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 혼자인 윤호에게 형이.
"그래서, 중황 군은 어떻게 생각해? 중황 군이 봐도 심각한 일 맞지?"
B 씨는 마지막으로 남은 라테 한 모금을 입으로 넘기며 긴 이야기를 마쳤다. 이 글을 끄적거리는 지금 다시 봐도 꽤나 힘든 이야기였다. 난 남은 라테를 얼른 입 안에 털어 넣고 내가 지을 수 있는 최대한의 감사함을 보여주며 힘든 이야기를 꺼내 주어 참 감사드린다고 답했다.
모두들 자신의 자녀가 잘 크기를 바란다. 어찌 보면 당연한 이야기다. 그 ‘잘’의 조건에는 여러 가지들이 있겠지만 인간관계 같은 요소들이 분명히 포함된다고 본다. 세상 어디에 자기 자식이 외톨이인 것을 원하는 부모가 있을까. 초등학생인 아들을 키우는 B 씨는 바로 그러한 이유로 슬퍼하고 있었다.
며칠 전 B 씨는 몸이 좋지 않다는 아들과 함께 병원을 같이 가주기 위해 학교 앞에서 아들을 기다리고 있었다. 하굣길에 패딩 모자를 푹 눌러쓰고 혼자 이어폰을 끼고 터벅터벅 걸어오는 한 아이. B 씨가 처음 그 아이를 봤을 때 느꼈던 감정은 딱하다는 감정이었다. 조금씩 거리가 가까워지고 그 아이가 바로 자신의 아이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을 때 그녀의 감정은 슬픔으로 바뀌었다. 난 어렴풋이 B 씨의 마음과 아들의 마음을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러면 윤호(가명)는 집에 와서 어떤 것들을 주로 하나요? 게임이라던가…”
“이상하게 윤호는 컴퓨터나 그런 것들은 안 하는데 책을 많이 읽어. 서점이나 도서관을 좋아하더라고.”
B 씨의 말에 난 생각하던 것을 잠시 멈추고 B 씨를 바라봤다. 생각나는 것이 있었다. 충분히 힘들 수 있는 일이라며 고개를 끄덕이던 나는 B 씨에게 말하고 싶은 것이 있었다. 뭔가 생각나는 것이 있었기에 난 입을 조심스럽게 열었다.
되돌아보면 내 초등학교 시절은 '혼자'라는 단어가 잘 어울리는 때였다. 난 그 나이 때의 남자애들처럼 치고박는 운동이나 게임을 좋아하는 것도 아니었고 어디든지 잘 낄 수 있는 숫기가 있었던 것도 아니었다. 녀석이 좋아하는 장소의 조건은 다음과 같았다. 혼자만의 시간을 보낼 수 있는 조용한 장소와 책이 있는 곳. 아홉 살 먹은 꼬맹이는 그렇게 학교 도서관을 제일 좋아하게 되었다. 그곳은 이미 오래전에 사라졌지만 내 기억 속에서는 아직도 생생한 장소다. 실내화를 신고 거닐던 나무 바닥, 오래되어 조금만 빨리 걸어도 삐그덕 소리를 내던 바닥을 가로지르면 머그컵에 가득 담긴 커피를 드시고 계신 사서 분이 계셨다. 봉사직으로 하는 그분은 낡고 사람도 없는 도서관에 매일 오는 내가 꽤나 기특했는지 매번 반갑게 맞아주시곤 하셨다.
그 도서관에는 나만 있었던 것이 아닌 다른 한 친구도 함께 경쟁하듯이 책을 읽어댔었는데, 그 친구는 바로 앞서 말한 사서 분의 딸이었다. 가끔 그 친구는 전날 서점에서 사 왔을 따끈따끈한 신간을 가져오며 “늬 집엔 이런 것 없지?”라는 의기양양한 표정으로 날 바라봤던 기억이 난다. 그렇게 우리는 반은 재미로, 반은 경쟁심으로 책을 읽었다. 누군가 세계문학전집을 읽으면 누군가는 한국문학전집을 읽었다. 나는 헤르만 헤세를 독파했고 친구는 쥘 베른을 독파했다. 어느 날은 에거서 크리스티를, 또 다른 날에는 코난 도일을 읽어댔다. 20년 남짓한 짧은 생을 산 나지만 그 생을 되돌아보면 그때만큼 책에 집중했던 때가 없는 것 같다. 부모님은 가끔 그때의 내 이야기를 하며 감탄하시는데 그럴 만한 일이다. 하루에 200쪽이 넘는 책 두세 권을 읽어치우는 녀석이 어디 흔한가. 며칠 전 그때처럼 책을 펴고 읽어보려고 노력했다. 결과는 보기 좋게 실패해 버렸다. 책을 읽는 잠깐 동안의 순간에도 갖가지 생각들로 머리가 복잡해 다른 일을 하지 않고는 버틸 수가 없었던 것이다. 아마 다시는 오지 않을 순간 아닌가 싶다.
그때의 나나 부모님은 내가 뭐라도 될 줄 알았지만 책은 꽤나 정직했다. 공부라는 것을 등한시했던 내게 책은 그리 많은 것들을 주지 않았다. 수시를 노릴 성적이 되지 않아 쓴 논술에서 난 연이어 예비를 받았고 탈락의 쓴맛도 연이어 보았음은 물론이다. 그런 내게 어머니는 그 책 짬밥은 어디로 간 거냐고 장난 스래 말씀하셨다.
어쩌면 책은 내게 아무런 도움을 주지 않았을 수도 있다. 하지만 그게 아니라는 걸 난 너무나 잘 알고 있는 걸. 글을 읽는 사람에서 쓰는 사람으로. 그러한 생각을 처음으로 하게 된 계기는 바로 책을 읽으면서였다. 자존심 낮고 숫기 없던 내게 책은 용기를 줬다. 책을 읽으면 읽을수록 고마웠다. 그리고 결심했다. 내가 책이라는 존재에게 빚을 진 것처럼, 나도 글을 통해 누군가에게 힘을 주고 싶다는 것. 그리고 책 속에 등장하는 다양한 사람들을 만나는 상상을 했다. 아마 지금 하는 일들도 비슷한 일의 연장 아닐까.
책은 지금의 나까지 바꿔 놓았다. 책 속에 있던 다양한 이야기와 경험들은 내게 소중한 자산이 되었다. 다양한 주제로 말을 꺼낼 수 있는 것이, 끊임없이 배우는 자세를 만들어 준 것도 다름 아닌 책이다. 그렇게 난 조금 더 성장했다. 지금의 내겐 술 한 잔 나눌 수 있는 친구가 있다. 별 이야기 안 해도 함께 웃을 수 있는 이야기를 나눌 친구가 있고, B 씨처럼 나이 차이에도 불구하고 친하게 지내는 지인도 있지 않은가. 사람으로 받은 상처는 결국 사람으로 치유해야 한다는 이야기를 (어릴 적 누군가 내게 말해준) 이해하게 된 것도 물론이다. 이 모든 부족한 날 여기까지 키워 준 것은 책이었고 그렇기에 난 책에게 무한한 감사를 보낸다. 그러한 이유 때문에 더욱 윤호를 믿고 싶은 건지도 모르겠다.
가끔 어릴 때를 생각한다. 나를 아는 사람들 모두가 나를 걱정했다. 그래도 난 지금 그럭저럭 잘 지내고 있다.