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디오피아 예가체프 콩가'를 아시나요?
아까부터 연기가 많이 나는데, 괜찮으세요?
낯선 이로부터의 첫 마디가 스윽. 나의 귀를 거쳐 가슴에 미끄러지듯 들어와 앉았습니다.
너무나 사뿐히 연착륙해 오히려 깜짝 놀랐습니다.
일요일 오후, 낮잠 든 아이와 남편을 집에 두고 브런치(바로 이 공간, 브런치 앱이요^^)를 만나러 도피한 저는, 동네의 한 커피숍에 홀로 앉아 있었습니다. 제법 작지 않은 곳이었지만 저녁이 다가오는 애매한 시간 탓인지 커피숍은 거의 텅 비어 있었습니다.
사실 들어설 때부터 실내는 연기로 자욱했습니다. 구수한 향내가 코 끝을 마구 헤집고 들어옵니다. 주인으로 보이는 한 남자가 매장 한 쪽에서 말 없이 커피를 볶고 있습니다. 안경 너머로, 다소 찡그려진 미간으로 그가 집중하고 있음을 알 수 있을 뿐 표정은 그윽하고 만족스럽기 그지없군요. 타닥타닥 소리를 내며 돌아가는 로스터 속 커피 콩들을 바라보는 그의 눈빛은 다름 아닌 아빠가 놀이터에서 뛰어 노는 제 자식을 바라보는, 딱 그 눈빛입니다.
그는 이따금 카운터 쪽에 있는 젊은 남자 직원을 불러와 손가락으로 머신을 가리키고, 이런저런 설명을 하고는 커피를 만져보고 냄새 맡게 합니다.
일에 집중하는 두 남자의 모습이 정말 보기 좋군요.
두 사람으로부터 약 일곱 걸음 정도 떨어진 저로 말하자면, 쉴 새 없는 커피 콩의 향기와 연기 속에서 약간 특이한 체험을 하는 중입니다. 내가 발 딛고 숨 쉬는 이 시공간이 아득하게 느껴지면서 어느 새 사알짝 현실과 유리된 기분.
눈과 뇌는 분명, 브런치 앱을 좇아 내가 좋아하는 작가의 새 글을 읽고 있으되 여기가 어디고 지금이 몇 시인지 누가 묻는다면 한참 생각해야 답이 떠오를 것 같은 마음 상태.
좋은데? 커피 한 잔 값으로
이런 기분까지 선물받다니!
속으로만 중얼거릴 즈음, 누군가의 목소리가 사뿐히 슬라이딩을 해 들어옵니다. 다름 아닌 제 마음 속으로.
아까부터 연기가 많이 나는데, 괜찮으세요?
아, 커피 로스터를 사이에 둔 주인의 목소리입니다. 커피 빈을 향하던 눈이 지금은 저를 보고 있군요.
네 괜찮네요. 오히려 좋은데요.
연기나 냄새가 혹시 나를 불쾌하게 만들지는 않았을까 염려하는 그의 말은 말투 자체는 조금 투박했지만, 자연스럽게 말을 이끄는 방식이 무척 세련되었다고 생각했습니다.
(이 와중에도 발동한 덕후의 기질 ㅎ)
잠시 후 생각지도 못한 커피 한 잔이 내 앞에 놓입니다.
이건 손님이 드시고 있는 더치커피와 같은 원두를 사용한 것인데, 핸드드립과 더치 방식의 차이를 한 번 느껴보세요. 더치커피를 시키신 걸 보니 커피 좋아하시는 분 같은데요.
(맙소사. 전 단지 늦은 오후에 들이켜는 카페인이 부담되었을 뿐입니다. 마침 메뉴 설명에 '추출 과정에서 카페인이 상당량 제거된다'고 적혀 있기에 선택했을 뿐.)
허나 커피에 관하여 저와 같은 미맹에 가까운 사람에게도 너무나 명확히 느껴지는 이 차이란! 맹세컨대 이 둘은 전혀 다른 커피입니다. 잡내가 제거되어 깔끔하고 매끄러운 더치커피와, 풍부한 향 속에서 산미가 느껴지는 핸드드립에는 그야말로 엄청난 차이가 있더군요.
두 커피를 번갈아 마시다가 문득, 카운터에서 보았던 판매용 더치커피 원액과 직접 볶은 커피 원두 봉지들이 떠오릅니다.
(이것은 저 분의 마케팅 전략이 아닐까?그렇다면 나는 공짜 커피를 마시고도 그냥 돌아가면 안 되는 것 아닐까?매장에 다른 손님도 없는데...)
허나 별 말도 없이 그저 커피 한 잔을 내주고는, 이윽고 하던 일로 돌아간 주인의 평온한 얼굴에는 아무런 의도도 읽히지 않습니다.
잠깐 망설이다가 그냥 집으로 오면서, 다음 주에 친구의 집을 방문하는 날 저 집에 들러 더치커피를 선물로 사 가리라 마음먹습니다.
말하기에서 진실함이 필수 요건이라면, 순수함은 금상첨화와 같습니다. 잘 만든 케익 위에 올라 앉은 금박 장식 같은 것이죠.
순수한 배려와 호의에는, 어떤 유려한 말솜씨도 따라가기 힘든 설득력이 스며 있습니다.
다만, 커피 추출 방식에 따라 달라지는 건 맛 뿐만이 아니더군요. 더치와 핸드드립 사이에는 카페인이 제거되고 안 되고의, 저로선 중대한 차이점이 있었습니다. 카페인 치사량(?)이 남들보다 낮은 저인데, 훌쩍 임계 수치를 뛰어넘어 버렸네요.
브런치에 이른바 '거절의 기술'을 연재할 준비를 하고 있는 저는 그 날 거의 뜬 눈으로 밤을 보내며 몇 번이고 생각했습니다.
두 번째 커피는 역시 잘 말씀드리면서 거절해야 했을까?
...
글쎄, 아무래도 동의할 수가 없습니다. 사람 사는 일에는 때론 내 짐작과 계산으로는 미처 닿지 않는 행운도 있는 법이잖아요.
'죄송해요. 제가 이걸 한 잔 더 마시면 잠을 못 자서 내일 일에 지장이 생길 것 같아서요.'
이렇게 커피를 완곡히 거절했다면, 저는 미각의 신세계를 맛보는 경험을 놓쳤을 뿐 아니라 호의를 거절한 데에서 오는 미안한 마음으로 공짜 커피를 마신 것 이상의 마음의 빚을 느꼈을 것이며, 결정적으로 이 글은 쓰일 수가 없었을 것입니다. 저로서는 행운을 놓친 셈이 되겠죠.
아. 그러니 아무리 생각해도 말하는 요령을 글로 쓰는 짓은 그만두어야 할 것 같습니다. ㅎ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