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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obiwan Dec 04. 2015

<건축학 개론> 읽기

영화읽기 1.

<건축학 개론> 수업에서 교수는 세 가지 과제를 차례로 내준다. 


  첫 번째 과제 : 내가 사는 동네를 탐사할 것.

  두 번째 과제 : 나에게서 가장 먼 곳을 탐사할 것.

  세 번째 과제 : 내가 꿈꾸는 공간을 탐사할 것.


  건축학 개론은 이 세 과제로 이루어져 있다. 1996년 대학 신입생이었던 승민과 서연은 이 건축학개론 안에서 만났다가 헤어진다. 그러나 승민과 서연의 건축학 개론은 10여 년이 더 지나서야 끝을 맺는다.

  먼저 승민을 살펴보자. 그가 태어나 자란 공간은 서울 강북에 위치한 정릉이다. 그는 시장에서 순댓국집을 운영하는 홀어머니의 아들이다. 승민에게 가장 먼 공간은 강남에 위치한 개포동이다. 정릉과 개포동 사이에서 승민의 콤플렉스는 형성된다. 이 콤플렉스는 승민을 '찌질하게' 만들고 세 번째 과제로 나아가지 못하게 한다.

 서연이 태어나 자란 공간은 제주도다. 그녀는 지방 학원출신이다. 그녀에게도 가장 먼 곳은 강남이다. 하지만 강남은 그녀가 꿈꾸는 공간이기도 하다. 서연은 '압서방'에 속하기 위해 반지하 방을 구하고 대학을 졸업해선 의사와 결혼해 '개포동'에 정착한다. 그러나 개포동에서 그녀의 삶은 "X발 X같아'져 버린다.   

내가 사는 동네를 지도에 표시하는 승민

   

  그러므로 승민과 서연의 첫사랑이 이루어질 수 없는 것은 당연하다. 사랑이란 함께하는 공간을 만드는 일이다. 그러나 두 사람은 그 공간을 함께 만들지 못하고 첫 번째 그리고 두 번째 과제를 수행하면서 서로 어긋나 버린다. 여기에 누구의 잘못이 더 큰가를 따지는 건 온당치 않아 보인다. 정릉 시장의 순댓국집 아들에게 특별히 더 대범할 것을 요구할 순 없다. 반짝거리는 '압서방' 딱지를 좀 붙여보고 싶었던 서연의 욕망은 사실 우리들의 그것들과 많이 닮아있지 않은가?

  가장 가까운 곳과 가장 먼 곳 사이에서 우리는 모두 지질해지기도 하고 어리석은 욕망에 빠지기도 한다. 서연은 압서방을 꿈꾸고 강남선배와 함께 승민의 짝퉁 guess 티셔츠를 비웃으며 승민에게 상처를 준다. 승민은 어머니에게 강남으로 이사를 가자는 철없는 요구와 함께 그 짝퉁 guess 티셔츠를 벗어던지고 집 대문을 걷어차며 나가버린다. 서연에게 "꺼져줄래"라 말하고 '쌍년'이라 욕한다. 그러나 20살 때 미숙하지 않은 영혼이 어디 있을까?

  물론 서른이 넘었다고 성숙해지는 건 아니다. 영화의 첫장면에서 제주도 집을 찾아간 서연을 영화는 어떻게 보여주는가? 럭셔리한 하이힐과 선글라스.. 서연은 여전히 가장 먼 곳 어딘가를 방황하고 있다. 승민도 마찬가지다. 그는 아직도 엄마를 어떻게 떠나야 할지 모르는 길버트 그래이프 같다.

  10여 년 전 두 사람은 첫눈 오는 날 함께 할 공간을 꿈꾸었고 열심히 그 공간을 청소하고 화분에 꽃을 심으며 준비했었다. '우리가 꿈꾸는 공간'은 그렇게 '내가 사는 곳'과 '나에게서 가장 먼 곳 사이'에서, 미래를 심고 준비하면서 실현되는 곳이다. 우리는 그러한 행위들의 축적 속에서, 그것이 만들어내는 시간의 지층들 속에서 성장한다. 그러나 미숙한 두 사람은 그 시간의 지층들을 만들지 못했고, 함께 꿈꾸는 공간을 만들어내지 못한다.

굳게 닫힌 문, 열리지 못한 시간과 공간.

  다시 만난  승민과 서연은 제주도에서 함께 서연의 집을 짓는다. 미쳐 마치지 못한 건축학개론의 마지막 과제다. 집을 짓는 과정 속에서 두 사람은 어른이 되어간다. 그러므로 집이 완성되었을 때 두 사람은 서로의 감정을 솔직하게 털어놓을 수 있었다. 건축학개론을 마치면서 두 사람의 첫사랑도 이제야 끝을 맺는다.  

  이제 두 사람은 각자의 길을 떠난다. 재미있는 건 두 사람의 길이 사뭇 다르다는 것이다. 서연은 고향으로 돌아와 아버지를 모시고 살면서 다시 피아노를 친다. 서연은 가장 먼 곳에서 방황하다 다시 '내가 사는 동네'로 돌아오는 길을 택한다. 반면 승민은 결혼과 함께 미국으로 떠난다. 정릉집에서 마지막으로 어머니의 순댓국을 먹고, 10여 년 전 자신이 걷어 차 찌그러진 대문을 부여잡고 울면서, 그는 집을 떠나 가장 먼 곳으로 간다.

  집으로 되돌아오는 서연과 집을 떠나는 승민은 이번에도 어긋난다. 첫사랑은 이렇게 항상 그 과녁을 빚맞히는가? 아니, 사랑하는 모든 두 사람은 불가능한 꿈을 꾸고 있는지도 모른다.  '나'(내가 사는 곳)와 '너'(가장 먼 곳)가 하나가 되고자 하는 꿈(내가 꿈꾸는 공간). 그것이 사랑이 뜻하는 바라면.   

'나'와 '너'로 이루어진 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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