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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멜팅페이스 Feb 10. 2022

뒤늦게영화리뷰 #1 샤이닝

진정한 공포는 어디에서 오는가

샤이닝, 스탠리 큐브릭, 1980


최근에 본 공포 영화 중 가장 좋았던 건 '겟아웃'이었다. 스타일은 물론이고 흑인이 느끼는 공포심을 뼛속까지 후벼팠기 때문이다. 자신이 여성, 장애인, 성소수자 같은 계층이라면 누구나 깊이 공감할 수밖에 없는 심리다.


심리. 평소에 느끼는 '공포심'을 잘 자극하는 게 좋은 공포 영화를 만드는 핵심이라는 걸 '샤이닝'을 보고 다시 깨달았다. 보통 사람들이 어떤 공포영화에 대해 이야기할 때는 '심리'가 아니라 특정한 '장면'에 대해 이야기 하기 마련이다. '샤이닝'의 피바다, '겟아웃'의 커피잔, '링'의 TV, '주온'의 소음 등이 그렇다. 


공포감을 자아내는 데에는 이런 연출적 요소도 중요하지만, 뼛속깊이 공포감을 심어주려면 심리를 자극해야 한다. 어떤 심리인가. '파라노말 액티비티'는 누구나 평소에 느낄 법한 원인 모를 소음으로 공포감을 줬다. 반면에 '겟아웃'은 흑인이 느끼는 일상적인 위협으로 공포감을 줬다. 사회구조적으로 모순이 가득차 출구가 보이지 않는 상황에 놓였을 때 느끼는 공포. 훨씬 더 근원적인 공포다.


'샤이닝'도 마찬가지다. 샤이닝이 자극하는 공포심은 '가장'이 일상적으로 느끼는 공포심이다. 이상적인 아버지란 가족의 생계를 책임지고, 사회에서 인정받고, 가족을 보호하는 아버지다. '샤이닝'의 주인공 잭도 당연히 이런 이상적인 아버지가 되고 싶어한다. 


그러나 현실은 다르다. 잭은 자신의 업무 문서를 어지르는 아들을 말리다 어깨를 탈골 시킨 적이 있다. 글을 쓰는 일을 하고 있지만 성공할 수 있을지는 장담하지 못한다. 자신이 성공하지 못하는 이유가 자신을 자꾸 간섭하는 아내와 성가시게 구는 아들에게 있다고 은연 중에 생각한다.


잭은 자신의 이런 숨기고 싶은 모습이 자의로든 타의로든 드러날 때 매우 방어적으로 변한다. 아들을 병원에 데려가기 위해 호텔을 떠나자는 아내의 제안에 "당신 때문에 내가 성공을 못하는 것"이라고 역정을 낸다. 호텔의 관리인이 "자네보다 아내가 더 똑똑한 것 같군"이라고 말할 때는 살인을 결심한다.


결국 잭은 오로지 자신을 보호한다. 자신의 모든 불행을 가족의 탓으로 돌리고 이들의 간섭과 의욕 과다를 "correcting"하기 위해 살인을 시도한다. 오로지 자신만을 보호하기 위해.


웬디가 대니 목이 졸린 자국을 발견했을 때, 잭에게 "당신 짓이지!"라고 말하는 순간이 인상적이다. 웬디는 원래 잭을 감싸고 있었다. 잭이 대니의 어깨를 탈골시켰을 때에 대해 설명하면서 "흔한 일이잖아요. 아주 약간, 약간 힘이 들어갔던 것 뿐이에요."라고 말했던 웬디다. 그러나 웬디는 대니가 목 졸린 모습을 발견한 순간부터 잭의 체면(?)을 보호해주기를 그만둔다. 잭과 웬디가 대치하는 것은 이때부터다.


결과는 웬디와 대니의 승리다. 잭은 죽고, 웬디와 대니는 산다. 자신의 자존감만을 보호하려는 가장의 패배다.

여기서 '겟아웃'과 다른 것 발견. 겟아웃은 흑인이 느끼는 공포심을 옹호했지만, 샤이닝은 아버지가 느끼는 공포심을 옹호하지 않는다. '가장의 희생' '버림받은 아버지'를 동정하는 시선 따위는 없다.

오히려 옹호하는 건 자신만을 보호하고, 소통 대신 고립을 선택하는 아버지에 대한 공포심이다.(아버지가 느끼는 공포심이 아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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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엇보다, 부끄러운 욕망의 대사가 불쑥불쑥 튀어나올 때. 표정이 싹 변할 때. 관객만 놀라고 배우는 하나도 놀라지 않을 때. 그때 느껴지는 낯섦이 내 머리를 팽팽팽팽 돌아가게 만드는 것 같다. 아. 대사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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