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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느리미학 Apr 24. 2021

13. 잠시 속세를 벗어난 방랑자

불국사

아침 볕은 여전히 추웠지만, 따뜻했다.

내리쬐는 볕을 조금이나마 맡으려 숙소 커튼을 치니 한 줄기 빛이 숙소 바닥으로 내려앉았다. 밖에선 이미 부지런한 사람들이 재잘거리며 숙소 앞 공원을 빙빙 둘러 걷고 있었다. 냉장고 한 켠에 어젯밤 사다 놓은 차가운 커피를 꺼내어 들고 한 모금 마시며 그들이 하는 이야기에 잠시 귀 기울였다. 사는 이야기를 한다거나, 누가 그랬다더라 하는 이야기 없이 그저 제 발 앞에 핀 들꽃의 이름이 무엇일까 하는 사소한 이야기들을 나누고 있었다.


아침 새벽까지는 아니더라도 조금 이른 아침. 부지런히 움직여 불국사로 가는 버스에 몸을 실었다. 불국사도 한 켠에 역사가 있다. 신라 시대부터 지금까지 수천 년의 시간 동안 여러 시간을 거쳐오며 지금의 모습이 된 불국사는 조선 시대 임진왜란이 발발하면서 방화로 인해 크게 불타 사라졌었던 적이 있다. 그 방화사건은 처음부터 절을 파괴할 목적이 아닌, 당시 일본 병사들이 '굉장한 절이 있다'며 구경 왔다가 절에 보관 중이던 대량의 무기를 발견하고 '아름다운 꽃일수록 맹독을 감추고 있다'면서 공격한 것이라고 전해져 온다. 이후, 조선 영조 시절 다시 재건하려는 노력이 있었으나 사실상 폐허가 되고 이후 일제강점기 시절 임시로 복원되었다가 광복 후, 대규모 복원이 이루어져 지금의 모습을 하고 있다고 한다.


여행 전 역사를 배워오면서 보고 싶었던 문화재가 유독 몇몇 있었는데, 그중 하나가 불국사이기도 했다. 버스 정류장에 다다르면 맞은 편에 바로 주차장이 보인다. 돌계단을 타고 언덕 위로 조금 오르면 비로소 불국사의 입구가 보이기 시작한다. 꼬마가 재잘거리는 소리가 벌써부터 귓가에 맴돌았다. 사이 좋은 가족과 몇몇 중년 부부. 사람이 몇 되지 않는 거리엔 조용한 활기가 돌았다. 시간이 흘러 기억에서조차 희미해진 나의 학창 시절 수학여행의 불국사는 빛이 바래 기억 속 깊은 바닷가로 가라앉은 지 오래요. 현재 마주하고 있는 불국사의 모습이 나의 생 첫 번째 경험이라고 마음으로나마 우겨본다.


작은 못을 지나니 비로소 짙은 초록의 녹음으로 둘러싸인 커다란 불국사의 모습이 보였다. 경내 안으로 들어가기 전, 조그마한 동산길을 지나쳐야 한다. 온통 이름 모를 나무 사이로 볕이 빼꼼히 존재감을 내비친다. 어쩐지 영롱한 그 공간을 사박사박 밟으며 지나가 본다. 사람이 별로 없으니 조용한 그 길목은 온전히 나만의 것인 듯 내딛는 발걸음 소리마다 그 좁은 공간이 고요히 울려 퍼졌다.


경내 안으로 들어가면 대웅전 바로 앞에 다보탑과 석가탑이 제 자리를 지키며 자리 잡고 있다. 그 반대편엔 자하문의 뒷모습이 보인다. 높다랗게 돌계단으로 올려진 앞모습과는 또 다른 고즈넉함이 짙게 묻어나 있다. 그곳으로 통하는 길을 걸어 조금 전, 들어섰던 입구의 모습이 서서히 보이기 시작했다. 차가운 공기가 뺨을 스쳐 지나갔다. 근처 벤치에 앉아 사찰을 올려다보며 도란도란 이야기를 나누는 가족과 노점상에서 이것, 저것 사달라고 조용히 떼를 쓰는 아이의 모습이 시야에 들어왔다. 보면서 잠깐 생각했다. 만일 내게 아이가 생긴다면 아이가 원할 때 손을 붙잡고 이곳으로 와 나도 내가 마주하고 있는 모습의 한 컷을 내 생에 담으리라고.


이곳, 저곳을 둘러다 보면 작고 큰 전각이 여럿 보인다.

작은 문을 통해 이어진 공간들은 모두 독립된 공간처럼 무수한 풍경을 담고 있었다. 불이 켜지지 않은 등불을 품고 있는 작은 전각들이 바람이 스쳐 지나갈 때마다 기분 좋은 소리를 낸다. 수많은 사람들의 이름이 빽빽이 적혀져 있는 등불이 낯설지 않음은 매년 가던 사찰의 풍경과 꼭 닮아있기 때문일까? 바람이 스치는 길목을 따라 걸으니 순간 분홍빛의 등불을 품고 있는 '나한전'이라는 전각이 나왔다. 그 옆 누군가의 소원을 간직한 작은 돌탑들이 무수히 주변을 꾸리고 있었다. 이 작디작은 돌들을 어디에서 찾았는지, 어떠한 소원을 빌었기에 이리도 중심 잡아 잘 쌓아뒀는지 마음으로나마 의문점을 표해본다. 아마 거창하지 않아도 소중한 사람들을 위한 사소한 소원이었을 것이다. 그것으로도 충분했을 것이다. 사소한 것에서 오는 소중함이 더욱더 깊은 것이니까. 그런 생각이 들었기 때문일까 나도 작은 돌을 찾아들고 쌓아진 돌탑 위에 조심스레 놓아두고 두 눈을 감아 기도해본다. 사소하지만 소중한 소원을 빌어본다.


이제 나가려던 찰나, 순간 시야에 푸른빛의 풍경들이 쏟아져 내려왔다.



볕을 받아 더욱더 운치 있는 한 켠의 공간이 두 눈에 담겼다.

그 옆, 묵묵히 지키고 선 붉은 문이 어쩌면 내가 마주하고 온 세상과는 조금 다른 세상에 있는 착각이 들 정도로 오묘했다. 일순간 불어오던 바람이 멈추었다. 볕이 내리쬐는 공간엔 오직 나와 마주 보고선 풍경만이 자리하고 있었다. 그 순간을 사진에 담으려 무수히도 촬영 버튼을 꾹꾹 눌러댔다. 떠나는 것이 아쉬워 괜히 이곳, 저곳을 더 둘러보았다. 산새가 재잘거리는 소리가 저만치서 작게 들려왔다. 한참을 쳐다보는 객이 부담스러워서일까? 다른 목적지가 있으면 서둘러 가라는 듯이 작게 나무라는 모양새에 어쩐지 웃음이 나왔다.


그래, 가야 할 목적지가 있으니 이만 여운을 깊게 남기고 떠나마.

뒤이어 들려오던 사이좋은 가족들의 소리가 잦아들 때쯤 다음 목적지인 석굴암으로 향했다..



날씨가 오락가락하지만 낮엔 볕이 아주 좋네요 :)

다음 화 연재부터는 주 1회 (토요일)만 업로드됩니다. 조금 천천히 산책하듯 따라와 주세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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