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Katherine Apr 20. 2022

신 3:1-5

용인 생명샘 교회/ 김병진 목사님

*하나님께서 이 말씀을 통해 은혜 주시기를 원합니다.


고후 5

21 하나님이 죄를 알지도 못하신 이를 우리를 대신하여 죄로 삼으신 것은 우리로 하여금 그 안에서 하나님의 의가 되게 하려 하심이라


앞선 신명기 2장 후반의 말씀은 구원 이전과 구원 이후의 삶이 어떻게 다른가에 대한 내용이었다. 구원 이전까지의 싸움은 전적인 하나님의 은혜였지만 가나안으로 들어온 이후, 구원 이후에는 믿음의 선한 싸움을 이어나가야 한다는 점이었다.


벧전 2

24 친히 나무에 달려 그 몸으로 우리 죄를 담당하셨으니 이는 우리로 죄에 대하여 죽고 의에 대하여 살게 하려 하심이라 그가 채찍에 맞음으로 너희는 나음을 얻었나니


우리는 저절로 의로운 존재가 되지 못한다. 내 안에는 언제나 죄의 항상성으로 인한 악한 본성이 도사리고 있어서 이웃을 내 몸과 같이 사랑하기보단 나의 유익을 먼저 생각하게 되는 것이다. 이것이 우리가 세례 정신을 철저히 따르려 노력해야 하는 이유이다. 구원은 끝이 아니라 새로운 시작과 같다. 


신앙의 본질은 행복이 아니라 거룩이다. 진정한 행복은 거룩함 안에서 오는 것이다. 하나님을 믿는 우리가 어떻게 내 마음, 내 정욕대로 살면서 행복할 수 있을까? 


레 11

44 나는 여호와 너희의 하나님이라 내가 거룩하니 너희도 몸을 구별하여 거룩하게 하고 땅에 기는 길짐승으로 말미암아 스스로 더럽히지 말라

45 나는 너희의 하나님이 되려고 너희를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낸 여호와라 내가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할지어다


레위기는 제사법에 대해 알려주는 책이다. 하나님 앞에 나아가는 법을 알려준다. 책의 핵심은, 하나님 당신께서 거룩하니 제사를 통해 결국 우리도 거룩해지라는 것이다. 


전 장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은 헤스본에 거주하던 아모리 시혼 왕과 그 성읍을 진멸하라고 명령하셨고 순종한 이스라엘은 큰 승리를 거두었다. 그리고 신명기 3장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은 바산으로 향하게 된다. 


1. 너희는 두려워하지 말라 그와 그의 모든 백성을 네 손에 넘겼느니라.


신 3

1 우리가 돌이켜 바산으로 올라가매 바산 왕 옥이 그의 모든 백성을 거느리고 나와서 우리를 대적하여 에드레이에서 싸우고자 하는지라

2 여호와께서 내게 이르시되 그를 두려워하지 말라 내가 그와 그의 모든 백성과 그의 땅을 네 손에 넘겼으니 네가 헤스본에 거주하던 아모리 족속의 왕 시혼에게 행한 것과 같이 그에게도 행할 것이니라 하시고

3 우리 하나님 여호와께서 바산 왕 옥과 그의 모든 백성을 우리 손에 넘기시매 우리가 그들을 쳐서 한 사람도 남기지 아니하였느니라



이스라엘 백성들은 바산으로 올라가 에드레이 지역에서 전쟁을 했다. 하나님께서는 이들에게 바산으로 올라갈 때에 두려워하지 말라고 말씀해주셨다. 이미 네 손에 넘기셨다고 말씀하시는데 그 이유를 11절에서 찾아볼 수 있다.


신 3

11 르바임 족속의 남은 자는 바산 왕 옥뿐이었으며 그의 침상은 철 침상이라 아직도 암몬 족속의 랍바에 있지 아니하냐 그것을 사람의 보통 규빗으로 재면 그 길이가 아홉 규빗이요 너비가 네 규빗이니라


이들이 전쟁해야 하는 민족은 바로 거인 족이었다. 한 규빗은 45.6cm로 길이와 너비가 4.1m, 1.8m이다. 그들이 쓰는 침대가 이러한 길이였으니 실제로 이런 거인족과 싸워야 하는 이스라엘 백성들은 그들의 생김새와 크기에 두려움이 생기는 것이 당연했을 것이다. 왕의 침상을 예로 보아 그 민족들은 보통 3m가 넘는 키를 가진 거대한 민족이었을 것이라 추정된다. 현대 남성의 키 180cm로 비교해보면 두배 이상되는 크기이다. 어쨌든 이 전쟁의 결과는 승리였다.


신 3

4 그때에 우리가 그들에게서 빼앗지 아니한 성읍이 하나도 없이 다 빼앗았는데 그 성읍이 육십이니 곧 아르곱 온 지방이요 바산에 있는 옥의 나라이니라

5 그 모든 성읍이 높은 성벽으로 둘려 있고 문과 빗장이 있어 견고하며 그 외에 성벽 없는 고을이 심히 많았느니라


문원을 찾아보니 그들의 성벽은 그 길이가 9m가 넘어가고 길이는 90km, 용인에서 천안을 지나 더 내려가야 하는 길이였다고 한다. 너비는 32km로 정말 거대한 성벽으로 둘러싸인 성읍이 60개 그리고 성벽이 없는 고을도 심히 많았다고 하니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얼마나 크고 넓은 땅을 허락하셨는지를 알 수 있다.


여기서 생각해 보아야 할 점이 있다. 원래 이스라엘 백성들이 가고자 하는 가나안 땅은, 요단 서편 지역이다. 그렇다면 왜 헤스본 지역의 전쟁이 끝나고 곧장 강을 넘어가지 않고 바산 지역에 까지 올라가서 전쟁을 한 것일까? 힘들게 헤스본의 전쟁을 끝낸 이스라엘은 어쩌면 이제 젖과 꿀이 흐르는 땅으로 들어가는구나 하고 기대하고 있었을 수도 있다. 그러나 그들은 신명기 3장 1절에서 '돌이켜 바산으로 올라' 갔다.


모든 일의 절차와 흐름에는 나의 생각과 예측이 섞여있기 마련이다. 여기서 중요한 점은 이스라엘 백성과 현대를 살고 있는 다수의 우리들의 예측과 다르게 하나님께서 북진하라고 하셨을 때 그들이 순종하여 바산과 전쟁을 하러 갔다는 점이다. 왜 하나님께서 올라가라고 하셨는지, 그 이유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순종하였다는 사실이 중요한 것이다. 이것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광야 38년을 지나며 체득한 것이었다. 내 생각과 다를지라도 낮아진 마음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따르기로 결정하는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순종 앞에 하나님께서는 큰 성읍들을 허락하심으로 화답하셨다. 오늘날을 사는 우리에게도 동일한 메시지인 줄 믿는다. 우리의 과거, 현재, 미래를 다 아시는 하나님께서 구름기둥과 불기둥, 그리고 말씀으로 인도하실 때 그 길에 순종한다면 반드시 성읍들을 차지하며 하나님의 공의를 선포하는 우리 모두가 될 줄로 믿는다.


맨날 나만 용서해야 하는 것인지 묻지 말자. 왜 내가 손해보고 내가 먼저 사랑해야 하냐고 묻지 말자. 오늘 순종하는 이스라엘 백성들의 모습을 보고 배우자. 


2. 바산과의 전쟁의 특징은 진멸의 전쟁입니다.


신 3

2 여호와께서 내게 이르시되 그를 두려워하지 말라 내가 그와 그의 모든 백성과 그의 땅을 네 손에 넘겼으니 네가 헤스본에 거주하던 아모리 족속의 왕 시혼에게 행한 것과 같이 그에게도 행할 것이니라 하시고


출 23

23 내 사자가 네 앞서 가서 너를 아모리 사람과 헷 사람과 브리스 사람과 가나안 사람과 히위 사람과 여부스 사람에게로 인도하고 나는 그들을 끊으리니


가나안 일곱 족속에 대한 진멸 전쟁은 이미 출애굽기에서부터 말씀하셨던 전쟁이었다. 즉 이 전쟁들은 성스러운 전쟁이었다. 단순히 영토를 빼앗고 정복하는 의미를 넘어 하나님의 공의에 바쳐지는 전쟁이었던 것이다. 이들 민족들은 소돔과 고모라처럼 패악이 넘쳐나는 민족들이었기 때문이다. 하나님께서 먼저 진멸을 선포하신 전쟁이었다. 


그렇다면, 오늘 우리에게 이 말씀은 어떻게 적용될까? 진멸한다는 이 말씀을 어떻게 삶에 적용해야 할까? 바로 예수 그리스도 십자가 보혈로 덮어버리는 것이다.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은혜의 시대는 모든 삶의 영역과 모든 관계 가운데 진멸되어야 하는 모든 죄성 위로 예수님의 보혈이 부어져 덮이는 것이 될 것이다. 


히 10

14 그가 거룩하게 된 자들을 한 번의 제사로, 영원히, 온전하게 하셨느니라

19 그러므로 형제들아 우리가 예수의 피를 힘입어 성소에 들어갈 담력을 얻었나니


은혜의 시대, 예수님의 십자가 희생이 없었다면 우리에게도 구약시대의 진멸 전쟁은 적용되어졌을 것이다. 십자가 보혈의 은혜가 우리를 살렸다. 얼마나 감사한지 모르겠다.


빌 3

14 푯대를 향하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이 위에서 부르신 부름의 상을 위하여 달려가노라


고후 6

2 이르시되 내가 은혜 베풀 때에 너에게 듣고 구원의 날에 너를 도왔다 하셨으니 보라 지금은 은혜받을 만한 때요 보라 지금은 구원의 날이로다


자, 다시 본문으로 돌아가 보자. 이스라엘 백성들이 싸워 이긴 헤스본과 바산 지역은 풀이 무성하고 비옥하여 가축을 키우기 정말 좋은 땅이었다. 그래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원래 주시겠다고 약속되었던 땅은 아니지만 하나님께서는 허락해주신다.


신 3

12 그때에 우리가 이 땅을 얻으매 아르논 골짜기 곁의 아로엘에서부터 길르앗 산지 절반과 그 성읍들을 내가 르우벤 자손과 갓 자손에게 주었고

13 길르앗의 남은 땅과 옥의 나라였던 아르곱 온 지방 곧 온 바산으로는 내가 므낫세 반 지파에게 주었노라

18 그때에 내가 너희에게 명령하여 이르기를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이 땅을 너희에게 주어 기업이 되게 하셨은즉 너희의 군인들은 무장하고 너희의 형제 이스라엘 자손의 선봉이 되어 건너가되

20 여호와께서 너희에게 주신 것 같이 너희의 형제에게도 안식을 주시리니 그들도 요단 저쪽에서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그들에게 주시는 땅을 받아 기업을 삼기에 이르거든 너희는 각기 내가 준 기업으로 돌아갈 것이니라 하고


위의 구절들에서 알 수 있듯이 헤스본과 바산 지역은 르우벤 자손과 갓 자손, 그리고 므낫세 반 지파에게 돌아갔다. 그리고 하나님은 먼저 기업을 받았지만 이제 요단 서편으로 건너가 전쟁을 계속해야 하는 나머지 아홉 지파를 위해 이들이 함께 싸워줄 것을 조건으로 말씀하셨다. 이것이 공동체 의식이다. 나만 잘되고, 꼭 내가 먼저 복 받고 나를 통해 복이 흘러가야만 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우리 모두는 동일하게 서로를 지켜주고 세워주고 축복하는 관계인 것이다.


더불어 이 지역이 먼 훗날 어떤 일을 겪게 되는지를 알아둘 필요가 있다. 앞서 말했듯이 굉장히 비옥했던 바산과 헤스본 지역은 외세의 침략을 굉장히 많이 받게 된다. 동시에 나머지 형제 지파들은 모두 요단 서편에 있었기 때문에 강을 건너 지원병력이 도착할 때까지 시간이 많이 걸렸다. 또한 훗날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께 범죄 하여 앗수르에 포로로 끌려갈 때 요단 동편의 이 두 지파 반이 가장 먼저 포로로 끌려가게 된다.


먼저 주시기로 약속된 땅이 아니었다. 그러나 비옥했고, 보기에 좋았고, 우리가 달라고 요청할 때 하나님이 주셨다면 범죄 하지 않기 위해 더 신경 써야 하는 것이다. 좋은 것이 다 좋은 것이 아니다. 하나님이 안 주실 때는 다 이유가 있는 것이다. 


3. 모세는 가나안 땅을 직전에 두고 다시 들어가기를 하나님께 간구하나 하나님께서 그만해도 족하다고 하십니다.


신 3

23 그때에 내가 여호와께 간구하기를

25 구하옵나니 나를 건너가게 하사 요단 저쪽에 있는 아름다운 땅, 아름다운 산과 레바논을 보게 하옵소서 하되

26 여호와께서 너희 때문에 내게 진노하사 내 말을 듣지 하니 하시고 내게 이르시기를 그만해도 족하니 이 일로 다시 내게 말하지 말라


모세는 정말 가나안 땅에 들어가고 싶어 했다. 그는 왜 들어가지 못했을까? 왜 하나님은 모세를 못 들어가게 하셨을까? 표면적인 이유는 민수기 20장의 므리바 사건이다.


민 20

8 지팡이를 가지고 네 형 아론과 함께 회중을 모으고 그들의 목전에서 너희는 반석에게 명령하여 물을 내라 하라 네가 그 반석이 물을 내게 하여 회중과 그들의 짐승에게 마시게 할지니라

9 모세가 그 명령대로 여호와 앞에서 지팡이를 잡으니라

10 모세와 아론이 회중을 그 반석 앞에 모으고 모세가 그들에게 이르되 반역한 너희여 들으라 우리가 너희를 위하여 이 반석에서 물을 내랴하고

11 모세가 그의 손을 들어 그의 지팡이로 반석을 두 번 치니 물이 많이 솟아 나오므로 회중과 그들의 짐승이 마시니라

12 여호와께서 모세와 아론에게 이르시되 너희가 나를 믿지 하니 하고 이스라엘 자손의 목전에서 내 거룩함을 나타내지 아니한 고로 너희는 이 회중을 내가 그들에게 준 땅으로 인도하여 들이지 못하리라 하시니라


모세는 애굽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이 가장 박해받을 때에 태어나, 40년을 왕궁에서 교육받았고 후에 광야에서 또 40년을 훈련받았었다. 이후 80세부터 120세까지 민족의 위대한 지도자로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이끌어 온 그는 공로로 따지자면 그 누구보다 가나안에 들어갔어야 했던 걸로 보인다. 그렇다면 왜일까? 단지 므리바 사건 때문이었을까? 


거기에는 몇 가지 이유가 더 있다.


1) 모세는 율법의 상징이기 때문에 그렇다.


하나님은 여기서 율법의 한계성을 암시해주신다. 율법의 한계성, 인간의 업적과 인간의 위대한 사역으로는 약속의 땅, 천국에 들어갈 수 없음을 나타내시는 것이다. 이 세상의 어떤 위대한 업적을 남긴 사람도 그의 의로움으로 천국에 갈 수 없다.


요일 4

10 사랑은 여기 있으니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사 우리 죄를 속하기 위하여 화목 제물로 그 아들을 보내셨음이라


엡 2

8 너희는 그 은혜에 의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았으니 이것은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

9 행위에서 난 것이 아니니 이는 누구든지 자랑하지 못하게 함이라


2) 하나님의 영광과 거룩함을 가린 것은 큰 죄이다.


민 20

2 회중이 물이 없으므로 모세와 아론에게로 모여드니라

3 백성이 모세와 다투어 말하여 이르되 우리 형제들이 여호와 앞에서 죽을 때에 우리도 죽었더라면 좋을 뻔하였더라

4 너희가 어찌하여 여호와의 회중을 이 광야로 인도하여 우리와 우리 짐승이 다 여기서 죽게 하느냐

5 너희가 어찌하여 우리를 애굽에서 나오게 하여 이 나쁜 곳으로 인도하였느냐 이곳에는 파종할 곳이 없고 무화과도 없고 포도도 없고 석류도 없고 마실 물도 없도다


민수기 20장에서 보면, 회중이 마실 물이 없어 모세와 아론에게로 모여들었다고 한다. 그리고 온갖 악한 말로 불평을 쏟아내는데 그런 그들을 향해 하나님께서는 모세와 아론에게 반석에서 그들을 위해 마실 물을 내주라고 명령하라고 말씀하셨다.


8 지팡이를 가지고 네 형 아론과 함께 회중을 모으고 그들의 목전에서 너희는 반석에게 명령하여 물을 내라 하라 네가 그 반석이 물을 내게 하여 회중과 그들의 짐승에게 마시게 할지니라

9 모세가 그 명령대로 여호와 앞에서 지팡이를 잡으니라

10 모세와 아론이 회중을 그 반석 앞에 모으고 모세가 그들에게 이르되 반역한 너희여 들으라 우리가 너희를 위하여 이 반석에서 물을 내랴하고

11 모세가 그의 손을 들어 그의 지팡이로 반석을 두 번 치니 물이 많이 솟아 나오므로 회중과 그들의 짐승이 마시니 라

12 여호와께서 모세와 아론에게 이르시되 너희가 나를 믿지 하니 하고 이스라엘 자손의 목전에서 내 거룩함을 나타내지 아니한 고로 너희는 이 회중을 내가 그들에게 준 땅으로 인도하여 들이지 못하리라 하시니라


그런데 이어지는 10절의 모세를 보면 그가 이 패역한 백성들을 향해 얼마나 이골이 났는지, 얼마나 지치고 가슴이 답답했는지를 알 수 있다. 그는 불평을 쏟아내는 백성들을 '반역한 너희여'라고 칭하며 화를 낸다. 하나님께서 이 백성을 돌보시고 하나님께서 이 백성에게 마실 물을 내주시는 것인데도, 순간 '우리가 너희를 위하여 이 반석에서 물을 내랴' 하며 마치 그가 물을 내어 주는 것처럼 그 영광을 가로챈 것이다. 이어 모세는 11절에서 지팡이로 반석을 두 번 쳐버렸다. 


하나님의 영광을 가로채고 가리는 것이 얼마나 큰 죄인지, 하나님은 민수기의 므리바 사건을 통해 우리에게 암시하신다. 개인이든 공동체이든 교회이든 가정이든 이러한 사건으로 걸려 넘어지는 일이 없도록 항상 기도해야 한다. 하나님은 이러한 죄악을 그냥 내버려 두지 않으신다. 오직 하나님의 영광이 드러나고 오직 복음, 오직 십자가만이 남아야 한다. 우리가 잘난 것이 아니다. 하나님이 주신 건강이고 하나님이 주신 시간이고, 하나님이 주신 물질이며 하나님이 허락하신 생명인 것이다. 모든 것은 하나님으로부터 온 것이다. 


3) 이제까지 모세에게 임한 하나님의 은혜가 족하다는 뜻이다.


신 3

26 여호와께서 너희 때문에 내게 진노하사 내 말을 듣지 아니하시고 내게 이르시기를 그만해도 족하니 이 일로 다시 내게 말하지 말라


모세와 마찬가지로 우리에게 임한 하나님의 은혜도 족한 줄로 믿는다. 우리가 구한 것도 더 좋은 것으로 채우셨고, 우리가 미처 구하지 못한 것 또한 채우셨기에 지금 이 자리에 우리가 서있는 줄 믿는다. 구하지 않은 것도 응답하셨는데 그 기도한 한 가지를 허락지 않으셨다고 원망 불평하지 않도록 조심해야 한다. 세밀하신 하나님, 우리의 미래를 다 아시는 하나님께서 지금 나에게 그것이 없어도 된다고 말씀하신다는 것이다. 그럼 된 것 아닌가? 얼마나 감사한가.


빌 4

11 내가 궁핍하므로 말하는 것이 아니니라 어떠한 형편에든지 나는 자족하기를 배웠노니 

12 나는 비천에 처할 줄도 알고 풍부에 처할 줄도 알아 모든 일 곧 배부름과 배고픔과 풍부와 궁핍에도 처할 줄 아는 일체의 비결을 배웠노라

13 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느니라


사도 바울과 같은 믿음의 고백, 삶의 배움이 우리 안에도 있기를 기도한다.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없음도 감사요 받음도 감사인 것이다. 


고후 12

7 여러 계시를 받은 것이 지극히 크므로 너무 자만하지 않게 하시려고 내 육체에 가시 곧 사탄의 사자를 주셨으니 이는 나를 쳐서 너무 자만하지 않게 하려 하심이라

10 그러므로 내가 그리스도를 위하여 약한 것들과 능욕과 궁핍과 박해와 곤고를 기뻐하노니 이는 내가 약한 그때에 강함이라


바울은 간질환자였다. 그리고 그는 그 마저도 그를 위한 하나님의 계획이셨다며 감사한다. 사람이 약하기에 하나님께서 강하게 역사하실 수 있는 것이다. 능력 많은 예수님께 시험 거리가 많았겠는가, 연약한 우리에게 시험 거리가 많겠는가? 하실 수 있으면서도 하지 않으셨던 예수님이 더 어렵지 않았겠는가? 그러므로 우리는 우리의 연약함 마저도 감사할 수 있다.


살전 5

18 범사에 감사하라 이것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를 향하신 하나님의 뜻이니라


오직 모든 것을 아시는 하나님의 인도하심에 순종하며 나아갈 때 풍족함에 이를 줄 믿는다. 모든 것을 하나님께 영광 돌리며 감사할 수 있는 모두가 되기를 기도한다.


https://www.youtube.com/watch?v=3cFjr-5kWI8


















작가의 이전글 신 2:24-25, 31-37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