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르한 파묵의 <소설과 소설가>를 읽고
문학작품의 예술성을 판단하는 문제는 정말 어렵습니다. 대학에서 국문학을 전공했고, 학교에서 문학을 가르쳐온 저도 제가 추천한 한 작품에 대해 다른 선생님께서 의문을 제기하실 때, 마땅히 그 작품이 왜 훌륭한지에 대한 확실한 근거들을 대지 못했습니다. 이런 일은 종종 일어납니다.
학부시절, 강원도로 국문과 답사를 떠난 적이 있었습니다. 새벽 3시 쯤, 소설을 가르치시는 교수님 한분과 대학원에서 시를 전공하는 선배, 그리고 저를 포함한 학부생 3명이 마지막까지 남아서 문학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습니다. 그때 저와 친한 한 선배가 평소 수업시간에 작가 신경숙을 비판하시던 교수님께 술의 힘을 빌려 호기롭게 질문했습니다. “교수님, 교수님은 왜 신경숙을 욕하세요? 저는 좋아요. 좋다구요.” 제 기억을 되살려보면, 그 논쟁은 신경숙의 문장이 적확하지 못하기 때문에 독자에세 선명한 그림을 그려주지 못한다는 교수님의 주장과 자신에겐 신경숙의 문장이 선명하게 이해가 된다는 선배의 주장이 평행선을 달리면서 지지부진하게 끝나버렸습니다. 이런 갈등은 수도 없습니다. 기형도는 이성복에 비할 바 못된다 혹은 된다. 김영하보다 윤대녕이 낫다 혹은 못하다. 교사가 되어서도 이런 상황들을 계속 만나게 되었습니다. 수행평가로 아이들에게 읽힐 소설목록을 선정할 때, 수업시간에 어떤 소설을 엮어읽기 시킬까를 정할 때도 교사들이 갖고 있는 문학성에 대한 판단이 각각 다르기 때문에 종종 작은 갈등들을 겪기도 했습니다.
그런데 문학성에 대한 객관적 논의가 어려운 것은 문학을 읽는 행위가 예술적 체험이기 때문입니다. 소설을 읽는 독자의 머리 속에서 일어나는 경험은 주관적이기 때문에 그것을 객관화하여 공론의 장에서 소통하기가 쉽지 않은 것이겠지요. 내가 느낀 감동은 지극히 사밀적인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것을 객관화해버리는 과정 자체가 내가 느낀 체험을 죽이기 때문에 환멸감을 느끼게 되기도 합니다.
만약 제가 문학평론가라거나 문학성을 전문적으로 탐구해야할 연구자라면 이 문제에 천착해야 함이 당연합니다. 그러나 전 교사입니다. 학생들을 소설의 세계에 들이밀어서 느끼고 생각하도록 도와줘야하는 직업을 가진 사람입니다. 그리고 학생 스스로 소설읽기체험을 통해서 그 작품을 판단하도록 해줘야 하는 것이 제 일이 아닐까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소설읽기의 ‘체험’이 더 중요한 문제임을 일깨워준 책이 있습니다. 소설가 오르한 파묵이 하버드 대학에서 강연한 내용들을 묶은 <소설과 소설가>가 바로 그 책입니다.
파묵은 톨스토이의 <안나 카레니나>의 한 장면을 통해서 소설읽기에 대한 이야기를 시작합니다.
“안나는 모스크바에서 우연히 브론스키와 만나고 기차로 상트페테부르크의 집으로 돌아가는 길입니다. 그녀는 내일 아침이면 아이와 남편을 본다는 생각에 기쁨에 차 있습니다.
[안나는] 작은 손가방에서 페이퍼 나이프와 영국 소설을 꺼냈다. 처음에는 글이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우선 주위의 소란과 사람들의 발소리가 그녀를 방해했다. 그런 다음 기차가 움직이기 시작하자, 그녀는 기차 소리를 듣지 않으려 해도 듣지 않을 수 없었다. 그다음엔 왼쪽 창문을 두들기며 유리창에 달라붙은 눈, 옷가지를 몸에 칭칭 감은 채 차창 옆을 지나가며 눈을 맞고 다니는 사람들의 모습, 바깥에 불고 있는 매서운 눈보라에 대해 사람들이 나누는 말소리가 그녀의 주의를 흐트러뜨렸다. 그 다음부터는 똑같은 풍경이 계속 되풀이 되었다. 덜컹거리는 기차 소리와 문을 여닫는 소리, 창밖에 내리는 눈, 열기에서 냉기로 다시 냉기에서 열기로 급격하게 바뀌는 실내 온도, 어슴푸레한 어둠 속에서 아른거리는 얼굴들, 똑같은 목소리. 그러는 사이 안나는 책을 읽고 그 내용을 이해하기 시작했다. 안누슈카는 한 짝에 구멍이 난 장갑을 깐 넓적한 두 손으로 무릎 위에 놓인 빨간 손가방을 붙잡고서 졸고 있었다. 안나 아르카지예브나는 책을 읽고 내용을 이해했지만, 책을 읽는 행위, 다시 말해 다른 사람들의 삶의 반영을 좇는 행위가 마음에 들지 않았다. 그녀로서는 자신의 삶을 살고 싶은 마음이 간절했다. 소설의 여주인공이 환자를 간호하는 장면을 읽으면, 그녀도 발소리를 죽이며 병실을 돌아다니고 싶었다. 레이디 메리가 말을 타고 사냥감을 쫒거나 새언니를 골리거나 대담한 행동으로 주위 사람들을 놀라게 하는 장면에서는, 그녀도 직접 그것을 똑같이 해 보고 싶었다. 하지만 그녀가 할 수 있는 일은 아무것도 없었다. 그래서 그녀는 자그마한 손으로 매끄러운 페이퍼 나이프를 만지작 거리며 책을 읽으려 애썼다.
안나는 브론스키 생각을 지울 수가 없었기 때문에, 자신의 삶을 살고 싶었기 때문에 책을 읽어 나가지 못했던 것입니다. 만약 안나가 계속 읽어 나갔다면 창밖 풍경을 바라보듯 레이디 메리가 말을 타고 무리를 따라가는 장면을 쉽게 눈앞에 떠올릴 수 있었을 것이고, 외부에서 바라보던 소설 속 풍경으로 서서히 들어갈 수 있었을 겁니다.”
파묵은 흥미롭게도 소설의 세계로 빠져드는데 어려움을 겪는 안나를 보여주면서 우리에게 소설 읽기의 체험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소설은 ‘제 2의 현실’이기 때문에 안나의 경우처럼 우리가 살아가는 현실과 동등할 만큼의 무게감을 가지고 있음을 반증하는 장면이기도 합니다. 안나는 잘 못하고 있지만, 소설을 읽는다는 건 소설의 풍경 속으로 걸어들어가는 행위입니다.
파묵은 한 장을 할애하여 소설읽기의 체험을 자세히 분석하고 있습니다. 독자가 소설을 읽을 때 머리 속에서 일어나는 작업들을 9가지로 나누어 설명합니다. 9가지 작업들을 요약해보겠습니다.
① 우리는 전체 풍경을 바라보고, 이야기를 따라간다. 이야기를 따라가면서 우리가 마주친 것들이 어떤 의미가 있고 주제가 무엇인지 이해하려고 하면서 읽는다. 서술자가 수없이 많은 잎사귀만 일일이 묘사한다고 하더라도, 이 잎사귀들이 모여 결국 어떤 이야기를 형성할지 생각하며 머리 속으로 어떤 모티프, 아이디어, 의도, 숨은 중심부를 찾는다.
② 우리는 머릿속에서 단어를 그림으로 전환한다. 소설의 이야기는 수많은 사물, 소리, 대화, 상상, 추억, 지식, 생각, 사건, 장면 묘사 들을 통해 서서히 우리 앞에 나타난다. 소설을 읽는 희열은 단어들을 머릿속에서 그림으로 전환하는 즐거움이다. 그러면서 우리는 이 소설이 말하고 싶어하는 것, 즉 소설의 중심부를 찾으며 상상력을 펼쳐간다
③ 한편으로 우리는 소설에서 어디까지가 작가의 경험이며, 어디까지가 작가의 상상인지를 궁금해한다. 소박하게 소설이 실재라고 생각하며 자신을 잊는 것과 어디까지 상상인지 성찰하며 궁금해하는 것은 논리적으로 모순된다. 하지만 소설 읽기는 서로 모순되는 생각을, 지속적으로, 불안감을 느끼지 않고 동시에 믿는 행위다.
④ 우리는 소설을 읽으며 소설에서 설명하고, 보여주고, 묘사한 것들이 우리가 살아가는 삶의 현실과 같은 것
인지 비교한다. 예를 들어, 우리는 ‘1870년대 모스크바에서 상트페테르부르크로 가는 야간열차가 소설을 읽을 수 있을 정도로 조용하고 편안했을까?’와 같은 의문을 가질 수 있다.
⑤ 우리는 적절한 단어, 정확한 비유, 상상과 이야기의 힘, 문장의 축적, 산문의 비밀스럽고 솔직한 시와 음악을 가늠하고 음미한다. 스타일이 주는 희열과 과제를 느낀다.
⑥ 우리는 주인공들의 선택과 행동에 대한 도덕적 판단을 내리기도 하고, 동시에 주인공에 대한 도덕적 판단들을 통해 작가를 판단하기도 한다. 소설에서 도덕적 판단은 피할 수 없지만 소설 예술은 인간을 심판할 때가 아니라, 이해할 때 가장 고매하고 탁월한 성과를 낸다는 것을 잊지 말고 거기에 너무 휩쓸리지 말아야 한다. 소설에서 도덕은 풍경의 일부일 뿐이다.
⑦ 우리 머릿속에선 이 모든 작업이 동시에 행해지는 사이, 한편으로 우리는 자신이 얼마나 깊은 이해에 도달했는지를 떠올리며 으쓱해지기도 한다. 특히 문학성이 높은 소설의 경우 우리가 그 작품과 맺는 밀접한 관계는 사적인 성공처럼 여겨지기도 한다. 소설이 마치 우리를 위해 쓰인 것 같은 달콤한 착각을 느낀다. 우리와 작가 사이에 형성된 이러한 친민감과 은밀함은 책에서 이해하지 못하거나 받아들일 수 없는 부분이 나와도 이를 넘어가도록 하는데 일조한다. 즉 우리로 하여금 책에 대한 믿음을 유지하도록 도와준다.
⑧ 우리의 기억은 전혀 쉬지 않고 열심히 작동한다. 소설의 의미와 즐거움을 완성하기 위해 우리는 소설의 감춰진 중심부(주제)를 찾으려 한다. 감춰진 중심부를 찾기 위해선 소설의 모든 세부사항을, 마치 나무의 모든 잎사귀를 기억하는 것처럼, 기억하고 있어야 한다. 그러나 사실 모든 것을 기억한다는 건 어려운 일이다. 이 어려움은 소설 형식의 경계와 직결된다. 소설은 읽는 사람이 모든 세부 사항을 기억할 수 있을 정도의 분량이어야 한다. 잘 짜인 소설에서 ‘모든 것’은 ‘다른 모든 것’과 관련이 있다.
⑨ 우리는 최대한 주의를 기울여 소설의 감춰진 중심부를 찾는다. 이것이 바로 소설을 읽을 때 우리의 머릿속에서 무의식적으로, 의도적으로 가장 많이 하는 작업이다. 소설에는 우리가 그 존재를 믿으며 찾는 감춰진 중심부가 있다.
어쩌면 우리가 소설을 가르친다고 할 때, 실제 해야할 일은 학생들이 소설을 읽으면서 파묵이 말한 9가지 일들을 잘 수행할 수 있도록 도와주는 일일 것입니다. 하지만 전 무엇보다도 파묵이 우리에게 중요하다고 말한 것이 2가지라고 생각합니다. ‘감각’과 ‘중심부’가 그것입니다. 우리는 학생들이 소설을 읽을 때 집중하여 소설의 모든 단어와 문장을 ‘지각’하도록 도와줘야 합니다. 그리고 그러면서 그렇게 감각한 소설의 모든 세부사항들의 배후에 감춰진 ‘중심부’를 스스로 찾도록 도와줘야 합니다.
소설의 세부사항들을 감각하는 체험은 다른 서사장르의 세부사항을 감각하는 것과 본질적으로 다른 체험입니다. 첫 번째로 소설은 신이나 영웅의 이야기가 아니라 ‘인간’의 이야기입니다. 현대소설의 세계는 우리가 일상적이고 보편적으로 경험하는 세계입니다. 두 번째로 소설은 다른 서사장르와 달리 독자를 이야기의 풍경 속으로 끌어들입니다. 소설이 갖는 두 번째 체험의 독특함을 파묵은 다음과 같이 설명합니다.
“소설 읽기는 세상을 등장인물의 눈과 정신과 영혼을 통해 보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낭만시, 서사시, 메스네비, 장시 같은 현대 이전의 서사들은 세상을 독자의 관점에서 묘사합니다. 이러한 전통 서사에서 주인공은 어떤 풍경 속에 있고, 우리 독자들은 외부에 있습니다. 소설은 우리를 풍경 속으로 초대하고, 우리는 세상을 그 안에 있는 등장인물의 관점에서, 그의 감각을 통해서, 그리고 가능하다면 그의 단어를 통해서 봅니다. (중략) 주인공들의 삶, 세상 속에서 그들이 차지한 위치, 그들이 이 세상을 살아가며 순간순간 보고 느끼는 방식 등이 순문학 소설의 소재가 됩니다.”
"톨스토이는 우리에게 안나 카레니나가 이런저런 캐릭터의 소유자이기 때문에 모스크바-상트페테부르크 간 기차에서 어떤 행동을 했다고 묘사하지 않습니다. 다만 불행한 결혼 생활을 하는 어떤 여인이 모스크바의 어떤 무도회에서 젊고 잘생긴 장교와 춤을 춘 후 귀가하는 기차에서 손에 소설을 든 채 어떤 생각에 잠겨 있었는지 일일이 설명할 뿐입니다. 안나가 불멸이 된 것은 이 모든 사소한 세부 사항이 옳았기 때문입니다. 창밖에 눈이 오는 밤, 객차 안 모습, 안나가 읽었거나 읽으려고 애썼던 소설, 그 모든 것을 그녀가 보고 이해하고 느낀 만큼 우리도 보고 이해하고 느낍니다. 소설 예술에서 가장 독특한 면은, 주인공들이 모든 감각으로 ‘느끼고’ 이해하는 대로 세상을 보여 준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특징은 현대소설이 가진 ‘초점화’란 장치 때문입니다. 최시한 교수는 ‘초점화’에 대해 다음과 같이 설명합니다.
“서술자는 자기가 이야기하는 세계 안에 있을 수도 있고(일인칭 이야기 상황), <소나기>의 경우처럼 밖의 어딘가에 있을 수도 있다(작가적 이야기 상황), 또 자기가 대상을 직접 보고 말할 수도 있지만, 다른 인물(초점자)의 눈을 빌어 바라보면서(인물시각 이야기 상황), 그의 목소리나 자기 목소리로 말할 수도 있다. 그리고 대상을 많이 깊게 볼 수도 있고 조금만 볼 수도 있으며, 따뜻한 태도로 가깝게 보는 반면 차갑고 멀게 볼 수도 있다. 이처럼 대상을 서술할 때 특정 부분에 중점을 두고, 특정한 방식으로 보는(드러내는) 행위를 ‘초점화’라고 한다.”
현대소설이 일반적인 ‘인간’의 이야기라는 것 그리고 초점화를 통한 주인공에게 체험된 세계를 전달한다는 것은 어떤 의미가 있을까요? 현대소설을 통해 우리는 우리와 같은 또 다른 인간의 세계체험을 고스란히 그의 눈으로 다시 체험할 수 있습니다. 이 체험은 우선 자유로움을 느끼게 합니다. 일상 속에 갇힌 내가 또 다른 제 2의 현실로 탈출하는 체험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 제 2의 현실은 또한 우리의 현실과 완전히 동떨어진 세계가 아닙니다. 소설에서 주인공이 보는 세계, 겪는 사건, 그 속에서 느끼는 심리등은 우리가 겪었거나, 충분히 겪을 수 있는 것들입니다.
소설에서 주인공이 겪는 경험이 내가 실제 경험했던 일과 비슷하더라도 우리는 강렬하면서도 어떤 의미에선 낯선 체험을 하게 됩니다. 예를 들어 전 대학생때 아버지의 묘를 이장했던 경험이 있습니다. 몇 달 뒤에 이동하의 <젖은 옷을 말리다>란 소설을 읽었는데, 그 소설엔 빨치산이었던 아버지의 묘를 이장하러 고향을 찾은 주인공이 등장합니다. 전 이 소설을 읽으면서 매우 강렬한 감각적 체험을 했습니다. 일을 시작하기 전에 올린 제의, 봉분에 흩뿌린 술, 봉분을 허물던 포크레인, 조금씩 드러나던 유골, 뼛조각을 골라내던 손길들, 다 맞춰진 유골이 주던 허망한 느낌, 어색한 친지들의 말들 혹은 침묵 그리고 여인들의 눈물, 화장하기 전 올려놓은 노잣돈, 유골이 타며 난 노린내, 불 주변에 모여 나눈 이런저런 이야기들과 술잔들. 이 모든 것들이 제가 경험했던 것과 너무 흡사했습니다. 아니 어쩌면 그 소설은 제가 경험했던 체험을 제대로 체험하게 해주었습니다. 마치 제 몸에 잠겨있던 감각들을 다시 꺼내어 제게 보여주는 듯한 느낌이었습니다.
경험하는 몸은 맹목적입니다. 우리의 일상은 너무나 다양한 우연적 계기들이 침투하기 때문에 우리는 우리의 체험을 반성적으로 바라볼 여유를 갖지 못합니다. 하지만 소설의 사건은 선택적이고 인과적입니다. 플롯은 우연적 계기들을 처내버리고 우리는 어떤 경험에 집중하게 됩니다. 소설에서 주인공이 겪는 모든 사물과 사건들은 특별한 것들입니다. 소설은 그렇게 인간의 삶을 성찰적으로 감각하게 해줍니다. 주인공이 보는 세계를 감각적으로 체험해본다는 건 매우 중요한 소설만의 매력입니다. 우리의 삶을 성찰하게 하는 건 꼭 문학만은 아닙니다. 철학도 있고, 종교도 있습니다. 그러나 문학만이 그리고 그중에서도 현대소설만이 우리의 일상적 체험을 감각적으로 느끼고 성찰하게 합니다. 파묵은 다음과 같이 철학/종교와 소설의 차이를 설명합니다.
“소설은 삶의 가장 표면에 있는 모습, 그러니까 우리 감각이 우리에게 부여하는 사적인 경험과 지식에 대해서도 말하지만, 때로는 가장 깊숙이 숨어 있는, 그러니까 중심부에, 삶의 본질에, 톨스토이가 ‘삶의 의미’라고 했던 것에, 다다르기는 어렵지만 우리는 그 존재를 낙관하는 그곳에 대한 지식, 직관, 실마리를 줄 수 있기 때문입니다. 삶의 본질과 관련된 가장 심오하고 가장 귀중한 지식에, 철학의 난해함이나 종교의 사회적 압력에 시달리지 않고도, 우리의 경험에서 출발하여 우리 자신의 이성으로 도달할 수 있다는 것은 우리가 상상할 수 있는 가장 평등하며 가장 민주적인 희망입니다.”
우리의 일상적 경험을 다시 감각적으로 체험하면서 이성의 힘을 사용하여 삶의 본질, 심오한 깨달음에 도달할 수 있는 것. 이것이 바로 파묵이 말하는 현대소설의 의미와 가치입니다.
"따라서 소설 읽기의 목표는, 모든 것의 원천이며 견고한 관념인 듯 여겨지는 이른바 ‘작자의 의도’라든가 ‘주제’ 따위를 찾아내는 데 있다고 하기 어렵다. 사실 주제라는 것도 ‘작자의 의도’나 ‘작품 속’에 금고 안의 돈뭉치같이 들어 있다기보다, 작자로부터 독립된 완성체인 작품을 바탕으로, 독자의 해석에 의해 형성되는 것이다. 소설을 읽는 과정은 그것을 쓰는 과정을 닮았는데, 실제로 독자는 눈으로 읽고 있는 이야기를 바탕으로, 작자처럼 종합적이고 창조적인 활동을 하여, 마음속으로 자기 이야기를 쓰기도 한다."(최시한, 『소설의 해석과 교육』p. 52, 문학과 지성사)
우리가 소설에서 체험할 수 있는 최고의 희열은 중심부에 도달하는 순간일 것입니다. 그것은 소설 전체를 통찰하는 경험입니다. 그 체험은 절대적입니다. 그래서 그 체험은 전달될 수 없고 가르쳐질 수도 없습니다. 히말라야에 직접 오른 사람만이 그 산의 압도적 아름다움과 숭고함을 체험할 수 있습니다. 위대한 작품일수록 중심부의 탐색은 끝이 없습니다. 그러한 작품은 우리로 하여금 몇 번이고 다시 읽게 만듭니다. 최시한 교수의 말처럼 주제란 독자의 해석에 의해 형성되고 내가 계속 변하듯 발견했다고 느낀 중심부도 계속 달라지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풍경 속 숲, 집, 강이 가진 매력에 얼마나 휩싸이건, 나무와 절벽의 경이로움, 기이함, 아름다움에 얼마나 매료되건, 그 풍경에는 각각의 나무와 사물을 다 합친 것 이상의 심오하고 신비스러운 의미가 깃들어 있습니다.(......) 소설 독자는 풍경 속 모든 나무(이야기가 진행되는 동안 마주친 사람, 사물, 사건, 일화, 이미지, 약간의 정보, 시간의 비약, 회상 그리고 가끔 나왔던 묘사 전부)가 배후에 있는 더 심오한 의미, ‘감춰진 중심부’를 암시하기 위한 장치라는 것을 압니다.”
“처음에 독자는 소설의 주제가 고래잡이들의 고단한 삶이라고 생각할 수 있다” 왜냐하면 『모비딕』의 초반부는 마치 사회 비판적인 소설처럼 읽히기 때문입니다. 심지어는 신문 르포르타주처럼 고래 사냥과 고래잡이의 삶을 상세히 다루기까지 합니다. 뒤이어 보르헤스는 “나중에는 고래를 추적해 파멸시키려는 에이햅 선장의 광기가 주제라고 생각한다.”라고 말합니다. 왜냐하면 『모비딕』의 중반부는 분노에 사로잡힌 강인한 남자의 독특한 캐릭터를 다루는 심리 소설 같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보르헤스는 진정한 주제이자 중심부는 전혀 다른 것임을 우리에게 상기시킵니다. “페이지가 넘어갈수록 이야기는 방대해지면서 어떤 우주의 차원에 이르게 된다.”
"포크너의 『야생 종려나무』는 사실 두가지 이야기가 결합된 소설입니다. 작가 자신도 한 인터뷰에서 서로 다른 두 이야기를 결합했다고 말한 적이 있습니다. 그러나 포크너는 두 이야기가 서로 맞물리게 하지 않았습니다. 마치 두 벌의 카드가 섞이듯, 서로 다른 두 소설의 장들이 병치되어 있을 뿐입니다. 우리는 먼저 헨리와 샬럿이라고 불리는 두 연인의 힘든 사랑 이야기가 서술된 장을 읽게 됩니다. 그런 다음 『노인』이라는 다른 소설의 첫 장을 읽게 됩니다. 여기서는 미시시피 홍수와 싸우는 어떤 죄수의 이야기가 나옵니다. 서로 다른 두 이야기는 『야생 종려나무』 내내 교차하지 않습니다. 심지어 어떤 출판사는 『노인』을 별도의 소설로 출판하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이것이 『야생 종려나무』의 일부이기 때문에, 우리 소설 독자들은 서로 비교하고 공통점을 모색하며, 그렇습니다, 공통된 중심부를 모색하며 읽습니다."
"내가 ‘중심부’라고 부르고 우리 소설가들이 본능적으로 느끼는 이 지점은 무척이나 중요해서, 그것을 상상 속에서 바꾸기만 해도 소설의 모든 문장, 모든 페이지가 바뀌고, 완전히 의미가 달라진 느낌이 드는 것입니다. 소설의 중심부는 어디서 오는지는 알 수 없지만 숲 전체를 밝히는 빛과 같습니다. 나무 하나하나, 오솔길 하나하나, 우리가 떠나온 곳과 우리가 앞으로 나아갈 곳까지, 가시덤불과 가장 어둡고 통과하기 어려운 수풀까지 모두 비춰 줍니다.
그 빛을 느끼는 한 우리는 길을 계속 갈 수 있고, 설사 어두운 곳에 있더라도 곧 이 빛을 볼 수 있다는 희망을 가질 수 있습니다. 모든 숲이 보이게 하고 여행에 의미를 부여하는 것이 이 중심부이고, 이 빛입니다."
깨달아야 할 게 무엇이 있겠는가? 다른 사람들은 모두 자기 인생의 진로를 잘 찾아갈 줄 알고 있었는데 그는 전혀 알 수 없었다. 그 계집애도 마찬가지로 알지 못하고 있었다. 세상은 아름답지만 그들에겐 둘 다 아무런 그럴듯한 생각이 없었다. 뒤죽박죽 된 말을 주고받는 것 이외에는. 그렇지만 살기는 살아야 했다. 그는 높은 목소리로 말하기 시작했다.
“살아야 했다구. 알아들었어? 너는 왜 바닷물 속에 가서 쳐박혔니? 너는 나처럼
몇 시간씩 헤엄칠 줄을 몰랐으면서. 물론 너나 나나 도대체 어디에 쓸모가 있었겠니?
그래도 살아야 할 걸 그랬다구. 뭣 때문이냐구? 아무것 때문도 아니지. 왜나하면
너는 며칠이고 몇년이고 계속해서 고함을 질러대야 했기 때문이야.”
그렇게 말을 하고 있으려니까 속에서 분노가 치밀어 오르는 것이 느껴졌다.
“그냥 여기에 있기 위해서라두. 파도처럼, 자갈돌들처럼. 파도와 함께, 자갈돌들과 함께.
새들과 함께. 빛과 함께. 모든 것과 다 함께. 빛과 함께 말이야. 이 망할 놈의 계집애야!”
그는 뒤에서 어떤 외치는 목소리가 들렸다.
“너 뭘 그렇게 지절거리고 있니?”
그것은 작은 숲속에서 이틀 동안이나 절망적으로 헤매다가 돌아온 아멜리였다.
그는 돌아서서 분노에 찬 목소리로 대답했다.
“망할놈의 계집애라 그랬어.”
그 여자는 드디어 그의 화를 돋우는 데 성공한 것이었다.
기뻐서 어쩔 줄 몰라 하면서 그 여자는 그를 마구 조롱해댔다. 그리고 마침내,
“요전 날은 왜 도망쳐버렸었니?”
그 목소리를 듣자 황홀해져서 그는 다시 한 번 “망할 놈의 계집애”라고 소리치더니,
“너는, 너는 왜 도망쳐버렸지?”하고 그는 물었다.
그는 그 여자의 어깨를 어찌나 급작스럽게 잡았는지 여자는 모래 위에 쓰러졌다.
그는 여자의 곁에 앉았다.
“난 네가 나를 그렇게 골린 것을 절대로 잊지 못하겠어.
넌 아무것도 믿지 않고 있었지? 그렇다고 고백해.”
하고 그는 점점 더 강하게 끓어오르는 성난 목소리로 말했다.
마침내 아멜리가 소리쳤다.
“나도, 나도 절대로 잊지 않겠어. 나는 세상이 끝장나는 날까지 매일같이 너에게
시비를 걸거야.”
그는 되풀이했다. “매일같이”그리고 그는 황홀한 표정으로 여자를 쳐다보았다.
그는 급작스러운 어조로 덧붙여 말했다.
“죽을 때까지”
세상은 얼마나 순수합니까? 하느님! 그 여자는 가장 분별없는 목소리로 대답했다.
“누가 죽는댔어, 이 병신아!”
그리고 그들은 바다 쪽으로 시선을 던졌다.
(앙드레 도텔, 『인생의 어떤 노래』중에서)
사람들은 뱅상을 큰 몸집에 주먹만 센 바보로, 아멜리를 얼굴은 예쁘지만 악소리를 질러대는 끔찍한 성격의 여자아이로 바라보았습니다. 주먹을 쓰는 뱅상도 악을 쓰는 아멜리도 세상과 대화하는 법이 서툽니다. 학교에서 전 뱅상이나 아멜리 같은 학생들을 종종 만납니다. 소설은 뱅상을 갑자기 똑똑하게 만들 수도, 아멜리의 성격을 온순하게 고쳐줄 수도 없습니다. 소설은 뱅상과 아멜리를 좋은 대학에 보내주는데도 큰 도움이 되지 않습니다. 하지만 소설은 뒤죽박죽인 뱅상과 아멜리의 삶에도 살아야할 이유가, 그냥 여기에 있는 자갈돌들과 새들과 그 모든 것들과 함께 있어야 할 이유가 있다는 것을 알려줍니다. 사실 그 모든 지긋지긋한 것들이 사실 ‘빛’과 함께 있다는 걸 우리는 소설을 읽으면서 체험할 수 있습니다. 학생들이 강렬한 ‘빛의 체험’을 우리의 일상적 사물과 사건들을 통해서 읽고 쓸 수 있도록 도와주어야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