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치 시리얼을 먹을 만큼만 그릇에 담듯
나는 학원에서 영어를 가르친다. 더 정확히 말하면 '영어 문법'. Grammar Compass(학생들은 줄여서 GC라고 부르더라)라는 이름의 강의이고 영문법 공부에서 길을 제시하는 나침반이 되겠다는 비전이 있다. 이번 달로 벌써 3달 째다. 1~2월엔 GC 1기라 하여 어찌 보면 베타 테스트 같은 느낌이었다. 첫 수업이라 내용도 약간 불완전한 부분이 있었고 내 강의력은 더더욱 그랬다. 가끔은 내가 무슨 말을 하고 있는 건지 모를 정도였으니까.
군대에 있을 때부터 준비를.... 아니 사실 고등학생 때부터 영어 선생님이 되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 선생님이 되고 싶다고 하면 보통 학교 선생님이 떠오르겠지만 나는 학원 선생님이 되고 싶었다. 가르치고 싶은 대로 가르칠 수 있고 특히 유명해지면 전국적으로 어마어마한 영향을 미칠 수 있기 때문이다. 내가 이런 생각을 하게 된 것은 고등학교 2학년 때였다. 당시 언어영역 1타 강사 이근갑 선생님의 강의를 시작으로 외국어영역 로즈리, 수리영역 박승동, 사회탐구영역 고종훈, 안상종, 위종욱, 이용재 선생님 등 소위 '스타강사'들의 인터넷 강의를 통해 공부했다. 다니던 동네 종합학원보다 훨씬 양질의 수업이어서 성적도 올랐고 심지어 가성비도 좋아 학원비를 크게 줄일 수 있었다. 게다가 힘든 수험생활에 지쳐갈 때 즈음 선생님들께서 응원의 말을 해주시고 공감해주시고 하는 모습에 큰 에너지를 얻고 잘 견뎌낼 수 있었다. 저렴한 수업료, 양질의 수업, 그리고 선생님들의 따뜻함에 감동하면서 '아.. 나도 이런 선생님이 되고 싶다. 어둠 속에서 학생들에게 빛을 밝혀줄 그런 선생님이 되고 싶다.'라는 생각을 하고 꿈을 키웠다. 하지만 막상 대학 진학을 할 때는 그 꿈을 이루기가 너무 어려울 것이라는 바보 같은 생각을 했다. 그래서 취업이 잘 된다는(물론 지금은 엄청 힘들다고들 하지만) 경영학부를 선택했다. 일반적인 경영학도로서 열심히 공부했고 스펙도 쌓고 대기업 취업을 최종 목표로 정신없이 살다가 군입대를 했다. HRD 전문가, 강연가, 공인노무사, 공군 전투기 조종사까지... 이것저것 많이 쑤셔보았지만 역시 고심 끝에 나온 건 영어 선생님이었다. 그래서 전역이 3달 남았을 무렵부터 원래 하던 전투기 조종사 시험 준비와 더불어 영어 공부를 더 깊게 했다. 전역하고 15년 4월에 전투기 조종사 시험을 보고 6월에 합격통보를 받았지만 그땐 이미 마음이 영어 선생님으로 기울었던 터라 주저 없이 조종사의 길은 포기했다. 그 이후 영국으로 교환학생을 가기 위해서 7~9월은 IELTS라는 공인 영어 시험 점수를 땄고 10월부터는 제이라이프스쿨이라는 영어회화 학원에 등록해서 지금까지 다니고 있다. 그리고 학원에서는 매달 마지막에 3분 분량으로 프리스피치를 한다. 그 자리에서 나는 이 이야기들을 쏟아냈고 나만의 커리큘럼으로 영어 선생님이 되겠다는 포부를 약 40명 정도 앞에서 밝혔다. 약 3달 간의 준비 끝에 올해 1월부터 Grammar Compass라는 이름으로 무료 스터디를 진행하고 있다.
사실 Grammar Compass 1기(1~2월)는 내 생각보다 수업의 난이도를 많이 낮춰서 했다. 원래 중급자들이 영어에 재미 붙인 상태에서 문법을 한번 정리할 목적으로 들으면 딱 좋은 수업을 만들려고 했다. 하지만 영어를 많이 어려워하시는 분들과 함께 해서 난이도도 더 많이 낮추고 수업 진도도 원래 하려던 것의 반 정도씩 나갔었다. 그럼에도 그분들은 만족해하셨고 그분들의 실력도 향상되었다. 그리고 이번 달에 2기를 모집했다. 지원해주신 다섯 분과 함께 10일에 OT를 진행했다. 그리고 14일 대망의 첫 수업을 했다. 원래 한분은 중급반, 나머지 분들은 고급반에서 공부하고 계신 분들이라 그런지 거의 완벽하게 이해하셨고 수업 진도도 아주 무리 없이 다 나갈 수 있었다.
나는 굉장히 기뻤고 행복했다. 왜 그랬을까? 진도를 다 나가서? 학생들이 이해를 잘해서? 물론 그것도 맞다. 하지만 내가 기분이 좋았던 진짜 이유는 선생으로서 아주 큰 깨달음을 얻었다는 것이다. 바로, 과유불급. 학생들 개개인의 역량이 다르다. 그리고 그 역량에 맞게 지식을 전달해야 한다. 너무 많이 가르쳐서도 안되고 그렇다고 너무 조금 가르쳐도 안된다. 시리얼을 먹을 때와 마찬가지다. 그릇에 시리얼을 담는데 배고픈 게 해결이 될 정도로 너무 조금 담아서도 안되고 그렇다고 시리얼이 넘쳐버리면 안 된다. 사실 첫 수업 이후 1기 때보다 어려운 것들을 해도 되고 양을 조금 늘려도 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번뜩, 내가 지금 그릇이 가득 찼는데도 시리얼을 들이붓고 있는 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너무 많이 알려주지 말아야지. 부담 주지 말아야지. 영어 공부하는 게 재밌다고 느끼게 해줘야지. 사실 수업을 1번 밖에 안해서 아직 그릇이 얼마나 찼는지는 잘 모르겠다. 몇 번 더 수업하다 보면 알겠지? 욕심이 나더라도 그걸 알 때까지는 그릇 밖으로 시리얼이 흘러넘치지 않게 적당히 적당히 잘 담아야겠다.
2016. 03. 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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