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은 당신이기에 아름답다.
애도와 우울, 두 번째 이야기
On August 12, 1961,
a wall was erected
down the middle of the city of Berlin.
The world was divided by a cold war
and the Berlin Wall
was the most hated symbol of that divide
Reviled. Graffitied. Spit upon.
We thought the wall would stand forever,
and now that it's gone,
we don't know who we are anymore.
Ladies and Gentlemen,
Hedwig is like that wall,
standing before you in the divide
between East and West,
Slavery and Freedom,
Man and Woman,
Top and Bottom.
And you can try to tear her down,
but before you do,
remember one thing.
Listen
There ain't much of a difference
between a bridge and a wall
Without me right in the middle, babe
you would be nothing at all
1961년 8월 12일, 베를린 시 중앙에는 장벽 하나가 세워졌습니다.
세계는 냉전으로 분열되었고, 베를린 장벽은 그 분열의 혐오스러운 상징이었습니다.
욕하고, 낙서하고, 침을 뱉으며
그 벽이 영원히 세워져 있을 거라고 생각했지만 이제 그 장벽은 사라지고 없습니다.
우리는 더 이상 우리 자신이 누구인지 알지 못합니다.
신사, 숙녀 여러분!
헤드윅은 그 벽 같은 존재입니다!
동과 서, 속박과 자유, 남자와 여자, 위와 아래의 경계에서
당신 앞에 서있습니다.
당신은 헤드윅을 부숴버릴 수도 있습니다만,
그 전에 이것 하나만 기억하세요.
이봐,
다리와 벽 사이에는 그렇게 큰 차이가 없어.
그 중간에 서있는 나 없이는, 자기야,
너는 정말 아무것도 아닌 거야.
헤드윅 OST <Tear me down>
영화 <헤드윅>은 록가수이자 실패한 트랜스젠더인 '헤드윅'에 대한 이야기이다.
동 베를린에서 살던 헤드윅은 미국으로 이민할 적에 성전환 수술을 받지만, 전환 수술은 실패한다. 6인치 중 5인치 만을 잘라낸 채로 아물어 버린 성기는 버자이너도 페니스도 아닌 1인치의 살덩어리로, 결국 그/녀는 여자도 남자도 아닌 사람이 된다. 헤드윅은 그저 사랑받기만을 원하지만, 누구도 그/녀를 사랑해주지 않는다.
인간/동물, 자연/ 문화, 몸/영혼, 날 것/인공물, 이성/감성 등 뭐든지 이분법으로 나뉘는 사회적 이데올로기 속에서 여성과 남성, 그 어느 쪽에도 속하지 못 하는 헤드윅은 불완전하고 흉물스러운 존재다. 사람들은 그/녀를 욕하고, 때리고, 침을 뱉는다. 섹스, 젠더, 민족, 계급적인 경계를 교란하는 비정상으로 취급하여 그/녀를 배제해버리는 이 사회에서 헤드윅은, 비체이다.
비체들은 우울하다. 비체(卑體, abjection)는 프랑스 철학자 줄리아 크리스테바가 그의 저서 『공포와 권력』에서 사용한 핵심 개념으로, "정체성, 체계, 질서를 어지럽히는 것, 경계, 위치, 규칙을 무시하는 것"이라고 규정된다. 금지한 규정을 어기며 사회를 어지럽히는 자들은 공동체를 위협한다는 죄목 하에, 보호받지 못하는 주체 아닌 비-주체, 즉 비체가 된다. 비체는 세상의 '그림자 영역'에 속한 자들이다. 그들은 이 사회가 '정상'이라고 규정한 범주의 바깥에서 서서, 정상과 비정상을 구획한다. 성적 소수자, 유색인종, 장애인, 난민, 극빈자, 왕따, 홈리스 등은 젠더, 섹스, 인종, 계급적인 주변인이자 이방인으로서 이 사회에서 비체로 취급된다.
*보통 섹스는 생물학적인 성, 젠더는 사회문화적인 성으로 정의된다. (이렇게 설명하는 것은 섹스와 젠더를 너무 단순화하는 것이겠지만,) 이해를 돕기 위해 예를 들자면, ‘여성적인 남자’에서 ‘여성적’은 젠더, ‘남자’는 섹스로 볼 수 있다. 그러나 뒤에 설명하겠지만, 버틀러는 생물학적인 성을 부정하며 섹스마저도 젠더로 본다.
페미니스트이자 퀴어 이론가인 주디스 버틀러는 동성애 금지와 젠더 우울증에 대해서 언급한다. 이성애자들은 사랑의 상실에 따른 슬픔을 드러내어 애도하면서 고통스럽다고 외칠 수 있지만, 비이성애자들에게는 애도조차 공적으로 허용되지 않는다. 이성애만이 '정상적'인 사랑으로 여겨지는 세계에서 비이성애자들은 슬픔조차 마음대로 터놓을 수 없다. 이성애 중심사회에서 동성애는 금지되고, 이런 금지는 자아의 성격을 우울증으로 변형시킨다.
프로이트가 주장한 오이디푸스 콤플렉스에 따르면, 아버지-어머니-나라는 가족 구도에서 남아든, 여아든 유아에게 일차적 사랑의 대상은 바로 어머니이다.(여기서 말한 사랑은, 우리가 흔히 생각하는 가족 간의 플라토닉한 사랑이 아닌, 성적 욕망의 대상이라는 의미이다.) 이런 욕망을 남자아이는 근친상간금지법 하에서, 여자아이는 근친과 동성애금지법에 의해 체념하게 된다. 그리고 남아는 아버지와, 여아는 어머니와 자신을 동일시한다. 같은 성으로 동일시함으로써 그들은 이 사회가 규정한 정상적 '남성성과 여성성'을 획득하게 된다. 여기서 버틀러는 이런 의문을 제기한다.
왜 유아는 반드시 이성 부모만을 사랑하고,
동성 부모와는 반드시 동일시를 해야 하는가?
버틀러는 프로이트가 이성애를 당연한 전제로 삼고, 그것에 맞춰 이론을 전개하고 있다고 비판한다. 사회가 요구하는 남자가 되거나 혹은 여자가 되려면, 유아는 동성부모를 욕망의 대상으로 삼아서는 안 된다. 그렇게 해야만 강제적인 이성애 사회에서 이성애 규범에 합당한 성적 지향성을 지니게 된다. 결국 이성애라는 성적 경향성은 본질적으로 타고난 것이 아니라 동성애금지의 결과물로서 획득되는 것이라고 볼 수 있다.
이성애 헤게모니 사회에서 동성애라는 것은 끔찍한 두려움이다. 동성애는 여성에게는 '여성성'을, 남성에게는 '남성성'을 잃어버릴지도 모른다는 공포를 유발시킨다. 같은 동성을 욕망하는 자는 이성애 중심 사회에서 더 이상 남성/여성에 합당한 남성/여성이 아니라 '실패한' 남자/여자이므로, 괴물이자 비체로 간주될 수도 있다. 이처럼 동성애에 대한 욕망은 젠더를 공포에 떨게 만든다.
버틀러에 의하면 여아는 어머니를 욕망의 대상으로 삼는 것을 금하는 금지에 복종하면서, 금지된 대상을 자아의 일부가 되도록 해주는 우울증적인 동일시를 통해 여자가 된다. 이전 글에서 언급했던 우울증을 다시 상기해 보자. 우울증에서 대상을 상실한 리비도는 다른 대상을 찾지 못한 채 자아의 내부로 파고든다. 내부로 파고든 리비도는 자아를 상실 대상과 동일시를 통해 ‘합체’하는 데 기여하고, 그 결과 '나'는 '너'가 된다. 결국 상실 대상(어머니)을 자아의 내부에 설치한다는 점에서, 이것은 우울증적인 동일시라고 볼 수 있다.
여아는 어머니를 향한 동성애적 애착을 체념하고, 어머니와 자신을 동일시한다. 오로지 이런 조건 아래서만, 이성애적 성적 경향성을 확립시킬 수 있다. 동일시는 동성애라는, 애도할 수 없는 상실을 내면화하는 것이다.
결국, 이성애는 이성애 사회에서, 동성애의 배제로 인해 강제된 것이다. 이성애 정체성은 자신이 부인하고픈 사랑 형태를 우울증적으로 자기 안에 합체함으로써 가능해진다. 버틀러의 논의에 따르면 여자를 결코 사랑한 적도 없고 그러므로 결코 여성을 상실한 적도 없다고 주장하는 이성애 여성이 있다면, 그녀야말로 레즈비언 우울증자가 된다. 또한 남성을 결코 욕망한 적도 그러므로 결코 상실한 적도 없다고 주장하는 이성애 남성이 있다면, 그야말로 동성애 우울증자의 전형적 형태가 되는 역설에 빠져들게 된다. 거꾸로 진정한 레즈비언 우울증자는 이성애 여성이며, 진정한 게이 남성 우울증자는 이성애 남성이라는 섹슈얼리티의 전이/역전이가 발생한다.
이와 같이 동일시를 통해 여성성과 남성성을 획득하고, 성적 경향성이 타고나는 게 아니라 금지에 의해 형성되는 것이라는 그녀의 논의에 따르면, 젠더와 섹슈얼리티 같은 정체성은 고정적인 게 아니라 가변적이고 불안정한 것으로 보인다. 주디스 버틀러는 논의를 확장하여 사회·문화적 성(性)인 젠더 Gender나 섹슈얼리티 Sexuality뿐만 아니라, 생물학적인 성이라고 알려진 섹스 Sex마저도 사실은 가변적이고 사회문화적인 것이라고 주장한다.(우리가 일컫는 남자와 여자라는 성는 어떻게 구분이 되는가? 페니스의 유무? 염색체의 차이? 그러나 이런 기준으로 성별을 구분한다면, XO, XXY, XYY 등의 염색체를 가진 사람이나 간성(間性)은 둘 중 어느 범주에 들어가야 하는가?) 성별을 남녀로만 엄격하게 구분하는 것은 사회적 편의를 위한 것일 뿐이다. 결국 그녀 앞에서 젠더와 섹스와 섹슈얼리티는 철저하게 해체되어 차이 없이 뒤섞인다. '젠더는 다리'라는 <비너스 보이즈 Venus Boyz>의 마크랜드의 말처럼, 그녀에게 그것들은 그야말로 다리이자 움직이는 것이다. 우리는 그 위에 서서 왼쪽으로든, 오른쪽으로든 갈 수 있다.
새는 알에서 나오려고 투쟁한다. 알은 세계이다. 태어나려는 자는 하나의 세계를 깨뜨려야 한다. 새는 신에게로 날아간다. 신의 이름은 아브락사스.
버틀러를 읽으면서, 나는 헤르만 헤세 『데미안』의 유명한 구절이 자꾸만 떠올랐다.
버틀러는 알에서 나오려고 투쟁한다. 알은 세계이다. 정상/비정상을 구획하고 비정상의 범주에 속한 비체들을 철저히 무시하는, 이성애 헤게모니가 장악한, 헤드윅의 말대로라면, 위험하고 사악한 세계이다. 이 사악한 세계에서 벗어날 방법은 없다. 출구가 없다면 세계를 깨뜨리는 수밖에. 그렇게 그녀는 세계의 전복을 시도한다. 그것은 가히 혁명이나 다름없다.
아브락사스는 신적인 것과 악마적인 것의 결합을 상징한다. 남자이면서도 여자인 것, 빛과 어둠, 허용된 것과 금지된 것, 내면과 외면, 심지어 신과 악마도 공존하는 이 세상의 두 개의 세계를 모두 인정하는 최고 신이 바로 아브락사스다. 그러므로 아브락사스에게로 날아가는 것은 즉, 이분법적 경계가 사라진 새로운 세계를 향해 도약하겠다는, 그녀의 의지나 다름없는 것이다.
영문학자이자 여성주의이론가인 임옥희는, 젠더 형성과정 안에서 이성애자는 동성애를, 동성애자는 이성애를 '억압'함으로써 느낄 수밖에 없는 슬픔과 우울이라고 한다면, 그런 우울은 이성애 문화 전반에 걸친 것이자 '전 우주적인 것으로 확대'되어버린다, 는 점을 지적한다. 결국 상식이라는 이름의 거대한 헤게모니 아래 존재 자체를 억압·배척·부정당하는 비체들은, 이 사회 속에서 우울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그렇기에 주디스 버틀러는 우울한 어조로 비체들을 애도한다.
헤드윅 이야기로 다시 돌아가 보자. 헤드윅은 트랜스젠더이지만, 영화상에서 그/녀가 젠더적으로 여성인지, 남성인지, 호모섹슈얼인지, 헤테로섹슈얼인지는 잘 드러나지 않는다. 헤드윅은 작중에서 이렇게 독백한다.
"나는 내 반쪽을 만나야 하죠.
그일까, 그녀일까?"
헤드윅을 이용한 후 헌신짝처럼 버리고 떠났던 전前 연인 토미 노시스는 용서를 구하며, 그/녀를 위해 노래 부른다.
And you were so much more
Than any god could ever plan
More than a woman or a man
그 어떤 신이 계획할 수 있었던 것보다,
당신은 훨씬 나은 사람이었죠.
여자나 남자 그 이상의 존재.
결국 마지막에 자기자신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는 헤드윅의 모습을 통해 영화는,
남자와 여자, 이성애와 동성애, 정상과 비정상을 규정하여 세상을 바라보는 사람들을 향해
대체 그런 것들이 뭐가 중요하냐고, 반문하며 조롱하는 듯하다.
남자든 여자든,
당신이 그 누구든 간에,
당신은 그 자체로
그렇게나 아름다운데.
*참고문헌:
Butler, Judith, "젠더 트러블", 2013., 문학동네
(젠더의 조롱과 우울의 철학) 주디스 버틀러 읽기, 임옥희, 여이연, 2006
↳ '젠더는 우울하다'는 상당 부분 이 책을 참고, 인용, 요약하였습니다.
주디스 버틀러에 대해 아주 자세하게, 그리고 비교적 쉽게 쓰인 책이니
관심이 있다면, 한 번 읽어보시기를 추천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