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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동빈 Feb 10. 2016

가질 수 없는  그것을 말하다.

디태치먼트 (Detachment, 2011)

대부분 영화는 '모티브'를 갖고 있다. 어떠한 스토리의 모티브 말고, 다른 비슷한 영화 말이다. 예를 들어 영화 <도둑들>의 경우 오션스 시리즈를 모티브로 잡았다고 불리는데 더 깊게 보면 74년도 미국 영화 <타워링> (Tower Inferno) 영향을 더 많이 받았다고 보인다.


모티브까지는 아니지만 비슷한 전개나 스토리 혹은 구상의 경우가 많은데  한국 영화 <태극기 휘날리며>는 미국 전쟁 영화 <라이언 일병 구하기>와 비슷하다는 평이 있으며 <신세계>는 무간도와 비슷하다는 지적이 있다.


이런 비슷한 부분은 꼭 나쁜 것은 아니다. <신세계>는 비록 무간도와 비슷한 내용이라고 해도 충분히 다르고 짜릿한 관점으로 관객들에게 반전에 반전을 선사했듯 말이다.


하지만 어떤 영화든 모티브가 없고 비슷하지 않다고 느껴지는 영화를 우리는 신선한 영화라고 말하는 것 같다. 또한 영감 받거나 테마가 되는 부분을 제시하는 경우도 있는데, 스토리와 촬영기법을 통해 관객들의 마음 깊은 곳까지 요동치게 하는 영화들이 있다.


디테치먼트가 그런 영화 중 하나이다. 

영화 첫 장면부터 알베르 까뮈 (소설가, 작가, 철학자; 프랑스 노벨 문학상 수상)를 인용한다. 까뮈의 인용문을 영화 도입부에서 만날 때는 그저 영화 제목과 같은, DETACHMENT (차별됨, 떨어짐, 객관성)의 사전적 의미로만 해석이 된다. 큰 의미를 알기 힘들고  그저 인용문인 듯 바라보기 쉽다.  하지만 까뮈가 말한 DETACHMENT의 의미는 그저 단순한 차별성과는 다르다.


"and never have I felt so deeply at one/ and the same time so detached from myself/ and so present in the world "


<여태껏 어느 하나에 이러한 깊이를 느끼지 못하였고 동시에 내 스스로에게서 격리되어 세상에서 현재하고 있는 느낌이다>


이 아이디어는 영화 디테치먼트에서 가장 중요한 아이디어이다. 까뮈의 부조리주의( absurdism)를 잘 보여주는 인용문인데, 부조리주의란 인간이 목적을 찾기 위해 하는 노력과  그것을 찾을 수 없는 인간의 무능력함 속에서 탄생하는 싸움을 강조하는 철학이다.


이 영화가 그렇다. 아무것도 없는 곳에서 아무것을 찾으려는 사람들에게 결국 아무것도 없다는 것을 보여주는 영화. 촬영 기법과 배우들의 연기, 그리고 어두워 보이지만 모두가 함께 절망할 수 있는 내용을 다루는 영화. 


대부분 사람들은 이걸 교육에 대해서 비판하는 거라고 말한다. 혹은 부모님의 태도? 물론 모두 포함하고 있는 내용인 것 같다. 하지만 내 생각엔 정치적 요소들이 만드는 가정교육의 퇴보, 그리고 아이들의 무너진 꿈 등 또한 많이 있는 것 같다. 이러한 여러 소요들 중 가장 부각되는 것은 아마 관객이 어느 부분에 더 공감하느냐에 따라 다를 것 같다.


이 영화는 위에 언급된 내용들을  이야기하고 있기도 하지만 어쩌면 '희망에 굶주린 이들의 발악, ' 그리고 그 결론이 아닐까.

영화가 교육에 관한 이야기라고 말하는 사람들은 이 장면이 교육의 감옥이라고 말할 것 같다. 혹은 사회의 감옥?  하지만 까뮈의 인용문을 조금 더 생각해보면 어쩌면 이것은 스스로의 감옥이다. 

선생님의 말은 무시당하고 아이들은 버릇이 없고 고집이 세며 범죄와 문란한 생활에 익숙해진, 그런 곳이 이 영화의 배경이다.  

기간제 교사인 헨리가 처음 수업에 들어오자 흑인 학생이 자신의 질문을 무시했다는 이유로 헨리의 가방을 내던진다. 그런데 헨리는 당황한 내색도 크게 보이지 않고 오히려 이해한다는 말로 자신을 설명한다:


'네가 던진 저 가방엔 감정이 없어. 그리고 나도 감정이 없어.'

'네가 화가 난 건 알아. 증오심이 가득 차고. 나도 그랬어.'


이 부분에서 헨리는 상대를 이해해준다고 말하며 자신이 감정의 동물인 사람과 달리 감정이 없다고 하는 모습이

마치 자신의 존재가 평범한 사람이 아님을 드러내는 것 같다. 


어쩌면 예수와 비교하는 게 아닐까. 인간이자 인간이 아닌 예수, 인간이자 인간답지 않게 감정이 없는 헨리 

차분하고 이해한다는 모습, 그가 하는 말은 예수가 성경에서 말하는 우화와 같기도 하다. 


물론 "헨리가 예수다"라고 할 수 없지만, 기독교의 십자가와 예수에 대한 이미지는 영화 내에서  헨리뿐만 아니라 다른 캐릭터들에게도 추가로  제시되는 걸 볼 수 있다. 

헨리의 삶은 어쩌면 학생들의 삶보다 더 처절하고 지루하고 망해가는 그런 삶이다. 그는 아버지가 없고 엄마는 약을 먹고 자살했다. 그의 할아버지는 딸의 죽음에 대한 죄책감에 정신병으로  힘들어하며, 헨리는 매일 저녁 셔츠를 풀어헤치고 거리를 방황한다. 생각에 빠지면 그걸 공책에 적기 시작하고, 글쓰기가 용기를 주고 삶을 낫게 해준다고 믿는 그런 사람이다.

여느 날과 같이 방황을 하다 만나게 된 소녀. 어린 나이지만, 이미 삶을 포기하고 남성들에게 돈을 받으며 관계를 갖는다. 


여자 아이가 헨리에게 배가 고프니 돈을 좀 달라고 말한다. 

"내 집에 가자. 먹을게 있을지도 몰라."


첫 만남에서 관계를 거부하고 도망치듯 멀어졌던 헨리의 모습과 두 번째의 우연한 만남은 크게 다름을 알 수 있다. 무엇이 그를 바꾼 걸까. 


(생략)


그는 학교에서 또 집에서 '학생'들을 가르치기 바쁘다. 유명한 사립학교에서 가르치다 이런 쓰레기통 학교에 오게 된 그. 그는 과연 무엇 때문에 여기까지 오게 된 걸까. 


영화는 다큐멘터리처럼 진행이 된다. 수염이 긴 헨리가 자신의 옛 시절을 추억하는 인터뷰들이 나오고 그 중간중간에 헨리가 생각하는 부분들이 표현이 된다. 영화의 많은 장면은 초점이 맞지 않고 흔들린다. 우리가 책에서나 읽고 흔히 알고 있는 "좋은 영화"라는 개념과는 다르다. 하지만 그러한 촬영과 편집이 이 영화의 무의미함에 더 큰 기반을 만들어 준건 아닐까.


(생략) 


친구가 없어서 혼자 화장실에 숨어 밥을 는 메레디스. 이 아이는 매일 자신의 부모로부터 스탠퍼드 대학에나 가라고, 공부나 하라며 압박을 받는, 그런 아이다. 학교에서 친구들은 뚱뚱한 자신을 놀리고 신경 써주지 않기에, 그녀는 진정 혼자다.


하지만 메레디스는 사진을 정말 잘 찍고 편집하기를 좋아한다. 그리고 그녀는 헨리를 좋아한다. 헨리는 메레디스에게 마치 구세주와 같은 존재다.


(생략)


헨리가 수업시간에 세상의 마케팅이라는 짧고 열정적인 강의를 한다.


우리는 24시간 동안 미디어에 휩쓸려 산다, 그들은 우리에게 무엇을 생각할지 쥐어준다,

우리가 창의력 없이 그저 받아먹는다면, 이것은 마케팅에 빠지는 것뿐이다, 

세상은 여자가 날씬해야 아름답다고 하고, 아름다워야 행복하다고 말하고,

아름답기 위해선 성형을 해야 한다고 말하고,

여자들이 창녀라고 말하고, 쉽게 대우하고 쓰레기처럼 대우해도 된다고 말하고, 

그저 아무렇게나 대우해도 된다고 말하고.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우리의 마음을 지켜야 한다.

그렇다면 어떻게? 

읽고 상상하고 글을 쓰면서 스스의 규율을 만듦으로써.


이 부분은 영화의 마지막에 굉장히 중요한 부분으로 연결이 된다.


모든 교사들이  힘들어한다. 사무실에서 교사들이 이야기를 나누다가 음성사서함에 메시지가 하나 들어온다. 일을  그만두겠다는, 화가 난 전 교사의 메시지. 


"이 아이들은 내 영혼에 침을 뱉었어요, 이런 굴욕은 멈춰야 해요, 

규율과 훈육이 회복되어야  하고.. (생략) 

뭐 모든 애들이 값어치가 있다고? (생략)

이런 병신 같은 애들! 이 애들은 꿈도 없고 의욕도 없고 (생략)"


그러다 그 음성 메시지는 교사의 목소리가 아니라 히틀러의 연설로 변한다.

수업시간에 연설 장면을 보는 아이들의 모습으로 연결된다. 이 부분은 상당히 인상적이다. 사회를 비판하는 모습이고 결국 일을 그만둔 선생이 히틀러와 같다는 의미가 있는 것 같다. 하지만 '선생'을 떠나서 '어른' 그리고 '권력자'의 위치와 영향에 대해서 질타한 거에 더 가깝다는 생각이 든다.


부조리주의는 포스트모더니즘과 피할 수 없는 관계인데, 그렇기에  하나의 진실이 아니라 권력자들의 진실이 진실이 된다는 내용이 표현되고 있다. 

영화에서 선생님들이 가장  힘들어하는 부분은 무관심이다. 그들에게 아무도 고맙다는 말 한마디 하지 않고, 아무도 그들의 존재를 인정해 주지 않는다.  그리고 한 가지 중요한 사실은 영화에서 헨리는 모두가 힘들어하고 모두가 상처가 있다는 것을 강조한다는 것이다. 선생님들 또한 학교 내에서의  문제뿐만 아니라 집안에서도 문제가 있는 것을 보여준다.


헨리는 큰 결정을 내린다. 자신과 함께 가족같이 살았던 길고양이를 이제 고아원에 보내주기 위해 사회복지기관에 연락을 한다. 아마 영화에서 가장 감정이 고조되는 장면이 이 부분이 아닐까.

마치 쓰러져가는 하나의 나무와 같은 헨리. 그는 사랑한다 말도  못 하였던 가족 같은 그녀의 냄새만 맡아본다. 

여기서 그들이 사랑하는 사이로 발전을 했는지 (가능성은 충분하지만) 아닌지는 확정 짓기 힘들다.


메레디스는 자신의 죽음을 미리 연출한다. 십자가에 못 박힌 듯 누워 그녀는 삶을 돌아본다. 그녀의 방은 자신의 추상적 예술작품들로 가득 차 있는데 마치 예수가 같은 족속 유대인들에게 십자가 형을 당했듯, 학생들로부터 받은 핍박과 십자가형을 보여 주는 듯하다. 

영화 속에서 보이는 메레디스는 천재적입니다.  그녀가 표현되는 흑백 또한 너무 잘 표현되어있고, 그녀의 의상만 흑백이 아니라 그녀의 성격 또한 흑백이다. 헨리 선생을 좋았지만 헨리가 그녀를 제자로써 좋아하는 것은 좋아하는 게 아니라는 논리. 미지근한 게 없는, 자살이 해방구라는 말을 증명하겠다는 흑백논리. 

마지막 수업시간 아이들은 분명 바뀌었다. 처음 선생님의 가방을 던졌던 흑인 친구는 오히려 선생님이 보고 싶을 거라고 하고,  다른 선생님들은 지루하다고 가지 말라고 한다. 영화에서 선생님들과 헨리의 학교 밖 삶은 표현이 되었지만 아이들의 가정은 메레디스를 제외하곤 모두 감춰졌다. 

그렇게 메레디스는 자신이 만든 컵케이크에 넣은 약으로 죽는다. 까뮈가 말하는 삶의 의미를 찾을 수 없는 자의 찾으려는 노력에 의한 충돌. 

재밌는 건 헨리는 메레디스를 살리려고 인공호흡하며 말한다: 괜찮아질 거라니깐. 그가 항상 하는 말이었다. 자신의 죽어가는 할아버지와 자신이 구해준 길고양이 같은 소녀에게도 글을 쓰면 괜찮아진다며 위로했다. 

하지만 메레디스는 마음의 여유가 없었던 걸까, 아니면 자신의 존재를 알리고 싶은 발악이었을까?

한 명은 구토를 하고 있고 교장 선생님은 상황을 정리하려 하고 있고 헨리는 십자가형을 목격했다. 십자가형은 그 당시 가장 참혹한, 중죄인에게 내리는 벌이였는,  성경에서 예수는 아무 죄가 없는데 십자가 형을 당한다. 영화 속에서 메레디스는 아무 잘못 없이 주변 환경에 의해  자살한다 됩니다. 그런데 여기서 쇼킹한 부분은 그저 죽었다는 게 비슷해서가 아니다. 


유대-크리스천 종교문화에서 자살은 용서받지 못하는 죄로 알려져있는데, 자살을 그 종교문화에 가장 중요한 상징인 십자가에 비교했다는 게 충격적이다.


두 번째로 중요한 것은 메레디스가 약을 먹고 죽은 것은 헨리의 엄마가 약을 먹고 죽은 것에 비슷한 점을 알려주고 있다. 비록 헨리의 엄마는 십자가 모양을 하고 죽은 것은 아니지만 나체로 땅에 누워 팔을 위로 올리고 죽은 것이 마치 예수가 죽고 나서의 모습을 연상시킨다. 


메레디스가 자신에게 안기는 장면을 목격한 여선생. 헨리를 의심했던 여교사는 죽음 뒤에 홀로 교실에 남아있는 헨리에게 다가온다. 


그러자 헨리가 말합니다:

나는 여기에 있는 게 아니야. 너는 나를 볼 수 있겠지만 내 안은 텅 비어있지. 까뮈의 말과 같습니다. 

  

"and never have I felt so deeply at one/ and the same time so detached from myself/ and so present in the world "


<여태껏 어느 하나에 이러한 깊이를 느끼지 못하였고 동시에 내 스스로에게서 격리되어 세상에서 현재하고 있는 느낌이다>


이 말은 자신의 이기적인 모습과 욕심을 내려놓았을 때 비로소 사회의 압박과 규율에서 벗어난 (detached) 스스로를 찾는다는 뜻으로 해석이 된다. 이러한 개념을 담고 있는 이 영화에서 지금 저 교실의 장면은 욕심과 이기적인 모습을 버린 헨리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그리고 그는 생각을 한다. 벤치에 앉아 과연 무슨 생각을 하는 걸까? 그가 버릴 욕심은 무엇이고, 그렇게 해서 얻게 되는게게 있는 걸까. 예전에 그는 저녁에 거리를  방황하고 공책에 자신의 솔직한 마음을 적었을 텐데 이제 그는 행동으로, 실천으로 옮기게 된다. 스스로가 진정으로 원하고 필요한 것. 이 영화에서 가장 아름다운 장면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든다. 


해가 지는 시간에 헨리는 다시 (가족이라면 가족 사랑하는 연인이라면 연인, 제자라면 제자가 될) 사람과 함께 재회한다. 그 후의 이야기는 헨리가 말했던 것처럼 오직 상상에서만 나타난다. 

"복도를 걸어가고 다음 수업에 갈 때... 너희 중 몇 명이나... 너희 어깨에 올라가 있는 무게를 느꼈니?"

(모두 손을 듬) 

"난 그랬어. 모두지?"


"(애드거 앨랜) 포는 100년 전에 그런 거에 대해서 썼어."


헨리는 다시 아이들 앞에 서서 가르치고 있다. 


"우리가 어셔가의 몰락을 읽을 때 이건 그냥 쓰러져가는 집에 대한 옛날 시가 아닌 거야. 이건 육체적인 환경을 말하기도 해."


그러고선 헨리는 포의 어셔가의 몰락 10장을 읽기 시작한다. 

결국 헨리는 혼자 상상 속에서 - 까뮈가 말한 것처럼 욕심과 이기적인 것들을 버리고 스스로를 찾은 것처럼 - 아무도 없는 교실에서 어셔가의 몰락을 읽고 있었다. 


영화 디테치먼트는 그냥 '교육에 대한 비판 영화'로 설명하기엔 아까운 작품인  듯하다.  목적을 찾으려는  욕망과 그 속에서 피어나는 절망, 그리고 헤엄쳐 나올 수 없는 바다와 같은 눈물 속 발견하는 민들레 꽃 같은 그런 영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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