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표는 내가 가치를 두는 것만큼, 에너지를 쓸 수 있는 만큼만
왜 이렇게 우리 사회는 순서를 세우기를 멈추지 않을까? 그 순서에서 뒤로 밀려가 좌절감을 느끼기를 원하지 않는다면 경쟁이 덜하고 다른 사람들이 관심을 두지 않는 나만의 독자노선을 타면 된다 이것은 너무 당연한 논리처럼 느껴지지만 실천은 쉽지가 않다.
공부를 대하는 중학생 아들과 가끔 대화를 나누다 보면 아이가 하는 말인데 내가 미처 생각해 보지 못한 시각으로 세상을 바라보고 생각하고 살아가는 그 용기와 신선함에 무릎을 탁 치고 씩 웃게 될 때가 종종 있다.
중1은 자유학기제여서 시험이 없었다. 실컷 놀았고 방과 후 영어수학 문제집을 조금씩 풀었다. 그 마저도 학교 동아리에서 선생님과 방과 후 활동이 있다면 건너뛰기도 하였다.
중2학년에 올라가 공부를 하고 첫 시험을 보게 되었는데 시험 시작 2주 전에도 여전히 금토일을 게임을 신나게 하고 월요일부터 목요일은 문제집을 좀 풀다가 침대에 벌렁 누워 핸드폰을 손에 놓지 않고 유튜브 공간을 유영한다.
그래서 꾹꾹 참다가 물었다.
“공부 좀 더 하지 그래? 자습서나 문제집은 다 풀어봐야 하지 않을까?”
그랬더니 이런다
“엄마 내가 가만히 우리 반에서 제일 똑똑한 친구를 살펴봤더니 그 아이는 보통 공부를 열심히 하는 게 아니더라. 주말에도 학원에 가서 아홉 시간을 공부를 했대”
이어지는 말이
”그리고 나를 가만히 보니까 나는 책상에 앉아서 꾸준히 공부하는 엉덩이 힘… 그런 노력할 수 있는 능력은 없는 것 같아. 그래서 나는 수업 열심히 듣고, 수행 평가 성실히 하고, 문제집 조금 풀고 그에 맞는 성적을 받을래. 거기서 더 좋은 점수를 받기 위해서 해야 하는 노력은 훨씬 더 커서 나는 그것을 안 하려고 해.. 그런 목표는 애초에 나의 목표가 아니야. “
엉뚱하긴 한데 묘하게 빠져든다.
그리고 생각해 보면 그 주장에 있는 논리는 내가 그동안 아이들에게 운동이나 다양한 학업 외 여가 활동을 할 때 권했던 말에서 영향을 받은 것이라는 것을 이내 깨닫게 되었다.
고등학교 2학년 때 무용 수업이 있었다. 내 몸은 뻣뻣하고 유연성이 없어 그 수업은 매우 곤혹스러운 시간이었다. 급기야 어느 날 선생님이 그 많은 아이들 앞에서 내 이름을 콕 집어 부르면서 “거기 있는 OO, 너 로봇이야?” 너무 부끄러웠고 수치스러운 순간이었다. 그 이후 그 학기가 끝날 때까지 무용수업마다 내 몸은 더 얼어붙었고 지긋지긋한 시간이 되었다. 그날의 나로 돌아간다면 혹은 그 선생님과 다시 만나게 된다면 사과를 받고야 말 테다. 선생님은 내가 잘하는 수학을 얼마나 잘하시나요? 나만큼 파워포인트를 잘하는지요? 무용 선생님이 되었다고 해서 모두가 무용을 잘하기를 기대하신 건가요?”
나는 애초에 몸뚱이가 그랬다. 운동 신경이 없고 모든 신체 활동에 재능이 없어서 그 이후에 다른 체육시간도 자신이 없었고 움츠러들었다.
그렇지만 지금의 나는 일주일에 한 번 딸아이와 스케이트보드를 탄다. 소심하고 수줍은 딸아이가 3학년 때 스케이트보드를 어느 영상에서 보고 따라서 배우고 싶은데 도저히 홀로 배울 용기가 안 난다고 하여 함께 한 달만 같이 수업을 들어주기로 했던 나는 딸아이가 5학년을 마쳐가는 오늘까지 한 달에 서너 번씩 스케이트 보드 수업에 간다.
가끔 선생님이 그러신다. “어머니 몸치신 것 같아요” 웃으면서 하는 말이라 농담으로 받고, 또 어른이 된 나는 더 이상 그런 말에 주눅 들지 않는다. 오히려 내가 얼마를 지불하고 온 수업이고 그 수업의 고객인데 내가 아무리 못 해도 선생님은 나를 친절하게 가르칠 의무가 있고 나는 즐길 권리가 있다고 생각한다.
또 어떤 날은 같은 학원의 꼬마가 말을 걸어온다. “아줌마, 잘하네요.” 사실 그 꼬마보다 내가 2년은 더 배운 것 같고 머지않아 그 꼬마는 나를 앞설 것을 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목표를 최고에 두지 않고 ’ 화요일은 일단 퇴근하고, 스케이트 보드 타기’라고 꾸준히 다리 근육과 균형감각을 향상하는 것에 두었기 때문에 그 어떤 남의 의견 따위는 개의치 않는다. 물론 발라당 넘어져서 스케이트 보드 공간을 울리는 쿵 … 아이코 하는 소리를 만들어 낼 때는 동물적으로 부끄러워 벌떡 일어나기는 한다.
그래서 우리 아이들에게 “꼭 일등 할 필요는 없어… 일등이 되지 않아도, 최고가 되지 않아도 많은 것을 시도하고 즐길 수 있어. ”라고 말해주곤 했었다.
그런데 그런 내가 유독 아이들 공부나 시험 성적에 대해서만은 도끼눈을 치켜뜨고 바라보거나 왜 등수와 점수가 이것밖에 되지 않느냐고 다그치고 있는 것이 얼마나 모순인지 안다. 오늘도 반성한다.
아들은 자신의 학업 목표를 설정하고 그에 맞는 삶을 주체적으로 살고 있다. 강제로 할 수가 없다. 나를 닮아 각자 주장이 강한 아이들이 그렇게 호락호락하게 내 요구를 들어줄 리가 없기 때문이다.
초등학생 아이가 한 번은 60점짜리 수학 시험 결과지를 가져와서는 씩 웃으며 말한다. “ 엄마. 나 이거 되게 못한 거 아니다. 시험이 어려웠나 봐. 우리 반에 항상 100점 맞는 친구가 이번에는 100점을 못 맞았거든” 그 아이를 나무랄 수가 없었다. “그래… 틀린 거 한 번 가져와 봐. 알고는 넘어가자. 그러면 되지” 하고 맘에 없는 넉넉한 여유를 선보였다.
일등이라는 목표는 모두가 도달할 수도 없고 애초에 한정된 것을 피 튀기며 싸워서 쟁취하는 투쟁을 통해서만 얻어지는 것이다. 최근에 읽었던 ‘송길영 작가님의 호명사회’에서 일등이 되지 않으면 모두 루저로 간주하는 시간이 얼마나 현대 사회의 경쟁 과열과 그로 인한 부작용을 만들어냈는지 지적하는 부분을 읽었었다. 그에 따르면 경쟁의 인플레이션이 발생하여 성공을 위해 요구되는 비용이 계속 증가하지만, 개인이 투자하는 시간과 열정의 가치는 오히려 하락하고 있기에 더 많은 노력을 들여야 겨우 경쟁에서 살아남을 수 있는 현실이 펼쳐진다고 말한다.
우리 아들은 이 책을 읽었을 리가 없지만 이미 자신의 노력과 에너지를 얼마나 투자할지 나름의 시뮬레이션을 돌리고 자신이 감당할 수 있는 노력의 비용에 맞는 학습 목표를 세우고 저만의 독특한 가치를 창출하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반의 노력은 롤(리그 오브 레전드)의 게임이 주는 짜릿함과 나머지 반은 중학생의 본분을 잊지 않는 범위 내에서의 학습에 들이면서 말이다.
흠… 나쁘지 않은 걸… 네가 행복하게 오늘을 살고 있다면 말이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