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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느리미학 May 08. 2021

14-1. 토막글 둘, 낯선 길의 끝

선덕여왕릉

숙소로 돌아가기 전, 마지막 목적지를 향해 발걸음을 옮겼다.

불국사로 다시 돌아와 20여 분쯤 버스를 타고 달렸을까 정류장에 다다랐을 때, 조금 당황했던 것은 사실이다. 듬성듬성 나 있는 나무 자락 아래 조그마한 주차장과 두어대 세워진 차들. 허허벌판을 바라보며 제대로 찾아온 게 맞을까 잠시 생각했다. 주차장과 맞닿은 도로변엔 차가 이따금 지나치곤 했지만, 사람들은 어디로 가버린 건지 자갈길을 밟으며 서성이는 동안에도 홀로 서 있었다.


굳이 방문하지 않아도 좋을 곳이었다. 무에 아쉬워 메모장에 꾸깃꾸깃 적어둔 문화재를 눈으로 좇다가 숙소로 돌아가는 길목에 있기도 하고, 둘러보고 싶기도 하여 들린 곳이었다. 어디가 입구인지도 모른 채 도로변만 서성거리다, 기다랗게 내어진 작은 하천 둑을 따라 걷다가 누구라도 보이면 붙잡고 '어디로 가야 하나요?'하고 물어볼 참이었다. 그러다 문득 빽빽한 소나무가 채워진 길이 시야에 보였다. 혼란스러웠던 마음은 진정이 되었고 갈 곳 잃었던 발은 차츰 길을 찾아 나섰다.


걷는 내내 이따금 떠오르는 책의 구절이 문득 생각났다.

시간이 흘러도 빛이 바랜 옛 기억, 한 켠에서 무언갈 꺼내어 들 듯 조금은 희미하지만, 그것을 떠올릴 때면 무언가가 벅차올라 금세 눈물이 고이는 그런 구절, 핸드폰 한 켠에 아무리 시간이 지나도 보관될 구절 하나를 떠올렸다.


유치원 다닐 적에 놀이동산에서 처음 길을 잃고 울었을 때처럼 아마 그때 이 넓은 땅덩어리에서 길을 잃을까 봐 무서워 울었는지도 모른다 … 살아가면서 내가 지금 어디에 있고 어디로 가야 하는지 정확하게 알고 있다면 지금처럼 혼란스럽거나 불안하지 않겠지만, 우리들 대부분은 그걸 모른 채 여기저기 헤매고 있다. 그래서 나는 울면서 달렸고, 어쩌면 당신도 나처럼 울면서 달리고 있는 중인지도 모른다.

너도 떠나보면 나를 알게 될 거야 중에서



아마, 조금 전 길을 잃은 나의 모습과 인생의 길을 잃었던 나의 모습이 겹쳐 보였기 때문일까 그래서인지 문득 이 구절이 떠올랐나 보다. 어디로 가야 할지 몰랐었던 혼란스러운 마음이 못내 두려웠다. 결정은 해야 했으며 되돌아가도 누가 뭐라 하진 않겠지만, 그것 또한 나의 책임이 따른다. 무엇을 선택하든 책임이 따르니 두려움이 내내 쫓아온다. 마음 가는 대로 척척 찾아가다 이런 문제에 부딪칠 때면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는 현재의 내 모습이 어릴 적 무수한 고민으로 밤을 지새던 나의 모습과 겹쳐 보여 조금은 안쓰럽기까지 했다.


지금도 그때의 생각을 종종 한다.

마음 맞춘 대로 버스정류장에 내려 만일 길 따라 헤매지 않고 목적지를 찾았다면 나는 과연 이 구절을 떠올렸을까. 그때의 나 자신을 되돌아봤을까. 아마 대답은 '아니오'이겠다. 낯선 길에서 길을 잃을 때면 우리는 종종 보이지 않았던 내면의 자신을 되돌아볼 때가 있다.


빽빽한 소나무길로 된 공간을 조금 올라가야 나오는 선덕여왕릉을 마주하러 부지런히 움직였다. 

신라의 제27대 왕이자 최초의 여왕인 선덕여왕의 무덤. 이곳에도 작은 이야기가 깃들어 있다. 선덕여왕은 자신이 죽으면 '도리천'에 묻어달라고 명했다. 하지만 신하들은 그 위치를 몰라 다시 묻자 '낭산의 남쪽'이라고 답했다고 한다. 그녀의 유언대로 낭산에 묻은 이후 33년이 지나 신라 30대 왕인 문무왕이 낭산 기슭에 '사천왕사'를 지었다. 불교에서는 '사천왕천 위에 도리천이 있다'라고 하는 말이 있는데, 사천왕천을 상징하는 사천왕사 위에 바로 선덕여왕의 무덤이 있으니, 그곳이 바로 도리천이 되는 것이다. 신하들은 그제야 선덕여왕의 유언을 깨닫고는 크게 감탄했다고 전해진다. 세상에, 본인이 묻힐 자리를 예언하다니 물론 역사적 비유겠지만 언제 알아도 역사에 얽힌 설화는 읽는 재미가 톡톡하다.

*도리천 : 불교용어로 33천 가운데 수미산 꼭대기에 위치해 제석천이 머물고 있다는 이상세계

*제석천 : 불법의 수호신. 12천의 하나로 동방을 지킨다.


빛이 바랜 황토색의 흙길을 걸었다. 온통 조용한 숲 가운데 바람이 지나는 소리가 이따금 들려온다. 새가 지저귀는 소리에 나도 모르게 위를 쳐다보기도 하며 조금씩 나무 사이로 내리쬐는 볕을 맞으며 이대로 길의 끝자락이 나오지 않으면 어쩌나 조금 조급해하며 걸었다. 듬성듬성 나 있는 소나무들의 안내를 받으며 나아갔다. 스산하다거나 하는 일 없이 아름드리 소나무 숲속은 고요히 아름다웠다. 얼마나 걸어 올라갔을까, 이내 청량한 햇살이 내리쬐는 너른 공간이 나왔다.


온통 초록빛의 소나무 숲 가운데 자리 잡은 이곳을 보기 위해 얼마나 난 마음졸여 왔을까. 표지판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무턱대고 내린 곳에서의 낯섦에 대한 두려움 때문인지 아직도 그곳을 생각하면 한참을 헤맨 기억이 선명하다. 너른 공간에 내리쬐는 햇살이 그나마 조급해진 마음을 다독여 준다. 왕릉이라기엔 무척이나 고즈넉하고 간소해 보였지만 기세 좋게 솟아오른 봉분은 무척 위엄있어 보였다. 조금 뒷걸음질 쳐 물러나 그 공간을 다시 본다.  소나무사이로 보이는 모습조차 고요히 아름답다. 사람 하나 없으니 고요한 그곳의 몫은 내 것이 되었다.



간혹 불어오는 바람이 머리카락을 흩트려 놓았지만 개의치 않고, 한 켠에 서서 조용히 바라본다.

내딛는 걸음마다 사박사박 좋은 소리를 낸다. 봉분 주변을 둘러볼 수 있는 길이 탄탄히 내어져 있어 조심스레 발걸음을 옮겼다. 빽빽이 자리 잡은 소나무 틈새로 하얀 옷깃이 보였나 싶은 순간 어디론가 사라졌다. 아마 내내 두려웠던 나를 안심시켜주며 안내해주었던 요정 그 무엇이었을까. 작게 지저귀는 새소리도 더는 들려오지 않았다. 이따금 지나다니는 차 소리도 들려오지 않는 이 공간 안에서 내쉬는 숨소리마저, 내딛는 발걸음마저 조심스러웠다. 혹여 무언가가 잠들어 있다 깨어나지 않을까 조용히 둘러보고 빠져나왔다.


출구로 향하는 길목에 손을 맞잡은 중년의 부부가 나와 같이 혼란스러운 표정을 지으며 내려오는 내게 물었다. 이 길로 가면 선덕여왕릉이 나오냐고 그들을 안심시키며 나는 그렇다고 대답했다. 낯선 길의 끝에서 나는 무엇을 깨달았을까, 의문을 품으며 이곳을 떠났다. 말로 표현할 수 없는 무언가가 분명히 남아있었으며 아직도 그곳을 떠올리면 빛이 바랜 흙길의 냄새가 저절로 코끝을 스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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