 꽃무늬가 그려진 부채는 어찌나 그리 예뻐 보이던지, 나무로 된 칼은 또 어찌나 비범해 보이던지! 한 푼, 두 푼. 돈이 줄줄 새어 나가는 줄도 모르고 사다 보면 짐은 한가득이다. 부모님이 쥐여 준 돈으로 마음껏 군것질하는 대신, 착하게 기념품을 사 오는 아이들은 아마 시간이 흘러 어른이 되면, 자신과 꼭 닮은 아이를 낳은 부모가 되어 있겠다. 우리 부모님도 그러했으리라.


늦은 오후쯤 도착한 경주는 벌써 저녁노을을 품고 있었다. 숙소에 짐을 풀어 잠시 밤이 오기를 기다렸다. 경주엔 천천히 밤이 내리면 비로소 수면 위로 떠 오르듯, 말 그대로 잔잔하게 화려해지는 곳이 한 군데 있다. 아마 오는 내내 그 모습을 그리며 설렜을 것이다.


입구에 들어섰을 뿐인데 기분 좋은 바람과 함께 숲 냄새가 진하게 섞인 물 내음이 코끝을 빠르게 스쳤다. 밤이 내려앉은 공간엔 이름 모를 꽃과 들풀 그리고 무수히 자라난 나무의 색이 고요하게 담겨 있었다. 조용히 연못을 품은 누각이 서서히 시야에 들어온다. 반짝이는 불빛 사이로 보이는 '동궁과 월지'. 이곳은 신라 시대 연회가 열렸던 왕궁의 별궁 터로 '안압지'라는 명칭으로 잘 알려져 있었다. 안압지라는 이름을 갖게 된 재미있는 이유가 하나 있는데, 신라 멸망 이후 관리가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아 수풀이 무성하게 자라난 이곳에 기러기와 오리 떼가 날아 들어와 터를 잡았다고 한다. 해서 붙여진 기러기 안(雁), 오리 압(鴨), 못 지(池)의 뜻을 품고 오랫동안 안압지라는 이름으로 불리고 있었다고 한다. 그 이후 동쪽의 궁궐과 달이 비추는 연못이라 하여 원래의 '동궁과 월지'란 이름을 되찾았다고 한다.


오래 걷지 않아 초록빛의 무수한 공간이 나온다. 널따랗고 잘 정리된 빈터도 저마다 자신의 공간을 차지해 조화를 이루고 있었다. 본래 26동의 건물이 빈 터 곳곳에 존재했으나, 수많은 역사를 거쳐오면서 지금은 3개의 전각만이 고즈넉이 남아있다. 잠시 빈터를 한참 동안 바라보며 그 시대의 풍경을 상상해본다. 아마 그 시대를 닮은 화려함이 빛을 받지 않아도 반짝였을 것이다.


유독 날씨가 화창했던 그 날은 달빛도 가는 길을 비춰주듯 환하게도 떠 있었다. 날씨가 좋으니 삼삼오오 사람들이 몰려들었다. 아직 그리 깊지 않은 밤, 사람들은 저마다의 이유를 가지고 방문했다. 초록빛의 냄새가 여전히 코끝을 간지럽혔고 그것은 나뿐만이 아닌지 사람들은 이따금 멈추며, 걸으며, 어디가 배경이 되어도 좋은지 사진 속에 추억을 담으며 천천히 산책하듯 나아갔다.


전주와 또 다른 흥성거림 속 물론 여전히 나 혼자였지만, 어쩐지 마음은 그때와 조금 달랐다. 아마 오롯이 전각과 그것을 비춰주는 연못과 그리고 무성히 자라난 이름 모를 풀과 나무들만이 즐비해 있으니 부러 무엇을 사 먹거나, 체험한다거나 하는 일 없이 그저 그 공간이 주는 무언가를 느끼러 온 객들이라 외롭지 않은 공간이라고 느낀 것일까. 이따금 이런 무해한 생각들을 해가며 천천히 발걸음을 내디뎌본다.



못 위로, 한 폭의 그림이 그려지듯 전각의 모습이 내비친다. 그 모습을 보고 홀린 듯 주변 사람들처럼 자리 한 켠을 잡아 한참이나 내려다보았다. 연못 아래엔 또 다른 이곳과 같은 공간이 존재하는 것일까? 맑은 물빛에 비추는 달과 전각만이 알고 있는 그곳에 나도 몰래 방문해보고 싶었다.


적요히 흐르는 밤, 태자는 무엇을 생각하며 이곳을 지나왔을까. 혼자만의 생각을 정리라도 하는 듯 모두가 잠든 그 공간을 홀로 하염없이 헤매어 걷다가 문득 물빛에 비춘 전각과 달을 번갈아 바라보며, 속에 품은 쓰고 독한 술을 한 모금 마시지 않았을까? 사랑하는 이가 있었던 것일까, 무에 걱정이 서린 눈빛으로 오래도록 형태 없는 그림자를 바라보며 영영 이대로 아침이 오지 않았으면 좋겠다는 생각도 종종 했을까? 그러다 다시 한 모금. 무거워진 걱정을 조금이나마 덜어낼 겸, 전각 아래로 다시 비추는 그림자를 보는 태자의 모습이 두서없이 떠오른다.


나도 그의 마음처럼 아침이 오지 않았으면 싶었다. 내내 이곳을 바라보며 끝도 없는 생각에 잠기더라도 주변이 밝아지는 일 없이 어두운 이곳에 홀로 이, 앉아 있고 싶었다. 생각에 생각이 꼬리를 물고 늘어져도 좋을 밤이었다. 조금은 가라앉은 마음이 어쩐지 되려 편안하게 다가왔다. 오래도록 이 편안한 마음을 담아두고 싶은 마음이 이따금 날아든다. 여운을 남기고 가기엔 너무도 아쉬운 이 공간을 숙소로 향하던 길에 무수히도 떠올렸다.


그날 밤, 사진에 담은 그곳을 오래도록 쳐다보며 또다시 생각의 나락 속으로 빠져들었다.

아마, 달빛이 내내 나를 홀린 것이 분명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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