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정다희 Jan 19. 2016

#8. 훌륭한 말하기 스승은 어디에나 있다

'이디오피아 예가체프 콩가'를 아시나요?

아까부터 연기가 많이 나는데, 괜찮으세요?


낯선 이로부터의 첫 마디가 스윽. 나의 귀를 거쳐 가슴에 미끄러지듯 들어와 앉았습니다.

너무나 사뿐히 연착륙해 오히려 깜짝 놀랐습니다.

일요일 오후, 낮잠 든 아이와 남편을 집에 두고 브런치(바로 이 공간, 브런치 앱이요^^)를 만나러 도피한 저는, 동네의 한 커피숍에 홀로 앉아 있었습니다. 제법 작지 않은 곳이었지만 저녁이 다가오는 애매한 시간 탓인지 커피숍은 거의 텅 비어 있었습니다.


사실 들어설 때부터 실내는 연기로 자욱했습니다. 구수한 향내가 코 끝을 마구 헤집고 들어옵니다. 주인으로 보이는 한 남자가 매장 한 쪽에서 말 없이 커피를 볶고 있습니다. 안경 너머로, 다소 찡그려진 미간으로 그가 집중하고 있음을 알 수 있을 뿐 표정은 그윽하고 만족스럽기 그지없군요. 타닥타닥 소리를 내며 돌아가는 로스터 속 커피 콩들을 바라보는 그의 눈빛은 다름 아닌 아빠가 놀이터에서 뛰어 노는 제 자식을 바라보는, 딱 그 눈빛입니다.

그는 이따금 카운터 쪽에 있는 젊은 남자 직원을 불러와 손가락으로 머신을 가리키고, 이런저런 설명을 하고는 커피를 만져보고 냄새 맡게 합니다.

일에 집중하는 두 남자의 모습이 정말 보기 좋군요.


두 사람으로부터 약 일곱 걸음 정도 떨어진 저로 말하자면, 쉴 새 없는 커피 콩의 향기와 연기 속에서 약간 특이한 체험을 하는 중입니다. 내가 발 딛고 숨 쉬는 이 시공간이 아득하게 느껴지면서 어느 새 사알짝 현실과 유리된 기분.

눈과 뇌는 분명, 브런치 앱을 좇아 내가 좋아하는 작가의 새 글을 읽고 있으되 여기가 어디고 지금이 몇 시인지 누가 묻는다면 한참 생각해야 답이 떠오를 것 같은 마음 상태.


좋은데? 커피 한 잔 값으로
이런 기분까지 선물받다니!


속으로만 중얼거릴 즈음, 누군가의 목소리가 사뿐히 슬라이딩을 해 들어옵니다. 다름 아닌 제 마음 속으로.


아까부터 연기가 많이 나는데, 괜찮으세요?


아, 커피 로스터를 사이에 둔 주인의 목소리입니다. 커피 빈을 향하던 눈이 지금은 저를 보고 있군요.


괜찮네요. 오히려 좋은데요.


연기나 냄새가 혹시 나를 불쾌하게 만들지는 않았을까 염려하는 그의 말은 말투 자체는 조금 투박했지만, 자연스럽게 말을 이끄는 방식이 무척 세련되었다고 생각했습니다.

(이 와중에도 발동한 덕후의 기질 ㅎ)


잠시 후 생각지도 못한 커피 한 잔이 내 앞에 놓입니다.

핸드드립한 이디오피아 예가체프 콩가(얼른 메모해 두었습니다.)

이건 손님이 드시고 있는 더치커피와 같은 원두를 사용한 것인데, 핸드드립과 더치 방식의 차이를 한 번 느껴보세요. 더치커피를 시키신 걸 보니 커피 좋아하시는 분 같은데요.


(맙소사. 전 단지 늦은 오후에 들이켜는 카페인이 부담되었을 뿐입니다. 마침 메뉴 설명에 '추출 과정에서 카페인이 상당량 제거된다'고 적혀 있기에 선택했을 뿐.)


허나 커피에 관하여 저와 같은 미맹에 가까운 사람에게도 너무나 명확히 느껴지는 이 차이란! 맹세컨대 이 둘은 전혀 다른 커피입니다. 잡내가 제거되어 깔끔하고 매끄러운 더치커피와, 풍부한 향 속에서 산미가 느껴지는 핸드드립에는 그야말로 엄청난 차이가 있더군요.

두 커피를 번갈아 마시다가 문득, 카운터에서 보았던 판매용 더치커피 원액과 직접 볶은 커피 원두 봉지들이 떠오릅니다.

(이것은 저 분의 마케팅 전략이 아닐까?그렇다면 나는 공짜 커피를 마시고도 그냥 돌아가면 안 되는 것 아닐까?매장에 다른 손님도 없는데...)


허나 별 말도 없이 그저 커피 한 잔을 내주고는, 이윽고 하던 일로 돌아간 주인의 평온한 얼굴에는 아무런 의도도 읽히지 않습니다.

잠깐 망설이다가 그냥 집으로 오면서, 다음 주에 친구의 집을 방문하는 날 저 집에 들러 더치커피를 선물로 사 가리라 마음먹습니다.


말하기에서 진실함이 필수 요건이라면, 순수함은 금상첨화와 같습니다. 잘 만든 케익 위에 올라 앉은 금박 장식 같은 것이죠.

순수한 배려와 호의에는, 어떤 유려한 말솜씨도 따라가기 힘든 설득력이 스며 있습니다.


다만, 커피 추출 방식에 따라 달라지는 건 맛 뿐만이 아니더군요. 더치와 핸드드립 사이에는 카페인이 제거되고 안 되고의, 저로선 중대한 차이점이 있었습니다. 카페인 치사량(?)이 남들보다 낮은 저인데, 훌쩍 임계 수치를 뛰어넘어 버렸네요.

브런치에 이른바 '거절의 기술'을 연재할 준비를 하고 있는 저는 그 날 거의 뜬 눈으로 밤을 보내며 몇 번이고 생각했습니다.

두 번째 커피는 역시 잘 말씀드리면서 거절해야 했을까?

...

글쎄, 아무래도 동의할 수가 없습니다. 사람 사는 일에는 때론 내 짐작과 계산으로는 미처 닿지 않는 행운도 있는 법이잖아요.


'죄송해요. 제가 이걸 한 잔 더 마시면 잠을 못 자서 내일 일에 지장이 생길 것 같아서요.'

이렇게 커피를 완곡히 거절했다면, 저는 미각의 신세계를 맛보는 경험을 놓쳤을 뿐 아니라 호의를 거절한 데에서 오는 미안한 마음으로 공짜 커피를 마신 것 이상의 마음의 빚을 느꼈을 것이며, 결정적으로 이 글은 쓰일 수가 없었을 것입니다. 저로서는 행운을 놓친 셈이 되겠죠.


아. 그러니 아무리 생각해도 말하는 요령을 글로 쓰는 짓은 그만두어야 할 것 같습니다. ㅎㅎ

매거진의 이전글 #10. 못 들어주는 부탁의 미안함,이렇게라도 덜어요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